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제일 가까운 곳은 여깁니다.”
부단장은 단원들의 침실이 자리한 복도 구석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
사람 한 명이 지나가려면 엉금엉금 기어들어 가야 할 정도로 작은 문이었다.
용감한 평단원 한 명이 나서 문고리를 있는 힘껏 잡아당겨 보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문은 수상쩍었지만 이 공간에선 유령은커녕 그 어떠한 이상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문이 많이 있는가?”
“일단, 저희가 아는 것만 일곱 개입니다.”
“이상하긴 하군.”
“그렇죠? 역시 유령이……!”
“그런 뜻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손을 들며 단원들 사이에 일어나는 소란을 제지했다.
“지하 미로 위에 지어진 기사단 건물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다. 하지만 이 문들이 그 미로와 관련이 있다기엔…… 뭔가 이상하군.”
“미로 자체를 영영 묻어 버리기엔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럼 문이 왜 일곱 개나 있지? 한두 개로도 충분할 텐데.”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주저앉아 직접 손으로 문을 잡아당겨 보았다. 팽팽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역시 이상해.’
이 마법은 레온하르트가 잘 아는 일반적인 마법사들의 마법과 달랐다.
그렇다고 흑마법의 사악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뭐지?’
레온하르트는 나머지 문도 전부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것도 보아야겠군. 안내해라.”
레온하르트가 실마리를 잡은 건 마지막, 일곱 번째 문에 도달했을 때였다.
마지막 문은 부엌 바닥에 자리했다.
문고리를 부드럽게 잡아당기자, 문 뒤에서 소용돌이치는 유령들의 기운이 느껴졌다.
“여기 다 몰려 있었군.”
“예……?”
바트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 뒤가 다 유령이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경직될 수가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바트 단장, 그대 부하들 얘기가 맞아. 이 건물은 쓸 수가 없겠군.”
“공, 공자님께서 어떻게든……!”
“내가 유령을 처치해 본 건 단 두 번이야. 그것도 각각 하나씩이었지. 이 뒤에선…… 적어도 십수 명은 되는 유령이 느껴지는군.”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인 경우는 레온하르트에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마지막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숭배하는 기사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바트를 포함한 파라디소 기사단 전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럼 어찌해야…….”
“이건 폐하께 내가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다.”
“감, 감사합니다!”
바트는 반쯤 무릎을 꿇을 기세로 감사 인사를 했다.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상황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이 원래 쓰던 숙소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정도 규모의 기사단, 그것도 카르파티아가 들어갈 만한 건물은 이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를 쓰게 할 수도 없지.’
이런 건물에 조금만 더 머물렀다간 사달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다들 황도에 머물 곳은 있나?”
“예? 저희가 예전에 쓰던 건물로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 계속 머무를 순 없지 않나. 앞으로 상당한 시간을 보낼 숙소가 있냐는 뜻이었다.”
“…….”
거의 모든 단원들이, 심지어 단장 바트마저도 불안한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없는 모양이군.”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대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 가문의 별장에서 지내는 건 어떠한가 싶은데.”
“예……?”
바트의 입이 멍하니 벌려지며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레온하르트는 그의 심정을 얼추 짐작은 했기에 천천히 설명했다.
“황도에 있는 우리 가문의 별장은 그대들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커. 사용인 한 명 없지만 그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겠지.”
“예……!”
드디어 상황을 파악한 바트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렸다. 다른 단원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충격으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자들도 있었고,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은 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어라 중얼대는 자도 보였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레온하르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
레온하르트는 주어진 기회를 차 버리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짐을 꾸려라. 이곳에 더 오래 머물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
***
훈련은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로즈도, 셀린느도 그만두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중간중간 느껴지는 극심한 허기는 로즈가 로브에서 꺼낸 비상식량들을 허겁지겁 삼키며 달랬다.
“셀린느, 그건 뭐죠?”
“네?”
갑자기, 로즈가 셀린느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정확히 링조르가 자리한 곳이었다.
‘뭐, 큰 비밀도 아니니까.’
어차피 파라디소 기사단과 함께 싸울 때도 링조르를 수도 없이 썼었다.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링조르를 빼내어 로즈에게 보여 주었다.
로즈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이건…… 링조르군요. 폐하께서 직접 하사하셨을 리는 없을 테고. 대공자의 선물이던가요?”
“네.”
셀린느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로즈는 링조르를 한참 동안 꼼꼼히 살폈다.
그녀가 눈길을 링조르에서 떼었을 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뒤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걸 검집 없이 들고 다녔죠?”
셀린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레온하르트는 링조르를 남부에 가기 직전 하사받아 그녀에게 주었다.
“어…… 한 달은 안 되었을 거예요.”
“왜 바로 검집을 만들지 않았나요?”
로즈의 목소리엔 노기마저 엿보였다.
“검집이 딱히 필요 없는 것 같아서요. 재료로 쓸 마력석까지 받긴 했었는데…….”
“뭐라고요?”
셀린느는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모르는 로즈에게 남부의 질 좋은 마력석을 받았다는 것과, 여태까지 검집을 만들 짬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로즈는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다.
“대공자께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던가요?”
“레온하르트는 검집에 대해선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요.”
로즈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제가 보기엔, 이것의 검집은 당장 만들어야 해요. 마침 플뤼아 옆이라 다행이군요.”
“만약 안 만들면 무슨 문제가 생기나요?”
“……링조르가 당신인지, 당신이 링조르인지 알 수가 없는 순간이 잦아질걸요.”
로즈는 으스스한 투로 덧붙였다.
“그러면 어느 순간 링조르만 남겠죠.”
셀린느와 로즈는 플뤼아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계단을 올라가는 게 아닌, 내려갈 차례였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 근처에도 창문이 트여 있었는데, 유리창 밖으로 반짝이는 광물들이 잔뜩 박혀 있었다.
“다 마력석이에요.”
“그럼 여긴, 광산인가요?”
“아뇨.”
로즈는 살짝 웃었다.
“처음 본 사람들은 다 그 생각을 하죠. 하지만 아니랍니다. 저것들은 우리 연구의 부산물이에요.”
“어떤 연구길래…….”
“링조르의 검집을 당장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연구죠.”
셀린느는 감이 잡히지 않아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레온하르트가 우두머리 마물의 핵과 흑마법사의 잔재는 연구를 위해 황실로 보낸다고 말한 것을 기억해 냈다.
‘바로 그 연구겠지.’
그렇다면 부산물이 마력석인 것도 이해가 갔다.
재료 자체가 우두머리 마물의 핵이니, 거대한 마력석을 발생시킨다 해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내려간 그들은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로즈는 두 손을 문 위에 얹었다.
척 보기에도 육중한 문은 그에 걸맞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
청회색 눈이 크게 떠졌다.
지난 몇 달간 셀린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들을 많이 봐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공간은 셀린느가 여태껏 본 그 무엇보다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거대한 동굴처럼 높고 서늘한 공간엔 각종 환상적인 기구들로 가득했다.
셀린느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기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형색색의 빛을 내는 수십 가지의 램프들이 어떠한 동력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 사방으로 빛을 쏘고 있었다.
‘동력이 없는 게 아니야.’
문득 셀린느는 깨달았다. 바닥에, 눈에 익은 물체가 붙박여 있었다. 마물의 핵이었다.
“마물의 핵을 연구한다는 게…… 핵 자체를 연구하는 게 아니라 사용법을 연구하는 거였군요.”
“핵 자체를 연구하는 팀도 있긴 있어요. 별 성과가 없어서 그렇지.”
로즈는 셀린느의 떨떠름한 반응을 반쯤 무시한 채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빨리 와요. 그 빌어먹을 물건의 검집을 만들지 않으면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으니까.”
로즈를 따라가는 동안 셀린느의 눈이 사방으로 어지러이 굴러다녔다.
‘꼭…… 진짜 실험실 보는 것 같네.’
흰색 가운 대신 긴 로브를 뒤집어썼다는 것만 제외하면 뉴스에서 보던 어느 연구소의 실험실과 흡사한 모양새였다.
동력이 전기가 아닌 우두머리 마물의 핵이라는 것도 제외하면.
거의 다 레온하르트가 고생고생하며 뽑아낸 핵들이라는 생각에 셀린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로즈는 허리가 잔뜩 구부러진 마법사의 앞에 멈춰 섰다. 그들의 인기척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한 마법사는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펄. 재미있는 일거리가 있어요.”
“……재미없으면, 쫓아낼 테다.”
잔뜩 쉰 목소리가 펄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링조르의 검집을 만드는 일이에요.”
“뭐라고?”
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셀린느는 두건에 가려진 와중에도 희번덕거리며 빛나는 눈에 놀랐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장난치지 마라.”
“셀린느, 보여 줘요.”
셀린느는 품에서 조심스럽게 링조르를 꺼내 들었다. 펄의 시선이 링조르의 칼날을 핥듯이 훑었다.
“……재료는.”
“여기 있어요.”
셀린느는 샤프 백작에게서 받은 마력석들을 한 손 가득 펼쳐 보였다.
펄은 곧바로 마력석들을 낚아챘다.
“펄, 얼마나 걸려요?”
“기다려.”
“얼마 안 걸린대요.”
셀린느는 얼떨떨한 와중에도 로즈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펄의 작업을 지켜보았다.
펄은 마법사라기보단 대장장이처럼 일했다.
셀린느의 손에서 펄에게로 건너간 마력석들은 거대한 용광로에 들어가 한참을 달궈지더니, 투박하게 내리치는 망치에 서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펄은 마력석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하게 빛나는 검은 검집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펄이 만들어 준 검집은 눈에 익은 모양새였다.
‘라쉬르의 검집이랑 비슷해…….’
셀린느는 조심스레 링조르를 새 검집에 집어넣은 다음, 허리춤에 차 보았다.
“……!”
“왜 검집이 필요하다고 했는지 알겠죠?”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검집이 주는 안정감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셀린느는 펄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 순간.
사방에서 경악에 질린 비명이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이 있는 지하층 전체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극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