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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79화 (79/120)

79화.

레온하르트의 머리가 순간 멍해지더니 열기로 가득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간수를 어떻게 한 겁니까.”

노기 서린 음성에 마법사 상당수가 몸을 움찔거렸다.

“우두머리 마물들의 핵은 순수한 마력의 집약체다.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동력원이지.”

“그걸 물은 게 아닙니다. 철저하게 조심해서 다루고 있으리라 믿고 그동안 보내왔거늘…….”

레온하르트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자신이 저자세로 나서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미 고함을 지르고 말았으리라.

그간 우두머리 마물의 핵들은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곤 모두 황실로 보냈다.

상당수를 북부로 가져갈 수 있었지만, 황실에서 더 유용하게 쓰이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내가 핵을 이곳에 보낼 일은 없겠군.’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이들을 추궁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설득해 저 아래 있는 거대한 문을 열도록 만들어야 했다.

“문만 열어 주십시오.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미안하네, 대공자.”

침묵이 흘렀다.

레온하르트도, 마법사들도 움직이지 않은 채 자리에서 가만히 대치했다.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몇 가지 방법이 떠올랐으나 그중 어느 것도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쾅!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동시에 거대한 폭발음이 지하에서 들려왔다.

마법사들은 레온하르트처럼 자리에 뻣뻣하게 버티고 서는 대신, 넘어지고 구르며 일제히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에 어둑한 절망이 차올랐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알량한 안위를 위해 동료들을 저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레온하르트가 죽으면 안 된다며 지하로 내려가는 것까지 거부했다.

레온하르트는 숨은 진의를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흑마법사를 제압해야 한다는 의무는 마법사들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개자식들.’

레온하르트는 밖으로 도망치는 한 명 한 명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극심히 흔들리는 바닥 탓에 마법사들이 건물을 빠져나가는 과정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마침내, 모든 마법사들이 건물을 빠져나가고 그 자리엔 오직 레온하르트만이 남았다.

아니, 그랬어야 할 터였다.

‘……?’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환상이 아니었다.

단 한 명이 문가에 남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흔 남짓 되어 보이는 마법사였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대체로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걸 감안했을 때, 쉰은 넘었으리라.

“안 가고 뭐 하나?”

이제는 마법사들의 비위를 맞춰 줄 이유가 없어진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문가에서 머뭇거리는 걸 보니 알량한 양심 때문에 사과라도 하려고 남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쉰 목소리를 토해 냈다.

“……딸이.”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낮게 수긍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로 아래를 가리켰고,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진동했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빠른 속도로 아래로 달려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지하로 들어서는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마법사가 문으로 다가가는 순간, 레온하르트가 문득 떠오른 질문을 던졌다.

“딸 이름이 뭐지?”

“로즈.”

동시에 문이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겁쟁이들.’

진동은 여전히 강하게 울렸지만, 눈앞의 어둠 가득한 공간에서 사악하거나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빛으로 지하 공간을 환히 밝혔다.

“……!”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고통스럽게 요동쳤다.

눈에 들어온 것이라곤 오직 사방에 축 늘어진 사람들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허겁지겁 문가에 몰려 쓰러진 사람들의 맥박을 확인했다.

‘살아 있어.’

레온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들은 단지 의식을 잃었을 뿐,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빠른 걸음으로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살폈다. 셀린느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턱을 식은땀이 타고 흘러내렸다.

“멈춰!”

등 뒤에서 마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멈춰 섰다.

그 순간, 그들 모두를 어둠이 집어삼켰다.

***

셀린느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아주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그 정도로 오래 방어막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테니 아마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있을 순 없어.’

목적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은 이제 두 번 다시 살지 않기로 맹세했다.

구조가 된다 하더라도, 그사이 몇 번을 죽어 버렸다면 그게 무슨 소용인가.

‘문을…… 열어야 해.’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지금 자신이 이 어둠을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이동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셀린느는 방어막을 유지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방어막 또한 불길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발걸음 없이도 바로 발밑 정도는 볼 수 있었다.

“아야야…….”

셀린느는 나지막하게 신음했다.

사람이나 바닥에 굴러다니는 기구에 부딪혀 넘어진 게 벌써 여섯 번째.

어느덧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전신을 조여 오는 어둠의 기운이 약해졌다.

이제 셀린느는 방어막을 거두고도 편히 숨을 쉴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가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는 뜻이리라.

-쾅!

전신에 소름이 쭈뼛 끼쳤다. 거대한 파열음과 함께 동굴이 더욱더 세차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링조르로 다시 방어막을 만들고, 잠시 멈춰 섰다.

하지만 진동은 점점 더 거세어지기만 할 뿐 약해지지는 않았다.

‘가야 해.’

셀린느는 이를 악물고 천천히 나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많은 사람과 기구를 넘어선 후, 셀린느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리며 링조르의 빛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 있는 건 오직 어둠뿐이었다.

만약 셀린느가 조금만 덜 지쳐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녀는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아아아아악!”

동시에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숨을 헐떡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어둠은 그녀의 방어막이 가소롭다는 듯 부숴 버리고 셀린느를 짓눌렀다.

셀린느는 죽을 순 없다는 일념 하나로 발버둥을 치며 링조르를 휘둘렀다.

순간, 어둠의 기세가 아주 조금 누그러들었다.

‘……효과가 있어. 효과가 있어!’

희망이 반짝 빛났다.

셀린느는 속으로 효과가 있다는 말을 주문처럼 연신 외우며 링조르를 휘둘렀다.

조금 전처럼 무식하게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 진을 빼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그 어떠한 정보도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 적수의 약점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함정에 빠져든 지 수십 분 후.

로즈의 아버지가 문을 열기 단 수 초 전에, 셀린느는 어둠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일시적으로나마.

***

“루테!”

레온하르트는 크고 분명하게 마법사를 불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먹혔나.’

감각을 차단하는 마력은 몇 번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그는 눈을 감고 라쉬르를 빼 들어 주변 마력의 흐름을 분석했다.

‘……?’

분명 낯설었으나 생각보다 강한 마력은 아니었다.

그는 섬세한 조각을 하듯 라쉬르를 천천히, 주의하여 움직여 그 주변의 어둠을 파훼했다.

레온하르트가 주변이 라쉬르가 발산하는 빛으로 환하게 밝혀졌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시작으로 천천히 주위의 어둠을 하나하나 제거해 가기 시작했다.

어느덧 진동은 멈추었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지만, 쓰러진 사람이 하나둘 눈에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는 거대한 동굴 내부의 어둠을 거의 다 제거했다.

로즈의 아버지는 딸을 발견하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녀의 곁을 떠나려 들지 않았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레온하르트는 부녀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레온하르트는 겨우 사람 한 명을 가려 놓은 듯한 어둠을 노려보았다.

‘……저기밖에 없나.’

사실 한참 전 지나쳤으나, 왜인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파괴를 뒤로 미루다 보니 끝까지 남은 지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한 차례 크게 들이켠 다음, 라쉬르로 천천히 어둠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행여 어둠 뒤의 사람을 조금이라도 베어 낼까 봐 그 어느 때보다도 조심하면서.

“……?”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품 안에 폭 안길 크기의 어둠이 요동쳤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속에서 타오르는 이름을 뱉어 냈다.

“셀린느! 거기 있나?”

어둠은 더욱더 심하게 요동쳐 급기야는 주위 사물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점점 커지는 어둠을 라쉬르로 차단하려 했지만, 순식간에 거세진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속에, 셀린느가 있겠지.’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둠 속에 함께 삼켜지는 것.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검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코앞으로 성큼 다가온 어둠의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쾅!

고막을 찢을 듯한 파열음이 들렸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분명 조금 전까지 그를 애먹였던 어둠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오직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는 셀린느만이 있을 뿐이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바닥에 무릎을 꿇어 셀린느를 끌어안았다.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은 몸이 셀린느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짐작하게끔 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

“괜찮은가? 제발, 한마디라도 해 다오.”

셀린느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마침내 어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극도의 피로감에 지쳐 그저 바닥에 누워 잠에 빠져들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어느덧 레온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었다.

‘벌써 꿈을 꾸고 있나.’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절박한 음성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 담긴 절망과 고통스러움에 셀린느의 가슴도 덩달아 아려 왔다.

‘그냥, 확인만 해 보는 거야.’

셀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시선이 레온하르트의 시선과 정확히 맞닿았다.

그 순간, 둘의 머릿속엔 서로 말고는 아무 생각도 존재하지 않았다.

셀린느에게는 레온하르트가, 레온하르트에게는 셀린느가 이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셀린느의 핏기 없는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그 자그마한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레온하르…….”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완전한 이름조차 듣지 못했다.

품에 안고 있던 셀린느의 몸이 폭발했고, 붉은 피가 레온하르트를 뒤덮었으니까.

동시에, 어슴푸레한 달빛을 받은 거대한 늪이 레온하르트의 눈앞에 펼쳐졌다.

“셀린느……!”

짐승의 울음소리가 늪 전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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