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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78화 (78/120)

78화.

‘이상한데.’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썩어 문드러진 꽃들이 푹 꺼졌다.

마법사들 성격에, 자신들이 그렇게 숨겨 두는 연구소 주위가 이렇게 되도록 방치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꽃들은 방금 일어난 사고 때문에 순식간에 시들었다고 보는 게 맞았다.

레온하르트는 허리를 굽혀 시든 꽃잎을 한 움큼 떼어 냈다.

짙은 마력의 잔재가 느껴졌다.

‘역시.’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옛날, 마티아스에게서 살아 있는 마력석에 대해 들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흔했다고는 안 했는데.’

도리어 마티아스는 몇 송이 안 되는 살아 있는 마력석들을 고이고이 키우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지금은 대답해 줄 마법사 한 명 없었기에, 레온하르트는 사소한 의문은 머리 한편으로 치워 버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초라한 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집을 향해 달려갔다.

정작 집에 다가가니 마력이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곳이 확실했다.

레온하르트는 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쾅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나오겠단 말이지.’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꺼내 들고 칼끝으로 문을 더듬었다. 복잡한 결계가 느껴졌다.

-철컥

오래 지나지 않아 결계가 깨어지고, 거대한 성채가 레온하르트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레온하르트는 발로 문을 쾅 찼다.

“……대공자. 이러는 건 예의가 아닌 걸로 안다만.”

문이 빼꼼히 열리며 한 노인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르시아 루테. 저 안쪽의 겁쟁이들이 당신을 희생양 삼아 내보냈나?”

“아니.”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와 대적할 생각은 없어. 자, 들어오게.”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연구소 안으로 들어섰다.

1층 로비에 마법사 수십 명이 서서 레온하르트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레온하르트는 다른 마법사들에겐 눈길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바닥만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지하군.”

“바로 눈치채다니.”

가르시아 루테는 감탄하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투였다.

“내려가는 길이 어디지?”

“…….”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가르시아 루테를 타오르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한 번만 더 묻겠다. 내려가는 길이 어디지?”

“……없다.”

“뭐라고?”

가르시아 루테는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폐쇄했다. 이제 이 밑으론 그 누구도 내려가지 못해.”

***

셀린느에게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금기어였다. 여태껏 그녀에게 죽는 것보다 끔찍한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셀린느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죽는 게 차라리 낫겠어.’

셀린느는 이를 악물며 링조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자신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더 강하게, 더 세게, 더 빠르게…….

몸에 있는 모든 마력을 링조르를 매개로 하여 이 끔찍한 어둠을 향해 쏟아부었다.

하지만 셀린느의 노력은 여름날 뜨거운 모래사장 위에 부은 물 한 잔과 비슷했다.

돌아온 건, 더욱 강력히 그녀의 목을 조여 오는 어둠뿐이었으니까.

결국 셀린느는 겨우 자신 하나 숨길 수 있는 보호막을 생성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셀린느는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언젠가는 링조르를 쥔 자신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말 것이다.

‘그럼 나도, 삼켜지겠지.’

그렇게 된다면 정말로 외부에서 구하러 오는 것 말고는 기댈 게 없을 것이다.

‘레온하르트가, 와 줄까.’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스러운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레온하르트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차라리 위층에 있을 마법사들이 구해 주는 걸 기대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텔에서, 벽면에 기대선 채 자신을 바라보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아, 이동 마법……!’

왜 이제야 이 생각이 떠올랐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셀린느는 품에서 로즈가 쥐여 주었던 마력석을 재빨리 꺼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셀린느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잠시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머리를 식히며 생각해 보니 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자신이 지금 쓸 수 있는 건, 오직 링조르를 매개로 한 살상 마법뿐이었으니까.

지금 자신을 감싼 보호막 역시 살상 마법의 응용에 불과했다.

셀린느는 보호막 넘어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어둠과 맞먹을 정도의 절망감을 느끼며 고개를 떨구었다.

***

“대체 무슨 소리지?”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이 밑에도 당연히 그대들의 동료가 있지 않나!”

“대공자, 제국 전체가 파멸했으면 좋겠나?”

“……수습이 안 되니, 산 채로 파묻겠다는 거군.”

레온하르트는 비꼬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구해 보려는 시도는 했나?”

“…….”

침묵만이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그들을 추궁하지 않았다. 입씨름하며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 헌트. 이곳에 왔지? 지금은 어디에 있나? 혹시 돌아갔나?”

“…….”

마찬가지로 침묵만이 돌아왔다.

레온하르트는 서로 시선을 피하는 마법사들을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았다.

“모르나 보군. 그럼, 로즈 루테는 어디에 있지? 그대들의 동료니 당연히 알겠지.”

“…….”

“당장 말하라. 명령이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빼 들었다.

이 마법사들이 수가 많다곤 하나 그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가르시아 루테의 가슴팍을 향해 라쉬르를 겨누었다.

“말해라.”

가르시아 루테는 쓰디쓴 한숨을 내뱉었다.

“로즈 루테는 지하로 갔네. 셀린느 루테와 함께.”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부터 예상했기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일말의 희망이 사그라든 자리엔 절망과 분노만이 남았다.

라쉬르를 쥔 레온하르트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 내듯 뱉었다.

“지하로 가는 길로 안내해라.”

“폐쇄했다.”

가르시아 루테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더니, 몇 마디를 덧붙였다.

“저주 때문에 그러나? 이미 풀린 것으로 아는데.”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화끈 달아올랐다.

“죽고 싶지 않으면 안내해!”

“우릴 죽이려고?”

가르시아 루테의 입꼬리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자네에게 그만한 배짱이 있다니 놀랍군.”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라쉬르로 바닥을 그대로 내리찍었다.

바닥은 우렁찬 파열음을 내며 조각조각 갈라졌다. 틈새 사이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막아!”

가르시아 루테의 고함과 동시에 수십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레온하르트에게 달려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시간이 없는데……!’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마력석들을 완전히 시들어 버리게 할 정도면 보통 사고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이곳에서 허비하는 매분 매초 동안 셀린느가 고통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라쉬르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그렇다고 이 마법사들을 마물처럼 베어 버릴 수도 없다는 점이 레온하르트의 속을 더욱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레온하르트가 이를 악문 바로 그 순간.

물, 불, 빛, 흙…… 각종 속성의 마법들이 레온하르트를 뒤덮었다.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눈에 레온하르트가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전심전력을 다해 마법을 퍼부었다.

레온하르트를 실수로라도 죽여선 안 되는 생각에 멈칫거리거나 마법의 강도를 낮추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 모두, 레온하르트에겐 전력을 당하지 않으면 당하는 것은 그들이 되리라는 걸 직감한 것이다.

수 분 후.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단 하나, 셀린느의 안위를 제외하고.

그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마법들을 기계적으로 파훼하며 마법사들을 향해 달라붙었다.

“히익……!”

몇 명이 경악에 겨운 비명을 내질렀다.

레온하르트는 특히나 화력이 강한 마법사 몇을 추려 내고 정신을 집중했다.

곧바로 강한 바람이 그들을 뒤로 날려 버렸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레온하르트는 숨을 헐떡이며 아직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었다.

모두 레온하르트 못지않게 기진맥진하거나 조금 전의 바람으로 인해 팔다리 한두 개가 부러진 행색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등을 돌려 갈라진 바닥 사이로 뛰어내렸다.

그의 등 뒤에 수십 개의 시선이 꽂혔다.

레온하르트는 계단을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갔다.

‘셀린느, 셀린느, 셀린느…….’

그는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셀린느가 죽었을 가능성을 애써 무시했다.

저 밑에 위험에 처한 셀린느가 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그것뿐이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지하 계단 거의 막바지에 도달했고,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

문은 분명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수십 개의 결계로 단단히 잠겨져 있었다.

싸늘한 깨달음이 레온하르트를 덮쳤다.

이건, 정말로 생매장이었다.

이 문 너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려는 시도 하지 않는 생매장.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들어 올렸다.

-챙!

-챙!

-챙!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의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었을 무렵 모든 결계가 깨어졌다.

그는 조금 전 결계를 막무가내로 부숴 대던 기세와 정반대로 두 손을 조심스레 문 위에 올렸다.

“……빌어먹을!”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이 문은, 오직 황실 소속 마법사만이 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안쪽에서든 바깥쪽에서든 마찬가지로.

화풀이로 깨문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만약 셀린느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몰살당했다면 그녀는 영원토록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공포로 달음박질하는 심장을 안고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위의 겁쟁이 마법사들은…… 결코 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레온하르트에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짧게 깎은 손톱이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을 파고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건 해 보아야 했다.

“……열어 주십시오. 제 목숨을 바쳐 저 문 뒤에 있는 것을 처치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위층에 모인 모든 마법사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대들도…… 저 뒤에 동료와 친구가 있지 않습니까.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열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재물을 위시한 그 어떤 이득도 제의하지 않았다.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이미 그들에게 충분한 재물과 지위를 갖추고 있었으니, 그가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동정심뿐이었다.

“대공자.”

가르시아 루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대가 목숨을 바치는 걸 원하지 않아. 그러니 더더욱 열어 줄 수가 없네.”

“……저 뒤에 있는 게, 대체 뭐길래……!”

“그대의 역사.”

레온하르트의 입이 벌어졌다.

가르시아 루테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 밑에 있는 건, 그대가 여태까지 황실로 보냈던 모든 우두머리 마물들의 핵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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