소설리스트

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80화 (80/120)

80화

레온하르트는 선혈을 뚝뚝 떨어트리며 무릎을 꿇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자신의 품속에 안겨 있었던 셀린느를 일부나마 찾아보려 했지만 남은 건 흥건한 붉은 피뿐이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쉰 목소리로 이미 여러 번 부르짖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연구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는 거대한 늪은 고요했다.

지나칠 정도로.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주변의 기이함을 눈치채지 못했다. 셀린느가 죽었다는 사실이 그의 눈을 가리고 사지를 묶었기에.

‘……내 탓이다.’

만약 자신이 수정구를 깨라고 하지 않았다면 셀린느는 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고민하는 셀린느가 수정구를 깨도록 밀어붙였다. 그 결과, 수정구 대신 셀린느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수정구를 꼭 쥔 채 고민하던 셀린느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자신은 그때 뭐라고 했던가.

-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길 순 없겠나?

마치, 셀린느가 죽는 게 그녀 탓인 것처럼.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

결국 전부 자신의 탓이었다.

애초에 셀린느가 이곳에 온 것부터가 그에게서 받을 수 없는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으니.

‘……나는 완전히, 틀렸었구나.’

셀린느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게 하도록 했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어.’

기이한 충동이 레온하르트를 사로잡았다.

셀린느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녀의 가냘픈 손을 꽉 쥐고 다시는 놓아 주지 않겠다는 충동이…….

레온하르트는 손으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셀린느는 지금쯤 살아나 환상통에 겨워 괴로워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구소는커녕 마법사들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가 여태껏 본 그 어떤 늪보다도 거대한 늪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동식물들로 가득한 평범한 늪들과 달리, 새카만 진흙으로 가득한 늪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늪에 살짝 발을 들였다가, 흡수라도 할 기세로 강력히 빨아들이는 진흙에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는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이름을 불렀다.

“셀린느!”

대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고 상황을 잠시 정리했다.

셀린느는 그에게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되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오직 늪뿐.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그 자신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한 환경에서 신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머리가 냉혹한 결론을 내려 주었다.

셀린느는 이 늪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죽음을 연신 반복하면서.

‘찾아야 해……!’

레온하르트는 미친 사람처럼 늪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흡착력 강한 진흙에 파묻혔다.

레온하르트는 그 상태로 라쉬르를 휘두르며 작은 길을 만들었다.

‘……?’

급작스레 진흙에 큰 너울이 일더니, 파도가 백사장을 거슬러 올라가듯 레온하르트를 기슭으로 패대기쳤다.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늪에 뛰어들었다.

늪지대의 이번 반응은 더욱더 강력했다.

레온하르트가 발을 들이자마자, 곧바로 기슭으로 패대기친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는 열 번은 족히 넘게 시도한 다음에야 자신이 이 늪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망감이 그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셀린느는 죽어 가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여러 번 죽었다 되살아나고 있을지도 몰랐다.

‘……침착하자.’

레온하르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잠시 숨을 골랐다. 당장 도움이 안 되는 생각은 집어치워야 했다. 이미 패닉에 빠져 멍청하게 시간만 허비하지 않았는가.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서 셀린느를 구해 내야 했다.

레온하르트는 두 발은 기슭에 단단히 버티고 선 채로, 라쉬르를 진흙에 꽂아 넣었다.

라쉬르에게서 푸른 불꽃이 분수대처럼 튀어 올랐다.

‘효과가 있어.’

진흙은 크게 요동쳤지만 레온하르트가 몸을 진흙에 들였을 때와는 달리 라쉬르를 뽑아내지는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얼굴에 묻은 피는 땀에 씻겨 내려간 지 오래였다.

수십 분 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다리는 이미 힘이 풀려 기슭에 무릎을 꿇었으나 레온하르트는 힘을 풀지 않았다.

처음엔 라쉬르에 무력하게 당했던 진흙의 힘은 점점 더 강해졌다.

레온하르트의 집중력이 한순간만 흐트려져도 이 모든 것들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도 결국은 인간.

여태껏 상대해 본 적 없는 적수에 대항하기에는 한계가 올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레온하르트는 이를 더욱 세게 악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서 무너지면 다시는 셀린느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입 밖으로 셀린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운 것처럼 찬란한 금발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청회색 눈을 지닌 가냘픈 여자가 머릿속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 순간, 이미 기력이 다 빠진 게 정상이었던 레온하르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진흙은 라쉬르가 처음 박혔을 때처럼 요동치더니, 이내 힘을 잃어버렸다.

‘……다 되었군.’

레온하르트는 직감했다.

눈앞의 늪은 외견상으론 전혀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자신이 이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일어선 다음, 늪에 발을 들였다. 아무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진흙에 발이 푹 들어갔다.

레온하르트는 눈앞의 진흙들을 라쉬르를 휘둘러 베어 내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셀린느를 찾기를 기원하면서.

***

셀린느는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비명을 지를 입도, 성대도, 허파도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나가 버렸으니까.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어떤 죽음보다도 강렬한 고통에 끝도 없는 비명을 토해 냈을 것이다.

되살아났을 땐, 셀린느는 캄캄한 어둠 속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파, 아파…….’

여기가 어딘지, 대체 왜 죽었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방금 겪은 죽음을 되풀이하는 듯한 환상통이 셀린느를 지배했으니까.

바닥에서 몸부림치기만 수십 분.

셀린느는 환상통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한동안 바닥에 멍하니 누워 있었다.

기진맥진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문득 머릿속에 익숙한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레온하르트 없이 겪는 환상통은 이렇게 힘들구나.’

셀린느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저 레온하르트가 보고 싶었다.

죽기 직전 얼핏 본 듯한 레온하르트도 너무 힘에 겨운 그녀의 머릿속이 만들어낸 환상이리라.

‘내가 이러고 있는 걸 모르겠지.’

어쩌면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호텔에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를 다시 보고 싶다면, 스스로가 움직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이 어둠은 평범한 어둠이라는 게 느껴졌다. 셀린느는 작은 손짓으로 불을 환하게 밝혔다.

그녀는 웬 좁다란 통로 안에 있었다.

‘저기가 입구구나.’

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셀린느는 자꾸만 무너지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이며 입구로 다가갔다.

잠시 후.

입구를 나서자마자 셀린느의 청회색 눈이 휘둥그렇게 열렸다.

‘늪…….’

셀린느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바다처럼 광활해 보이는 늪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스테이지의 시작이었다.

만약 상황이 조금만 더 괜찮았더라면 셀린느는 기뻐했을 것이다.

드디어 기다림이 끝났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이제 이곳이 단순히 게임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로즈는…….’

셀린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둠과 싸워 이기고 난 후의 급격한 죽음. 플뤼아 대신 갑작스레 나타난 늪.

만약 자신이 강제로 이동을 당했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마치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것처럼 생성된 작은 지하 통로를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플뤼아의 근처라는 말이 된다.

셀린느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금방이라도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유리에 한 번 굴절되어 그 빛을 빛내고 있었다.

이미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눈물샘이 말라 버릴 지경이었던 셀린느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곳은, 그 아름답던 꽃밭이었다.

셀린느는 큰 소리로 로즈를 불렀지만,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뜨거운 눈물이 발치에 뚝, 하고 떨어졌다.

셀린느는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황급히 훔쳤다.

‘울기는 충분히 울었어.’

그녀는 천천히 늪으로 다가갔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것뿐이었다.

문득, 극심한 고독이 셀린느를 덮쳤다.

셀린느는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다 그 원인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덧 자신은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레온하르트와 함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정신 차리자.’

셀린느는 생채기투성이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자신은 혼자서도 스테이지를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다.

오히려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지나치게 받았을 땐 치트키를 쓴 것으로 인식이 되어 보상을 받지 못하지 않았던가.

셀린느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시커먼 진흙 속에 발을 들였다.

“……?”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게임 속 늪이 어떠했는지 얼추 기억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는 진흙과 사투를 벌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이 진흙은 깊긴 했지만, 아무런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처럼 쉽게 헤치고 지나갈 수 있었다.

‘뭐지……?’

어쩌면 진엔딩 루트이기에 스테이지 또한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꽉 움켜쥐고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진엔딩 루트이기에 스테이지가 바뀌었다면 훨씬 더 어려운 쪽으로 바뀌었으리라.

“……?”

하지만 진흙을 헤쳐 나가면 나갈수록 셀린느는 어리둥절해졌다.

분명 스테이지에서 주인공이 받았던 공격이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진흙 속에서 익숙한 마력의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마법사의 것이 아닌 공격 마법의 흔적.

그녀가 알기론, 이 제국에서 그러한 공격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

셀린느의 피로 붉게 물들었던 레온하르트의 전신은 어느덧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진흙을 제거했다.

직선으로 길을 내는 것이 아닌, 모든 진흙을 일일이 제거했기 때문에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허어억…….”

아무리 레온하르트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잠깐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느덧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이…… 끝났구나.’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오늘 밤, 자신은 셀린느를 지키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쨍그랑!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라쉬르가 떨어졌다.

저 멀리서 누군가가 그가 있는 방향으로 진흙을 헤치며 꾸물꾸물 다가오고 있었다.

금발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