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72화 (72/120)

72화.

“마법사들이란. 자기소개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레온하르트는 태연하게 투덜거렸지만, 셀린느는 멍하니 금빛 글씨를 바라보기만 했다.

방금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차 어지러운데, 이런 영문 모를 초대장이라니.

“플, 플뤼아는 대체 어디죠?”

“모른다.”

“……?”

본인이 누군지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초대장, 레온하르트가 어딘지도 모르는 약속 장소…….

셀린느는 무심코 움직이다,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글씨에 기겁했다.

“이거, 어떻게 없애죠?”

“답장을 써야 사라질걸. 나도 써 본 적이 있다.”

“어떻게요……?”

“그냥 써.”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일러 주는 대로 허공에 글씨를 천천히 적었다.

[누구신가요?]

답장을 적자마자 금빛 글씨는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셀린느는 숨도 쉬지 못하고 답장을 기다렸지만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금빛 글씨가 있던 곳을 손으로 휘휘 저었다.

“신경 쓰지 마라. 그냥 널 떠보았을 수도 있어.”

“떠보았다고요?”

“그래.”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왜 절 떠보려고 할까요? 레온하르트도 아니고…….”

레온하르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너는 나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유일한 마법사다. 널 통해서 나를 떠보려는 거겠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만.”

“…….”

“어쨌거나 이거 하나는 확실하군. 조만간 넌 이자를 만나게 될 거다.”

셀린느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레온하르트의 추측이 이번에도 옳았다.

바로 다음 날 아침, 한 마법사가 그녀를 찾아왔으니까.

***

“만나서 반가워요. 로즈 파크라고 해요.”

“정말로…… 이름이 로즈였군요.”

“그럼요.”

나이가 레온하르트와 비슷해 보이는 젊은 마법사는 살짝 웃었다.

“그냥 로즈라고 불러요. 루테니 뭐니 하지 말고.”

셀린느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로즈를 빤히 쳐다보았다.

로즈는 갑작스레 객실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을 깨웠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왜 셀린느를 찾아왔는지, 애당초 초대장을 왜 보냈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나, 대체 나를 왜 찾아왔나. 이런 표정인데요?”

“……네.”

로즈는 그들로부터 꽤나 떨어진 듯한 벽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슬쩍 쳐다보았다.

“공자님이 없는 곳에서 얘기했으면 좋겠는데. 괜찮아요?”

“플뤼아요?”

“네.”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느는 잠시 머뭇거렸다.

만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사람을 따라가는 건 바보짓일 것이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믿죠?”

“어머, 제가 그렇게 수상해 보일 줄은 몰랐는데.”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셀린느의 말이 빨라졌다.

“그냥, 왜 하필 저한테 이러시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자는 믿어도 돼. 적어도 너에게 해코지는 하지 않을 거다.”

그때, 여태까지 단 한마디도 없던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

“성까지 들으니 기억이 나는군. 예전에…… 같이 임무를 수행하라는 압박이 심하게 들어와서.”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그렇다면 로즈는 레온하르트에게서 심한 모욕을 받았다는 마법사 중 한 명일 것이다.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로즈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땐, 제게 대체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황실 소속 마법사가 되었냐고 하신 것 같은데.”

“…….”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셀린느의 청회색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로즈는 레온하르트에게 적대적이었고,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그 사실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무엇보다도 혼란스러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하르트가 로즈를 믿어도 된다고 한 점이었다.

“어쨌든, 옛 원한을 갚겠다고 당신에게 접근한 건 아니니 걱정 마요. 단지 할 제안이 있을 뿐이니까. 어때요, 플뤼아로 가 보겠어요?”

로즈는 주머니에서 마력석을 꺼냈다. 마법으로 이동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가 뭐라고 생각하든, 이건 함정일지도 모른다. 로즈를 따라갔는데 흑마법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결말일 수도 있었다.

“정 못 믿겠으면 이거, 당신에게 줄게요.”

로즈는 셀린느에게 마력석을 건넸다. 이동 마법의 마력이 느껴졌다.

이동 마법은 가는 마법과 오는 마법이 한 쌍으로 마력석에 각인되는 형식이다.

이 마력석이 있으니 셀린느는 언제든 호텔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레온하르트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게 맡기겠다는 거야.’

셀린느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천천히 셀린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마력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셀린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력의 흐름이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새로운 장소로 이동시키는 게 느껴졌다.

자신이 이동 마법을 썼을 때와 달리, 안전하고 쾌적한 이동이었다.

“눈을 못 뜨겠어요?”

로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눈을 뜨니,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넓은 평야에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햇살이 그들의 머리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보통 평야가 아니야.’

셀린느는 곧 일반적인 평야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굴절되어 쏟아지는 햇살과, 겨울답지 않은 따스한 공기, 계절과 맞지 않게 활짝 핀 꽃들까지…….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하도 규모가 커 바로 눈치채기가 힘들었지만, 사방은 투명한 유리로 막혀 있었다.

그들이 이동한 곳은 거대한 유리 온실 안이었다.

“플뤼아가…… 온실이었군요.”

“아, 여긴 입구예요.”

로즈가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지만, 셀린느는 그녀를 가로막았다.

“여긴 레온하르트가 없는 곳이잖아요. 약속한 대로 지금 얘기해 줘요. 대체 무슨 제안인가요?”

로즈의 눈이 기묘하게 반짝였다.

“여기서는 얘기할 수 없어요. 마력석, 아직 잘 가지고 있죠? 그것만 있으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요.”

“아니, 그래도…….”

“가보면 알 거예요.”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렸지만 더는 로즈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로즈의 뒤를 따르며 주위를 관찰했다.

이곳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있는 단서를 찾고 싶었지만, 유리 온실 안에서 보이는 건 오직 꽃밖에 없었다.

로즈는 꽃밭 사잇길로 한참을 걷더니 자그마한 벽돌집 앞에 멈춰 섰다.

이렇게 화려한 온실 안에 있는 집치곤 무척 평범해 보이는 집이었다.

“로즈의 집인가요?”

“그럴 리가요.”

로즈는 문 앞에 멈춰 서더니 나무로 된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문은 저절로 열렸다.

“들어와요.”

셀린느는 들어가자마자 당황했다.

겨우 원룸 크기만 한 작은 집이리라 생각했는데, 유리 온실에 못지않은 거대한 규모의 성이 펼쳐져 있었다.

셀린느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올라가는 고풍스러운 층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곳은 베르누이성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화려함은 더했다.

마법이 아니고선 도저히 만들어 낼 수가 없는 아름다운 조형물들이 사방에 달려 번쩍거렸다.

로즈는 반쯤 얼이 빠져 있는 셀린느를 보고 슬며시 웃었다.

“플뤼아에 온 걸 환영해요. 다들 처음 오면 놀라죠.”

“여기가…… 어딘가요?”

셀린느는 이제는 로즈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루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긴 황실 마법사들이 하사받은 궁이랍니다, 셀린느 루테.”

셀린느는 놀라지 않았다.

로즈가 황실 소속 마법사이니, 당연히 이곳도 그와 관련된 곳이리라는 추측 정도는 했다.

“왜 여기로 온 거죠?”

“셀린느 루테가 저희를 만나고 싶어 하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놀란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정답이었나 보네요.”

로즈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어서 가죠, 다들 셀린느 루테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다들이라니…… 얼마나 많은데요?”

“음, 거의 대부분?”

“……대부분이요?”

셀린느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은 기껏해야 서너 명이리라고 생각했다.

“대체 왜, 그 많은 분들이…….”

“셀린느 루테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요.”

로즈는 반쯤 셀린느의 등을 떠밀었다.

“자, 여기까지 와서 얼어 버리지 말고, 어서 가요.”

걸어가는 동안 셀린느는 마음의 준비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초대장이 도착했을 때부터 일어난 모든 일들이 충격의 연속이라 머리가 얼어 버려서 그렇지, 가만히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일들도 아니었다.

레온하르트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황실은 계속 그에게 마법사를 붙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친우의 죽음 이후로 그 어떤 마법사도 거부했다.

자신이 나타날 때까지.

‘단순한…… 호기심일까.’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단순한 호기심이라면 얼마든지 이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굳이 레온하르트의 신경을 긁어 가며 그의 코앞에서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결국 셀린느는 생각을 포기했다.

어차피 이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무슨 제안을 하려는 건지는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황실 소속 마법사 거의 대부분이 모여 있다는 로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셀린느가 로즈를 따라 들어선 거대한 홀은 백여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수많은 눈들이 셀린느를 빤히 쳐다보았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로즈, 무슨 제안이었는지 알려 줄 수 있나요?”

로즈는 조금 당황한 듯 눈을 깜박거렸다.

“……좀 성급하군요. 하지만 좋아요, 급한 일이니까.”

그녀는 셀린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셀린느 루테,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당신이 공자를 돕는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그, 그건…….”

“그리고, 앞으로 당신에게 전력을 다해 협조하겠어요. 이게 전부랍니다.”

“……!”

셀린느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로즈의 말은 투박하고 다소 두서가 없었지만 중요한 의미를 왜곡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레온하르트의 곁에 있어 준 것에 대해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었고, 앞으로 협조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즈는 셀린느가 멍하니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혹시 거절할 거면 지금 당장 돌아가요. 여길 보여 준 것 자체가 우리에겐 도박이니까.”

“……대가는, 뭔가요? 제가 뭘 해야 하죠?”

로즈는 코웃음을 쳤다.

“대가요? 이미 당신이 충분히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나요?”

“네?”

셀린느의 입에서 당황에 가득 찬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이들을 위해 한 게 아무것도 없다.

“공자의 옆에서 흑마법에 맞서 싸우고 있잖아요. 그만한 대가가 어디 있나요?”

“……겨우 그 이유로, 저를 도와주시겠다고요? 이 모든 분들이?”

그 순간, 여태껏 침묵만이 감돌던 사방에서 순식간에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인파 속에서 나이 지긋해 보이는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대답은 내가 하도록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