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녀는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럼, 더 강해지기는 힘든 건가요?”
셀린느의 목소리에선 명백한 실망감이 느껴졌다.
“아뇨.”
로즈는 사르르 녹아내리며 점점 가라앉는 얼음 성에서 꽃밭 위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이제 말해 줘요. 본인에게 뭐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지. 우리가 해 줬으면 하는 게 뭔지.”
“글쎄요. 너무 부족한 게 많아서…….”
셀린느는 말꼬리를 흐렸다.
“천천히 생각해 봐요. 가장 고치고 싶은 게 뭔지.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본인이 제일 잘 알거든요.”
로즈의 말이 맞았다.
셀린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었다.
“제 마법은…… 덜컹대는 마차 같아요. 섬세함과 정확성이 부족하죠. 최근엔 좀 나아졌긴 한데, 그래도 더 나은 마법을 쓰고 싶어요.”
“셀린느, 최종 목표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냥 강한 마법사, 이런 것 말고. 지금 셀린느에겐 확고한 눈앞의 목표가 있는 것 같거든요.”
셀린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이 될 수준의 마법사죠.”
갑자기, 로즈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보기보다 야심 찬데요?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되겠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하다니!”
“…….”
셀린느는 반박하려 했지만 이내 로즈의 말이 맞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레온하르트는 이 게임 속에서 가장 강한 자였다.
“어쨌든 목표가 뭔지 알았으니 훨씬 낫군요.”
로즈는 미소 지었다.
“가능한가요?”
“그럼요.”
로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제 말에 따라 주기만 한다면.”
“무슨 말이든 들을게요.”
셀린느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럼, 셀린느가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약점은 잊어버려요. 완전히.”
“……?”
셀린느의 눈이 커지더니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셀린느는 본인 마법의 약점이 섬세하지 않고 정확도가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하죠?”
“네. 레온하르트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죠.”
“네?”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로즈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설명했다.
“우린 셀린느 같은 경우를 고래라고 불러요. 덩치가 크니 당연히 둔하지만, 그만큼 힘이 엄청나거든요.”
“하지만…….”
“물론 섬세한 마법을 아예 쓰지를 못한다거나 정확도가 지나치게 떨어지면 문제가 되겠죠. 하지만 아까 그런 건 보이지 않던데요?”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로즈는 자신의 문제점을 고쳐 주기는커녕, 오히려 칭찬만 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이동 마법을 썼을 때…….”
셀린느는 천천히 기사단 전체를 이동시켰을 때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로즈는 전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아, 그 얘기는 들었죠. 그때는 대공자가 데리고 다니는 수준의 마법사가 대체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로즈는 셀린느의 가슴팍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앞으로 그런 마법은 쓰지 말아요.”
“네?”
“당신에게 어울리는 마법이 아니니까.”
“…….”
셀린느는 황당하다 못해 분노가 솟아날 지경이었다.
“아, 화났어요? 미안해요. 시간이 없다 보니…… 제대로 설명을 못 했네요.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한담…… 아!”
로즈는 손뼉을 탁, 치며 말을 이었다.
“그 대공자조차 전지전능한 건 아니잖아요?”
“그야, 레온하르트는 마검사니까요.”
“그렇죠. 마검사.”
로즈는 생긋 웃었다.
“셀린느는 그럼 마전사라고 생각해요.”
“뭐라고요?”
“우리끼리 쓰는 말이에요.”
로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셀린느는 이동 마법 같은 자질구레한 마법에 신경을 쏟아야 할 타입은 아니라는 거죠.”
“공격 마법에 집중하라는 거군요.”
“그렇죠.”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셀린느가 심혈을 기울여 이동 마법을 완벽하게 익히거나 흙 속성을 익혀서 순식간에 집을 지어 올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게 대공자에게 뭔 도움이 되나요?”
“…….”
“게다가, 대공자를 떼 놓고 생각하더라도 재능 낭비라는 결론만 나오네요.”
“알았어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듣자 하니 자신은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래, 레온하르트를 도우려면 더욱 강한 공격 마법을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맞아.’
로즈는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을 보니 이제 시작해도 되겠네요.”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뭐든지 하세요.”
“로즈는 어떤 타입인가요?”
로즈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당연히 마전사죠. 당신과 비슷한 고민을 수년 전 했었답니다.”
수 시간 후.
“허어억…….”
셀린느는 숨을 힘겹게 토해 내며 꽃밭에 주저앉았다. 칼 루테와 달리, 로즈는 조금도 셀린느를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셀린느가 지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정색하곤 했다.
“일어나요. 시간이 없는 건 셀린느 아닌가요?”
“허억…… 잠깐만요…….”
셀린느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더 이상 쉬지 않고 훈련하다간 심장이 터져 나가 죽어 버릴 것만 같았다.
저주에 대해 알고 있는 레온하르트나 호위 시녀들 앞이라면 모를까, 로즈 앞에서 죽는 불상사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수정구, 간직할걸!’
하지만 이미 깨 버린 수정구를 어찌하랴.
셀린느는 로즈의 손을 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적어도 마력 고갈로 죽는 일은 없겠지.’
어쨌든 이곳은 살아 있는 마력석 역할을 하는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마력이 충분할 경우, 얼마만큼의 화력을 발산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볼 좋은 기회였다.
……문제는 로즈가 셀린느를 마력 고갈이 아닌 단순한 피로로 죽을 정도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많이 힘들어요?”
“네. 죽을 것 같아요.”
셀린느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로즈는 물끄러미 셀린느를 바라보더니, 손을 턱 놓아 주었다.
“좀 쉬어요.”
“저, 제가 얼마나 여기서 훈련할 수 있죠?”
로즈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당신이 원할 때까지?”
“그럼 몇 날 며칠이고 훈련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오.”
로즈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당연히 당신이 일찍 돌아가고 싶어 할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라면야…… 좀 천천히 해도 되겠네요.”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달려가다간 정말로 죽고 말 것이다.
“대공자껜 대신 연락할까요?”
“직, 직접 연락할게요. 전에 제게 보내 주신 것처럼 연락하는 방법도 가르쳐 주세요.”
로즈는 풉 하고 웃었다.
“그렇게 나올 것 같았어요. 좋아요, 어렵진 않으니까.”
***
[열심히 훈련하고 있어요. 때가 되면 돌아갈게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답장을 써 줘요.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눈앞에서 빛나는 금빛 글씨를 보며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 셀린느는 황실 소속 마법사들과 잘 지내는 듯했다.
‘진작 연을 닿게 해 줄 걸 그랬군.’
하지만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기다리다 못해 자진해서 셀린느에게 접촉했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열다섯 이후로 황실 소속 마법사들과 거의 접촉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행태는 잘 알았다.
‘절대 손해 보려고는 하지 않지.’
하지만 같은 마법사에게 해코지를 하는 자들과도 거리가 멀었다.
셀린느는 충분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올 것이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군.’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호텔의 마구간으로 향했다.
블랙이 그의 손에 코를 파묻고 히잉 울었다. 레온하르트는 애마의 등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빈방에서 라쉬르를 휘두르는 것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겐 충성을 보장받은 카드가 있었다.
파라디소 기사단이라는.
“이 얼간이들아,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장 바트는 목이 터지라 고함을 질렀다.
단원들은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꾸물거리며 자신들의 짐을 날랐다.
파라디소 기사단은 접경지대의 마물들을 처치한 공으로 본디 숙소보다 배는 넓고 큰 숙소를 황제에게서 직접 하사받았다.
바트는 새로운 숙소에 매우 만족했다.
사용인을 직접 데려와야 했던 전 숙소와는 달리, 서른 명이 넘는 사용인이 숙소에 딸려 있기까지 했으니까.
문제는 단원들이었다.
기존 숙소에 정이 들었니 어쩌니 하는 개소리를 씨부렁대며 좀처럼 짐을 옮기려 들지 않은 것이었다.
바트는 마물 때문에 다 부수어져 엉망진창이 된 훈련장을 어떻게 쓰냐는 지극히 타당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엉망이 된 훈련장이야말로 실전에 가장 적합하지 않냐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돌아올 뿐이었다.
바트는 부단장을 달달 볶은 다음에야 단원들이 새로운 숙소를 거부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단 말입니다!”
“유령은 무슨 유령!”
바트는 어이가 없어 고함을 질렀다.
“단장님이 그렇게 나올 걸 아니까 다들 얘기를 못 한 거죠.”
“…….”
“저도 그걸 믿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단원들이 꺼림칙하다는데 어쩌겠습니까.”
바트는 이를 악물었다. 부단장은 얄미운 얼굴로 반박할 수 없는 소리를 해 댔다.
그렇다고 새로운 숙소를 청하는 건 불가능했다.
황제가 직접 하사한 숙소를 미신 때문에 물린다면 그 후폭풍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러니 본래 숙소를 계속 쓰자고…… 말이야 쉽지.’
바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돔 모양 훈련장은 완전히 일그러져 본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트가 여전히 속으로 구시렁거릴 때였다.
보초를 세워 둔 신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단장님!”
“무슨 일이지?”
“공자님께서……!”
그보다 더 많이 들을 필요도 없었다.
바트는 빠른 걸음으로 입구를 향했다. 짐을 옮기던 단원들도 우르르 그의 뒤를 따랐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문간에 서 있었다.
“새 숙소, 좋아 보이는군.”
바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좋다는데, 누가 감히 반박하겠는가?
하지만 바트의 부하들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겉으론 좋아 보이지만…….”
“닥쳐.”
바트가 빠르게 반응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무슨 뜻이지?”
레온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나?”
“없습니다.”
바트는 즉각 대답했지만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걸 직감한 단원들에게선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공자님, 좀 살려 주십시오. 여긴 유령이 나온답니다!”
“유령?”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헛소문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간 근거 있는 헛소문을 많이 봐 왔다.”
“이건 근거도 없습니다.”
“자네의 의견은 존중한다만…… 단원들이 이렇게 불안해서야 제대로 된 생활이 되겠나. 누가 그 소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손을 든 사람은 놀랍게도, 부단장이었다.
바트는 곧바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부단장은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설명했다.
“여긴 오래전 포로들을 가둬 굶겨 죽인 지하 미로 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 탓인지 수상쩍은 출입구들이 보입니다. 근처에서 유령을 목격한 자들도 적지 않고요.”
“그래?”
레온하르트는 성큼 걸어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대공자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바트는 그럴 줄 알았다며 부단장을 다시금 노려보았다.
하지만 바트는 레온하르트의 곧 이은 말에 턱이 떨어질 기세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출입구들로 안내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