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레온하르트는 지난 3년간 누구도 드나들지 않아 황폐해진 베르누이가의 별장 앞에 서서 얼굴을 찌푸렸다.
‘이 정도일 줄이야. 셀린느를 데리고 왔다면 큰일 날 뻔했군.’
키 작은 병사의 머리까지 자란 잡초들이 바람에 휘청였고, 가시가 우두두 돋아난 덩굴이 문을 뒤덮어 라쉬르로 끊어 내야 했다.
만약 셀린느가 이곳에 왔다면 또 다른 저주받은 저택인 줄 알고 기겁했을 것이다.
“여기야말로 유령이 나올 꼴인데…… 미안하게 되었군.”
“아닙니다! 잡초 좀 자란 거야 그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뭣하시면 저희가 뽑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너희들은 손님이야.”
“공자님……!”
레온하르트는 감동을 받은 나머지 눈물까지 흘릴 기세인 바트를 보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내부는 제발 멀쩡했으면 좋겠는데.’
다행히 저택의 내부는 베르누이가가 황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을 때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먼지로 가득한 점만 제외하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못한 곳에서 지내 왔던 기사단들에겐 궁전처럼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깔끔하게 손질된 실외 훈련장과 실내 훈련장을 확인하곤 만족감을 느꼈다.
“정확히 한 시간 주겠다. 짐을 풀고 이곳에 집합하도록. 훈련할 시간이다.”
“공자님, 직접 훈련시켜 주시는 겁니까?”
부단장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래. 피곤할 터이니 훈련을 원하지 않는 자들은 계속 쉬어도 좋다.”
바트와 부단장은 물론, 일반 평단원들까지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농땡이 피우는 놈들은 제가 반쯤 죽여서라도 끌고 오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럼, 잘 부탁하지.”
‘생각보다 잘 버티는데?’
레온하르트는 밖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감탄했다.
점심조차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닌, 전투 식량으로 대충 때운 파라디소 기사단들은 하나같이 혈기왕성하게 자신에게 덤벼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는 얌전하게 검집 안에 넣어 둔 채 연습용 검으로 그들을 상대하며 만족감을 느꼈다.
검술 실력이 가장 뛰어난 건 스무 살을 갓 넘긴 평단원 다니엘이었다.
하지만 파라디소 기사단은 바트의 지휘 아래 움직일 때 가장 무서워졌다.
레온하르트는 연습용 검 한 자루로 어중이떠중이 수십 명을 너끈히 상대할 수 있었지만, 바트의 지휘 아래 움직이는 이들은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었다.
“……항복.”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무딘 검이 떨어졌다.
파라디소 기사단은 환호성을 질렀다. 심지어 가문의 영광이라며 반쯤 쓰러지는 자까지 있었다.
“공, 공자님.”
하지만 그중 단 한 명, 어정쩡하게 웃으며 레온하르트의 눈치를 살피는 자가 있었다.
바트였다.
“괜찮으십니까?”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이런 것에 쓸데없는 감정을 둘 정도로 내가 나약하지는 않다. 솔직하게 기뻐하도록.”
“아니, 아까 심하게 한 대 맞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
레온하르트는 다니엘에게 심하게 가격당한 왼쪽 팔을 문질렀다.
“별것 아니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정말 감탄스럽군. 잘 키워 냈네, 바트 단장.”
“영, 영광입니다…….”
바트의 목소리가 결코 꾸며 낸 게 아닌 감동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다시 가 볼까?”
수 시간 후.
해가 어느덧 저물었을 땐 파라디소 기사단의 그 누구도 환호성을 지르거나 웃지 못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연습용 칼을 치켜들었고, 파라디소 기사단은 비척비척 일어나 그에게 덤벼들었다.
“공자님, 외람되지만…….”
“무슨 일이지?”
반쯤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 검을 휘두르던 레온하르트가 바트의 말에 움찔하며 눈을 깜박였다.
“저희 단원들이 너무 지쳤습니다. 이만 쉬게 해 주어야 부상자가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원들의 상태를 살폈다.
“……미안하게 되었군. 이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있을 줄은 몰랐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실력을 갖춘 기사단을 만난 건 처음이라서…… 내가 좀 흥분했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군.”
“공자님……!”
바트의 눈이 벌겋게 변했다.
대다수의 단원들 역시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지쳐 있는 와중에도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레온하르트에게 예를 표했다.
“그럼, 다들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예!”
레온하르트는 가장 먼저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는 남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보석을 발견했다.
그것도 결코 가져올 수가 없는 보석을.
‘일회성 카르파티아로 그칠 자들이 아니야.’
이들은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단으로 역사에 남을 정도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오늘 실력을 제대로 확인하기 전까진, 단지 황실 소속 기사단 중 그나마 생각이 있는 자들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이들은 개개인의 자질이 뛰어난 건 물론 출중한 지휘관까지 보유했다.
만약 자신의 성급한 행동 탓에 황실에 밉보이기라도 한다면…….
‘그렇다고 거기에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만약 이들이 돈이라도 많은 자들이었다면 알아서 황도에 숙소를 구하도록 내버려 두었겠지만, 사정을 뻔히 알면서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이럴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해가 진 이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황제를 알현하여 상황을 설명하면 된다.
이미 간략한 보고는 전령을 통해 해 두었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 이들을 대변하는 것과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셀린느가……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있어서 다행이군.’
반쯤은 어리둥절한 채로 황실 소속 마법사의 손을 잡고 이동하던 셀린느가 떠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마법사를 대체로 좋아하지 않았다.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더더욱 그랬고.
물론 원인을 굳이 따지고 들자면 그 자신에게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난 9년간의 파인 골의 깊이는 원인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만들어 주었다.
그런 그가 셀린느를 황실 소속 마법사들에게 보낸 이유는 단 하나였다.
흑마법사로부터 보호받는 동시에, 셀린느가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으니까.
지난 몇 달간,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법을 배웠다.
셀린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만 했다.
레온하르트는 황제를 알현하기 직전, 잠시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지금 자신은 임무의 성과를 보고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손바닥에서 축축한 식은땀이 느껴졌다.
‘잘할 수 있어.’
그는 천천히 알현실로 발을 들였다.
황제는 옥좌에 비스듬하게 앉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프레데릭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보고는 들었다. 직접 왔다는 건 전령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는 거겠지?”
“예.”
“말해 보아라.”
“폐하, 그것이…….”
레온하르트의 설명은 십여 분이 흐른 다음에야 끝났다.
황제가 중간중간 끼어들어 집요하게 세부 사항들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시지?’
레온하르트의 손바닥뿐만이 아니라 이마에도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자넨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군. 파라디소 기사단이.”
“예. 제가 만나 본 기사단 중 최고의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훈련에 충실하고 충분한 지원을 받는다면 최고의 기사단으로 성장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황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지는 걸 보니, 특출난 자들인 건 분명하군. 여태까지 그 어떤 기사단을 보아도 감흥 없다는 듯 내치지 않았나.”
“그것은…….”
황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만간 새 건물을 내려 줄 터이니, 그때까진 베르누이에 머물러도 좋다고 허락하네.”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황제의 축객령을 예상했지만,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팽팽한 긴장을 고스란히 느끼며 계속해서 무릎을 꿇고 황제의 발언만을 기다렸다.
“앞으로도 자네와 리카르도가 부딪칠 시, 나는 자네의 손을 들어 주겠다.”
“……?”
레온하르트는 얼빠진 얼굴로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폐하, 그게 무슨…….”
“레온하르트, 오늘 자네의 행동을 리카르도는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그리고 나는 그 착각을 굳이 막아 줄 생각이 없네.”
황제는 얼굴을 찡그렸다.
“일어서라,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들이 그의 머리에 세차게 주먹질하는 듯했다.
“지금 확실히 말하지. 나는 리카르도가 내 뒤를 잇기를 바라지 않아.”
“폐하!”
레온하르트는 기가 막혀 소리쳤다.
황태자 밑으론 그와 제법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감히 옥좌를 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국은 황제의 자식 모두에게 충분한 권력과 부를 나눠 줄 수 있었고, 정당한 후계자인 맏이에게 대항하는 건 황금알을 낳는 오리의 배를 가르는 짓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자신의 후계자를 거부한다?
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손을 천천히 내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나도 현실을 알지. 내 뒤는 리카르도가 이을 것이야.”
뢍제의 차가운 눈빛이 레온하르트를 직시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 리카르도가 제대로 된 황제가 되려면 경쟁자가 필요하지. 자기 자리를 대체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한 경쟁자가…… 그게 자네야.”
그제야 레온하르트는 황제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달았다.
자신은, 리카르도 운소렘을 완벽한 황제로 만들기 위한 거름이었다.
“폐하, 그러면 저희 북부는……!”
레온하르트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황태자를 견제하며 자극해 완벽한 황제가 되도록 하는 것까지야 좋았다.
하지만 리카르도 황태자가 황제가 되고 난 후, 북부에 보복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하하하하하……!”
황제가 아주 깊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토해 냈다.
“아직 눈치 못 챘나? 내가 왜 자네를 선택했는지.”
레온하르트는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레온하르트, 리카르도는 자네를 해칠 수 없어. 자네가 사라지면 흑마법사는 누가 벤단 말인가?”
“…….”
황제는 슬며시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레온하르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이 여태껏 진정으로 섬긴 주군이 뱀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오래, 건강히 살도록. 리카르도는 자네가 필요가 없다 싶으면 북부 전체에 보복을 가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