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셀린느는 노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흰 로브에 노인의 짧은 백발이 비쳐 번쩍였다. 핏기없는 얼굴에 박힌 새카만 눈동자는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한쪽 뺨을 전부 덮은 일그러진 흉터가 노인의 과거는 학자가 아닌, 전사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레온하르트 이전, 과거의 모든 마법사들이 그러했듯이.
노인의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경계하는군.”
“…….”
당연히 셀린느는 이 노인을 경계했다.
아니, 이 공간 전체를 경계했다.
이 사람들은 모두 황실 소속 마법사일 터.
레온하르트는 그 사실 하나로 사람을 믿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셀린느는 달랐다.
사실 레온하르트조차도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그 자신을 떠보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할 거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들의 목적이 뭐든, 내게 순전히 호의를 베풀려고만은 하지 않을 거야.’
노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셀린느 헌트. 대공자가 자신의 저주를 풀기 위해 북부로 데려간 여인. 그러다 마법사로 발현하여 자연스럽게 함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지.”
“……!”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로즈는 물론 이곳에 자리한 모든 마법사들이 전혀 놀라워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어떻게 알았죠?”
“그렇게 노려볼 것 없다. 큰 비밀도 아니지 않나.”
셀린느는 반박할 수 없었다.
아가티르수스 전까진, 레온하르트와 자신의 사이에 대한 억측이 떠돌아다녔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의문을 가지고 북부에서 정보를 캐내다 보면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왜 데려왔는지 아는 건 쉬웠을 것이다.
‘이 노인은 레온하르트의 저주라고 했어.’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이들은 저주의 당사자가 그녀라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당연히 대공자에 대해서 잘 모를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우리가 왜 이러는지도 모를 테고.”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노인에겐 자신에게 할 말이 있었고, 무어라 반박해 보았자 방해 이상은 될 수 없었다.
“대공자가 나타나기 전엔…… 누가 흑마법사와 맞서 싸웠는지 알고 있나?”
“마법사들이겠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흑마법사와 대항한 대부분은 죽거나 죽기보다 더욱 못한 삶을 살았지. 물론 나처럼 운이 좋게 살아남은 사람도 있다만.”
노인은 자신의 주름진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흉측한 흉터가 양손 전체에 주름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이것과 함께, 마법은 거의 쓸 수가 없게 되었지. 흑마법사를 쓰러트렸다는 공으로 자리는 유지했지만, 나는 이름만 마법사에 불과해.”
셀린느는 노인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노인은 흑마법사를 죽이고 살아남기까지 했지만, 죽은 흑마법사가 건 반동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길어졌군. 대공자가 나타난 이후…… 우리 모두는 그런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레온하르트가 죽으면, 다시 당신들은…….”
“그래, 예전처럼 흑마법사와 싸워야 하겠지. 이 정도면 충분한 대답이 되었나?”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인의 말은 타당했다.
만약 그들이 단지 레온하르트가 제국을 위해 몸 바쳐 싸우니까 그녀를 돕겠다고 했다면 셀린느는 한참을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들이 흑마법사와 싸우지 않기 위해 레온하르트를 돕겠다고 말했다.
‘이건 믿을 수 있어.’
결정을 내린 셀린느는 입을 열었다.
“네.”
“다행이군.”
노인은 자신이 할 말을 끝냈다는 듯 인사도 없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로즈가 불쑥 다가왔다.
“이제 좀 믿는 눈치군요. 정말 답답했는데.”
“안 믿을 수가 없던걸요.”
로즈는 피식 웃더니 셀린느의 등을 반쯤 떠밀며 한참 동안 주위 사람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셀린느는 소개받은 황실 마법사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외웠으리라고 확신했다.
“아까 그분은 누구시죠?”
“아, 가르시아 루테 말씀이시군요. 저와 함께 당신을 도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 분이죠.”
“……반대 의견도 꽤 있었나 보네요.”
“당연하죠.”
로즈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니 가능한 많은 도움을 받고 가요. 그래야 보람이 있으니까.”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은 더욱 강해져야 했다.
진엔딩 루트의 마지막 스테이지는 일반 루트의 마지막 스테이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로즈와 함께 이곳으로 이동하며 느낀 이동 마법에서도 실력 차를 느끼지 않았던가.
이건 좋은 기회였고, 셀린느는 기회를 놓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셀린느는 로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전 실력을 키우고 싶어요.”
“칼 루테에게서 배웠죠?”
“네.”
“칼 루테는 좋은 마법사지만…… 체계적으로 배우기는 힘들었을 것 같군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정확히 짚었다.
칼 루테는 셀린느를 성심성의껏 가르치는 와중에도 임무를 위해 불쑥 떠나 버렸다.
게다가 셀린느가 어느 정도 성장한 이후에는 양쪽 너무 바빠 더 이상의 교육을 지속할 수 없었다.
로즈는 셀린느를 홀 밖으로 이끌었다.
“어디로 가는 거죠?”
“훈련장으로요.”
로즈는 건물의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되레 밖으로 나섰다.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꽃밭이…… 훈련장이었어.’
셀린느는 그제야 꽃밭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을 감지했다.
로즈는 성 밖으로 한참을 걸은 다음에야 멈춰 섰다.
셀린느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꽃밖에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로즈가 제 스승이 될 예정이었군요.”
“그럼요.”
로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에밀 루테, 혹은 칼 루테에게서 백지상태부터 배워 나가던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셀린느는 이제 자신의 장단점을 알았고 더욱더 강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제가 셀린느의 실력을 알아야 하니까…… 한번 아무 마법이나 써 보겠어요? 제일 자신 있는 것으로.”
셀린느는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했다.
사실, 그녀가 쓸 수 있는 마법 중 가장 위력이 큰 건 불 속성의 공격 마법이었다.
하지만 셀린느가 가장 좋아하고, 그만큼 열성적으로 연구했던 마법은 얼음으로 다양한 구조물들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었다.
마력이 그녀의 주위에서 꿈틀거렸다.
셀린느 본연의 마력도, 아직도 손목에 감긴 채 얌전히 골골거리는 루의 마력도 아닌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마력이었다.
‘꽃이야.’
셀린느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꽃들 한 송이 한 송이에서, 마력석만큼 순수하고 정제된 마력이 느껴졌다.
아니, 마력석과 비슷하지만 더욱 깨끗하고 밝은 느낌의 마력이었다.
셀린느는 싱긋이 웃었다.
이만큼이나 많은 마력을 한꺼번에 사용할 기회가 온다는 건 마법사로서의 축복이었다.
셀린느는 눈을 떴다.
크기 하나는 웬만한 성만 한 얼음덩어리가 꽃밭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나쁘지 않군요.”
로즈가 조금 감명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얼음을 만들어 내고 허공에 띄우려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하죠.”
셀린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
얼음에 금 하나 가지 않았는데도 소용돌이치는 마력을 느낀 로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십여 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마력만 소용돌이칠 뿐,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황당하기까지 하다는 얼굴로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로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된 거라면 말해요. 도와줄 테니까.”
바로 그때.
파지직, 하는 파열음과 함께 얼음이 저절로 깨어지기 시작했다.
로즈의 눈이 커졌다.
얼음은 단순한 얼음 조각들로 변하여 부서져 내리지 않았다.
단순히 거대한 바위 모양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얼음의 겉면이 부서지자, 정교한 성이 드러났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성.
‘성이라기보단…….’
로즈는 깨달았다.
성이라기보단 거대한 탑들을 얼기설기 엮어 놓은 것처럼 생긴 이 구조물은, 베르누이성이었다.
“베르누이성이군요.”
“실제보단 좀 작지만요.”
셀린느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고, 목소리엔 흥분이 넘쳐흘렀다.
거대한 마력을 쏟아부어 힘들어하는 마법사라기보단, 즐거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얼마나 유지할 수 있나요?”
셀린느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어…… 여기라면 오늘 하루 내내요.”
“왜 ‘이곳이라면’이죠?”
“이 꽃들이 마력석 역할을 해 주잖아요.”
로즈는 순간 놀라 일그러지는 얼굴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플뤼아를 지키는 꽃들에게서 마력을 감지하는 마법사는 많다.
하지만 꽃들은 마력석과 달리 살아 있는 생물이다. 그것들을 마력석처럼 활용하려면 상당한 훈련이 필요했다.
아니면 마력을 감지하고 뽑아내는 데 천부적인 자질이 있거나.
셀린느는 그들과 성 사이에 자그마한 교각을 하나 만들었다.
“안도 제법 신경 썼거든요. 한번 가 보실래요?”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건, 셀린느의 실력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었다.
“멋지네요.”
로즈는 얼음으로 이루어졌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장식품과 가구, 카펫, 구조물들을 살폈다.
“그렇죠?”
셀린느의 목소리는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최대한 닮게 만들어 보려고 애썼어요. 물론 제가 잘못 기억하는 것들도 있겠지만요.”
셀린느는 로즈가 눈치 못 채게 조심하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북부에 머물렀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또한 북부를 떠나온 지도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북부는 고향처럼 느껴지는 걸까.
자신이 만들어 낸 익숙한 구조물을 보는 셀린느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이만한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는 흔치 않아요. 흙 속성도 쓸 줄 아나요?”
“아뇨. 흙 속성은 아직…….”
“안타깝네요. 보통 이런 능력은 흙 속성에서 빛을 발휘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흙 속성까지 깨우치는 게 좋겠지만…… 조금 늦은 것 같군요.”
칼 루테는 대부분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했지만 흙 속성만큼은 꺼려 했다.
“어쩔 수 없죠. 얼음만으로도 웬만한 구조물은 다 만드니까요.”
“그건 그렇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셀린느가 주로 쓸 건 공격 마법일 테니까.”
로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정교한 얼음 샹들리에들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났다.
“셀린느, 천장 전체를 한번 날려 보겠어요? 공격 마법으로.”
“그러죠.”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펑!
천장 전체가 순식간에 푸른 불꽃에 휩싸이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얼음이라서 증발시켰어요. 괜찮죠?”
로즈는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셀린느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대공자는 대체 어쩌다 이런 괴물과…….’
그녀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이만하면 실력은 충분히 본 것 같군요.”
“어떤가요?”
“솔직히 말해서, 원한다면 곧바로 황실 소속 마법사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군요.”
로즈는 셀린느가 반색하리라 생각했지만, 셀린느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어두워진 낯빛을 숨기지 못하며 시선을 땅으로 시무룩하게 떨구었다.
‘왜 저러지?’
로즈는 얼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