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레온하르트는 알현실을 빠져나온 다음에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 걸 거야.’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황제가 정확히 어떠한 착각을 하고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분명 지난 몇 달간, 황태자는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보여 주었다.
황제가 황태자를 어떻게든 바꾸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설령 자신을 이용해서일지라도.
‘이건…… 부모님께 보고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짚었다.
3년 전, 자신 혼자 어떻게 해결해 보려다 베르누이 일가가 황도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결말을 낳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는 셀린느의 저주를 푸는 것에 온전히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은 부모님의 힘을 빌리는 게 상책일 것이다.
‘셀린느에겐 미안하게 되었지만, 잠시 북부로 돌아가야 할지도…….’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레온하르트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그는 반사적으로 라쉬르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단순히 좋지 않은 예감에 불과했지만 그 원인은 분명 심상치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마력이, 제자리에서 부글거리며 터져 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마법사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질적인 규모와 성질의 마력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회랑을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기이한 성질의 마법…….
단 한 번 체험해 본 적이 있었다.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레온하르트가 처치한 우두머리 마물의 핵을 가지고 각종 수상쩍은 기구들을 만들어 내는 연구소에서였다.
‘뭔가 잘못된 거야.’
레온하르트는 직감했다.
어쩌면 멍청한 마법사 한 명이 핵을 가지고 장난치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넜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건 이 제국에서 오직 레온하르트 하나였다.
라쉬르를 빼 들며 달려가는 레온하르트에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당연히 그는 연구소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다.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황태자에게조차 연구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꽁꽁 숨겼기 때문이었다.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오직 그들과 함께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굳이 황실 소속 마법사를 찾아 연구소가 어디 있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느껴졌으니까.
라쉬르의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이한 마력의 흐름만이 그에게 필요한 나침반이자 이정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종일 파라디소 기사단과 함께 훈련한 데다, 황제에게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들은 탓에 이미 피곤함에 지친 레온하르트가 기진맥진하여 멈춰 섰다.
그가 멈춘 자리는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황무지 앞이었다.
‘…….’
레온하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기이한 마력의 기운은 분명 이곳에서 지금도 느껴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연구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휙!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허공에 대고 몇 번을 휘두르고 시작했다. 누가 보았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법한 모습이었다.
“아아악!”
허공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나를 들여보내 다오.”
“대, 대공자! 아무리 대공자라 해도 이곳엔 들어올 수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지금은 이들이 애지중지하는 연구소 전체가 폭발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지금 그대들이 가릴 처지인가?”
“……그래도 아니 됩니다.”
레온하르트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상대의 목소리가 두려움에 차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나를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연구소가 터져 나갈 텐데.”
“그, 그 사실은 어떻게……!”
“이곳이 연구소로 들어가는 출입구라는 사실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했다.
어차피 이자들에겐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경악에 질려 숨을 들이켰다.
“그러니 모습을 드러내고, 나를 들여보내도록.”
“…….”
아주 천천히,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한 마법사의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덜너덜한 옷과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 안의 상황을 능히 짐작하게 했다.
“공자님, 이것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여기서 본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셔야 합니다.”
“내가 말을 잘 퍼뜨리고 다닌다는 소문이라도 있나?”
“그런 게 아닙니다.”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안에서 본 건, 황제 폐하께라도 보고하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다.”
만약 레온하르트가 황제를 알현하기 전에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제법 오래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레온하르트는 제법 감정이 상해 있었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일일이 보고할 생각이 없었다.
“예?”
“그렇게 하지. 내 이름과 라쉬르에 걸고 맹세한다.”
마법사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라쉬르에 건 맹세는 반드시 지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레온하르트는 마법사에게로 성큼 다가섰다.
다음 순간,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그를 집어삼켰다.
‘이동 마법이군.’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단 한 번, 연구소에 가 보았을 때도 이동 마법을 썼었다. 당시엔 단지 별다른 이동 없이 한 번에 가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동 마법으로만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라니.
오직 황실 마법사의 초대를 받은 자들만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잠깐.’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프게 조여들었다.
황실 소속 마법사는 셀린느를 ‘플뤼아’라는 정체 모를 곳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이동 마법을 통해 그곳으로 바로 이동했다.
‘설마…….’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플뤼아는 사라진 고어로 꽃을 뜻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다 시들어 죽어 가는 광활한 꽃밭이었다.
“셀린느……!”
썩어 들어가는 꽃밭 사이로 레온하르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셀린느는 진동이 곧 잦아들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반대였다.
진동은 점점 거세져 사방의 기구들을 쓰러트렸고, 급기야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로즈가 셀린느의 팔을 잡아채 바닥을 반쯤 기기 시작했다.
“무, 무, 무슨 일이…….”
로즈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상태처럼 보였다.
셀린느만큼이나 그녀 역시 경악과 공포에 질려 전신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로즈가 입을 연 건 그들이 이미 다른 마법사들이 자리를 잡고 벽과 등을 맞대 다닥다닥 붙어 있는 동굴의 벽면에 도달했을 때였다.
“이 벽에…… 마력을 주입해요.”
“네? 이 동굴에요?”
“네. 빨리요!”
로즈의 목소리는 다급했으며 경각심이 느껴졌다.
셀린느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다 소스라쳤다.
‘살아 있어!’
벽면은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그녀의 마력에 반응하더니, 마력을 주입하는 족족 흡수했다.
순간 마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물 특유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뭐죠?”
셀린느는 도저히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한마디 뱉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르는 게 나아요.”
잠시 후.
동굴의 벽면이 한 차례 크게 우글거렸다.
“악……!”
셀린느는 외마디 비명을 내었지만 주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오히려 살았다며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마법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로즈는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환한 얼굴로 셀린느를 반쯤 얼싸안았다.
“이제 고비는 넘겼어요! 고생했어요, 셀린느.”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정말로 동굴 전체를 무너뜨릴 기세로 뒤흔들었던 진동은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제 말해 줘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그리고 이건 뭐죠?”
“……나중에 말해 줄게요. 지금은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위, 위험한 건 다 끝난 게 아니었어요?”
로즈는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당장 죽을 고비는 넘긴 것에 불과해요.”
셀린느는 단 몇 분 만에 로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손을 꽉 잡고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동굴을 가로질러 뛰어가던 로즈의 손이 힘을 잃고 스르르 빠져나간 게 시작이었다.
순식간에 동굴 전체에 가득하던 빛들이 사라지고, 숨 막힐 것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 마법사인데, 왜 빛이나 불을…….’
셀린느는 빛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하자마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건,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악……!”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셀린느가 정신을 집중하고 모은 마력은 곧바로 어둠에 강탈당했다.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빼앗듯이.
‘어둠 역시 살아 있어…….’
몸이 공포와 긴장으로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든, 패닉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것보다 더 위험한 상황도 겪어 봤잖아.’
흑마법사의 근거지나 화산이 지금 이것보다 덜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셀린느는 애써 그 당시엔 레온하르트가 항상 자신의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할 수 있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검집에 든 링조르를 꽉 쥐었다.
‘잠깐만.’
자신은 흑마법사에 의해 반동에 걸려 있을 때에도 링조르로 살상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만약 이 어둠이 흑마법사와 비슷한 원리로 마법사의 마력을 차단한다면 링조르로는 충분히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아주 천천히, 링조르를 검집에서 빼내었다.
“……!”
링조르는 셀린느의 손길이 닿자마자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로즈! 이것 봐요!”
셀린느는 입을 벌려 소리쳤지만 로즈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링조르의 불빛을 더욱더 키워 사방을 비추었다.
“로, 로즈……?”
입이 달달 떨려 낱말 하나 제대로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바닥에 쓰러져 아무런 미동도 없는 마법사들이 링조르의 파르스름한 불빛에 드러났다.
다리에 힘에 풀렸다.
‘아니야, 링조르의 불빛이 파래서 그래. 다들 죽은 게 아니야…….’
셀린느는 자신 바로 옆, 얼굴을 땅으로 향한 채 누워 있는 로즈를 흔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세게 흔들어도 로즈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셀린느는 로즈의 코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살아는 있어.’
안도감이 셀린느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주위 다른 마법사들 여럿 역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을 뿐, 죽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들 살아 있어.’
셀린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더는 몸이 떨리지 않았다. 자신은 이 사람들을 저 정체 모를 적에 대항해 구해 낼 것이다.
‘난 가능해.’
셀린느는 죽어도 죽지 않는, 불사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