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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69화 (69/120)

69화.

레온하르트는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같이 있을 걸 그랬나.’

하지만 셀린느가 수정구를 깨 버리는 쪽을 선택할 경우, 도저히 그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무리 그것이 실제 목숨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미 수정구의 비밀을 알아 버린 이상 무게감이 달랐다.

그는 소파에 앉아 라쉬르를 검집에서 빼 들어 마력을 조금 흘려보냈다.

칼날에 푸른빛이 감돌면서 번쩍였다.

‘……약해.’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를 만나고 난 후, 그간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셀린느를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부터가 오만이었다.

당장 셀린느가 그를 걱정하여 목숨을 던지는 일이 없을 정도로 레온하르트가 강하다면, 그녀의 가슴에 못 박을 소리를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라쉬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간 노력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제국 전체에 그보다 강한 사람은 없는 상황에서 더욱 강해지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레온하르트!”

“……?”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셀린느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뭐지?’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문을 열었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셀린느가 구깃구깃한 양피지 조각을 펼쳐 보였다.

[기다려라, 그리고 준비해라.]

“……이게, 뭐지?”

“마지막이에요, 이번이…….”

셀린느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요, 레온하르트. 저 때문에…….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

레온하르트의 속에서 무언가가 부글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예언이었으니까.

‘드디어.’

이제 조만간, 셀린느의 저주가 풀린다.

더 이상은 셀린느가 안절부절못하며 마법에 매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위해 셀린느가 죽는, 혹은 죽으려는 모습을 보지 않게 되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기묘하게 달아올랐다.

“정말…… 다행이군.”

무미건조한 말투였지만, 셀린느는 그 안에 담겨 있는 레온하르트의 진심을 느꼈다.

“다 레온하르트 덕분이에요.”

“아니지, 다 네가 했잖나.”

“아뇨.”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레온하르트는 단순히 절 도와준 정도가 아니잖아요.”

셀린느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해 준 것들은 차마 말로 표현을 다 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셀린느는 아직도 그 지옥 속에서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장차 찾아올 악역에 대한 악몽을 꾸면서.

레온하르트는 어딘지 감상에 잠긴 듯한 셀린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너 또한 마찬가지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조용히 삼켰다.

“이건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군.”

셀린느가 싱긋 웃었다.

“그냥 여기 적힌 그대로라고 생각하세요.”

“……?”

“여태까진 다른 곳으로 갔잖아요? 이건…… 찾아올 거예요. 저희를.”

“……!”

레온하르트의 눈이 흔들렸다.

셀린느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두렵게 들리는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왜지?’

레온하르트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셀린느는 결코 아둔하지 않았다.

상식은 다소 모른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은 채 집 안에 갇혀 자란 사람에게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방금 셀린느의 예언은 무언가 거대한 재앙이 그들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한 셀린느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네 꿈이, 이것 뒤에는 뭐가 찾아온다고 보여 줬나? 전에는 늪이라고 했잖나. 당연히 찾아가야 하는 줄 알았건만.”

“아.”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흥분해서 레온하르트에게로 달려가느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단순히 꿈이라고 얼버무리며 다음 스테이지를 설명하기엔 게임에 큰 변동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본디 이 퀘스트는 앞으로 스테이지를 세 번은 클리어해야 떴던 퀘스트였다.

마지막 스테이지를 알리기 위한 퀘스트였으니까.

‘중간 스테이지들이 전부 스킵된 것일지도 몰라.’

다음 스테이지인 줄만 알았던 늪도, 두 번째 스테이지인 유령 숲처럼 진엔딩 루트에선 애당초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올 수도 있고.’

그렇다고 늪은 이제 없을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진엔딩 루트에선 스테이지들이 병합되었기에, 단지 퀘스트가 이르게 나왔을 뿐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꿈과 많이 달라졌다고 얘기하기엔 자신은 너무 확신에 넘쳐서 레온하르트에게로 달려왔다.

“아…….”

“말하기 어려운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의 굳건한 레온하르트와는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불안해하고 있어.’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레온하르트의 관점에서 여태까지 그들은 자신의 예언에 의지해 저주를 풀어 나가고 있지 않았는가.

당연히 예언자인 자신이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보이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셀린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꿈과 좀 달라요. 꿈에선 이걸 좀 늦게 봤었는데……이게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

레온하르트는 전혀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건 늪을 클, 아니 지난 다음에야 나왔어요.”

“그다음엔?”

“그다음엔…….”

셀린느의 말이 뚝 끊겼다.

‘그다음엔, 뭐였더라.’

이상하게도 최종 스테이지에 대해선 어렴풋한 기억만 남아 있을 뿐 명확한 상황이 떠오르지 않았다.

‘뭐, 뭐야…….’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당황한 듯 셀린느를 불렀다.

“모, 모르……@[.]”

셀린느의 말이 뚝 끊겼다.

머리가 어지러워 모르겠다는 간단한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셀린느는 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셀린느!”

셀린느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자신 방의 침대 위에 눕히고 한참 동안 서성였다.

셀린느가 바닥에 축 늘어졌을 때 심장이 공포와 자책으로 터져 버릴 듯했다.

다행히 셀린느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도 달음박질하는 심장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숨을 고르게 내쉬는 걸 보니 단지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 같았다.

정신을 잃은 셀린느를 보는 일 분 일 초 동안 가슴이 타들어 갔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어느덧 라쉬르를 꽉 쥐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여태껏 라쉬르만 있다면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나 얄팍한 생각이었는가.

라쉬르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셀린느!”

“레온하르트.”

셀린느가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어.”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똑바로 앉았다.

“또…… 꿈을 꿨나, 혹시.”

“아뇨.”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최종 스테이지에 대한 기억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흐릿했지만, 더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왜일까.

셀린느는 자신이 쓰러지기 전엔 최종 스테이지에 대해 더욱 잘 알고 있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더욱더 잘 알고 있었다고…….

셀린느는 얼굴을 찡그리며 최종 스테이지에 대해 더욱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욱!”

심한 토기와 함께 머리가 아찔하더니, 눈앞의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셀린느는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지 서 있는지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한 채 몸을 비틀거렸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셀린느를 반쯤 부여잡았다.

“기억을…… 못, 하겠어요.”

“셀린느.”

셀린느는 본능적으로 레온하르트의 품에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약간 굳었지만, 눈치채지 못한 그녀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이번만 넘기면 저주가 풀리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셀린느를 안은 레온하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의 직감이, 셀린느의 생각이 이번만큼은 틀렸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가는 것이 아닌, 그들을 찾아오는 적.

‘준비해라’라는 문구.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셀린느가 이번만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까지.

마치…… 이성을 잃기 시작한 마법사처럼.

‘그럴 리 없어.’

불현듯 지나간 섬뜩한 생각에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셀린느는 반동을 순수하게 그녀 자신의 의지력으로 풀어냈다. 이렇게 쉽게, 갑자기 흑마법에 물들 리가 없다.

게다가 그는…….

그는 땀에 젖은 셀린느의 머리칼을 뒤로 넘겨 주었다.

“그래도 준비는 철저히 해야겠군. 여기에 적힌 대로 하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도 있으니까.”

“그럼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칼 루테께 도움을 요청해야겠어요.”

“아, 칼 루테는 바쁠 거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칼 루테는 그리 탐탁지 않으나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였다.

하지만 얼마 전 임무를 위해 제국 밖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그런가요.”

셀린느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래도 널 도와줄 마법사들이…… 없진 않을 거다. 황실만큼 마법사들을 대우해 주는 곳도 없으니.”

“절 도와줄까요?”

“내 이름을 말해라.”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누구 한 명쯤은 널 돕겠지.”

“레온하르트!”

“믿어 봐라.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셀린느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네요. 레온하르트를 돕기 위해 실력을 키워야 하겠다는데, 누가 거부할까요.”

“……솔직히, 거부할 자들이 대다수일 거다.”

레온하르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숨겨서 될 일이 아니었다.

“왜요?”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온하르트가 마법사들을 꺼린다는 얘기는 여러 번 들었다. 그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여태껏 숱하게 많은 흑마법사들을 베어 왔으니까.

언젠가 흑마법사가 될지도 모르는 자들과 어울리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마법사들이 레온하르트를 꺼릴 이유가 있을까.

“싸우기라도 했어요?”

“……그런 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어딘가 방금 내뱉은 말을 후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럼, 뭐죠?”

“…….”

침묵이 흘렀다.

셀린느는 천천히 기다렸다.

만약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라면, 레온하르트는 반드시 말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들어야 할 필요가 없으니 재촉할 이유가 없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목울대가 움직였다.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것보다야, 내게서 듣는 게 낫겠지.”

셀린느의 가슴이 살짝 조여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셀린느에게 얘기하리라고 레온하르트가 확신한다는 건, 제법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푸른 눈을 직시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라면, 지금 레온하르트에게서 듣고 싶어요.”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셀린느의 시선을 살짝 피해 그녀 뒤편의 벽면을 바라보았다.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군…… 정말, 예전 일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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