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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68화 (68/120)

68화.

“깨라.”

“네……?”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니고, 아프지도 않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요.”

“안에 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 있나, 전전긍긍하는 것보다야 지금 보는 게 백배 낫지.”

“그, 그렇긴 하죠.”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얼떨떨하게 수정구만 바라보는 셀린느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왜, 내가 말릴 줄 알았나?”

“네. 그래서 좀 놀랐어요.”

셀린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자신은 당연히 레온하르트의 거센 반대에 부딪힐 줄 알았다.

레온하르트는 지그시 수정구를 바라보았다.

“만약 기다린다면, 이것이 네 목숨을 한 번쯤 살려 주긴 하겠지.”

그는 팔을 길게 뻗어 수정구의 표면을 살짝 건드렸다.

“하지만…… 이것이 깨진 다음엔?”

“그럼 어쩔 수 없이 죽어야겠죠. 어쨌거나 이것 덕에 한 번 덜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셀린느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가 지금, 이토록 긴장할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인가?

“아예…… 죽지 않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

“무슨 소리죠?”

셀린느는 잠시간 눈을 깜박였다. 감이 도통 잡히지 않았다. 분명 그의 입장에선, 둘은 셀린느가 죽는 저주를 풀기 위해 노력 중이 아니었던가.

레온하르트는 멍한 셀린느의 얼굴을 보고서야 무슨 오해가 생겼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주와는 별개로 네가 죽지 않을 수도 있잖나.”

“저주는 풀되, 저주를 풀기 전에도 제가 안 죽어도 되는 거 아니냐고요?”

“그래.”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가 계속해서 죽는 원인이 바로 저주였으니.

“저주를 풀기 전에는 죽을 수밖에 없잖아요.”

“아니.”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마법사의 자질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날……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생각나나?”

“아.”

셀린느는 곧바로 레온하르트가 언제 적을 얘기하는지 깨달았다.

“더 이상, 죽지 않을 거라고…….”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차분히 말을 이으려 노력했지만 흥분된 어조를 숨기는 덴 실패하고 말았다.

“그때 네가 웬 이상한 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막 발현한 사람 특유의 헛소리인가 했지. 하지만 그건 예언이었어. 그렇지 않나?”

셀린느는 어느새 바싹 말라 버린 입 안을 적셨다.

등줄기에 서늘한 식은땀이 느껴졌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렇게나 던진 말 한마디가, 절대 가볍지 않은 무게를 싣고 되돌아왔다.

여태까지 자신이 사용한 ‘예언’의 용법에도 들어맞는 사례였기에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아니야.’

갑작스레, 셀린느는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결코 예언을 맹신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의 ‘예언’을 믿고 따라와 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예언을 믿어서라기보단 자신에 대한 신뢰임을 모를 정도로 셀린느는 멍청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예언을 신봉하는 듯한 말을 하는 것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긴장으로 부르르 떨리는 몸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네. 예언이었죠.”

셀린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불안감에 떨리지도, 불확실함 때문에 말꼬리가 흐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틀린 예언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틀린 하고많은 예언 중 하나일 뿐이라고요. 전 그 뒤에도 계속 죽었으니까요.”

“틀린 예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레온하르트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우두머리 마물 셋과 한꺼번에 맞섰을 때보다 팽팽한 긴장이 느껴졌다.

입 안에 맴도는 말을 꺼내기는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오랜 기간 전장에서 단련시킨 그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고.

레온하르트는 훈련장에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숨을 갉아먹어 가며 자신을 돕던 셀린느를 떠올리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정말로 죽지 않기 위해 노력했으면 한다. 오직 네 목숨 하나만 생각하면서…….”

셀린느는 움찔하는 몸을 막을 수 없었다.

순간, 눈에서 불꽃이 파르르 튀었다.

레온하르트의 말은 앞뒤 맥락 없이 튀어나왔지만 그녀는 곧바로 알아들었다.

“레온하르트, 전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어요! 제, 제가 얼마나……!”

자꾸만 목에서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말을 잇는 것조차 힘들었다.

말 한마디에 이렇게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말을 황급히 낚아챘다.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다.”

원래는 그녀의 흥분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되레 가속화만 될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이건 생각해다오. 네가…… 네 목숨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할 수 있나?”

“…….”

셀린느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가 멈추었다.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혀끝에서 부산대던 말들이 일제히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넌 죽지 않았어도 될 죽음을 겪었다. 나를 지키려다가.”

“…….”

“물론, 나와 네 목숨은 다르다고 생각하겠지.”

“당연하잖아요.”

“당연하지 않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살아난다 한들, 네가 죽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아. 죽지 않을 수도 있었어,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더는 셀린느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니,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는 시선을 허공을 향한 채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일들이 네 탓이라는 건 아니다. 내 탓이 더 크겠지.”

“레온하르트!”

“마력 고갈로 죽을 뻔했다는 거, 안다.”

“……!”

크게 열린 청회색 눈엔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경악과 공포, 부끄러움이 뒤섞여 부글거리는 감정이 일었다.

“모를 줄 알았어요.”

셀린느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하지만, 그때 전…… 레온하르트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한 번에 우두머리 셋은 누가 봐도 무리니까…….”

당시, 셀린느는 전심전력을 다해 레온하르트를 도왔다.

온몸에서 이러다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 댔지만, 신경조차 쓰이지 않을 정도로.

루가 수정구를 뱉어 낸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셀린느는 루에게서 마력을 최대한 도로 빨아들였다.

루가 수정구를 뱉어 낸 건, 괴로움의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라디소 기사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그들보단 제가 더 잘 알아요. 제가 돕지 않았다면, 레온하르트는…….”

“네가 틀렸다는 건 아니다. 우두머리 셋은 무리였어. 네 도움이 없었다면 훨씬 고생했겠지. 고맙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게, 네 목숨은 버려도 된다는 이유가 되진 못해.”

“제가 돕지 않았다면…….”

“난 죽지는 않았겠지. 여차하면 그 약도 있고.”

“…….”

셀린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셀린느가 돕지 않았어도, 레온하르트는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네요.”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천천히 수정구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이게 없을 때도 넌 네 목숨을 생각하지 않았어. 그런데 이게 있다면, 더욱 그렇겠지. 그래서 깨라고 했다.”

“…….”

셀린느는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유리처럼 투명하게 느껴지는데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비현실적인 물체.

레온하르트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게 없다면 자신은 더욱 적극적으로 목숨을 던지려 들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넌 언제나 그랬어. 그 누구보다도 죽음을 원치 않으면서도 죽음을 무릅쓰며 나를 도왔지.”

“레온하르트…….”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나다. 힘이 부족해서, 네 힘을 빌릴 수밖에 없으니까.”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그녀에게 자신의 죽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재앙.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노력해 봤자, 죽는 횟수를 줄일 뿐 죽음을 아예 피할 수는 없는데…….’

갑자기,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레온하르트가 말하고자 했던 게, 이거였어.’

그는 그 자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지 않았다. 셀린느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칼칼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제가 바뀌어야,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군요.”

“……네 잘못이란 소리는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진 않았어. 네가 목숨을 거는 건, 주로 날 돕기 위해서였으니까.”

그의 시선이 셀린느가 아닌, 셀린느 너머의 벽을 향해 배회했다.

“셀린느, 날 믿으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부끄러운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으니까. 하지만……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길 순 없겠나?”

분명 레온하르트가 단 한 시간만 더 전에 물었더라면 셀린느는 같은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미 그러고 있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의 목은 무언가에 턱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일어섰다.

“지금 결정할 필요는 없다. 단지…… 부탁했을 뿐이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자리를 완전히 떠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수정구를 들여다보았다.

사실, 처음부터 자신은 이것을 깨기를 원했다. 레온하르트 또한 자신이 이것을 깨기를 원한다.

각자의 이유가 정반대라는 점이 아이러니했지만.

‘깬 걸 본다면…… 일단은 안심하겠지.’

셀린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그게 레온하르트가 뜻한 바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셀린느가 목숨을 소중히 여기기를 바란다.

단순히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평범한 목숨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그 생각이 너무나 예전, 그녀의 평범했던 삶을 떠올리게 해 눈시울이 붉어졌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얀 손 위에서 수정구가 은은하게 빛났다.

‘미안해요, 레온하르트.’

자신이 정말 이 세계에서 태어나 영문 모를 저주에 휘말린 사람이라면 레온하르트의 말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린느는 자신의 목숨이 결코 평범한 목숨과 같이 취급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이 게임의 주인공이자, 플레이어였으니까.

그것도 실제로 게임을 하고 있는.

셀린느는 링조르를 집어 들었다.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괜한 이목을 끌기가 싫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마력을 링조르에 끌어올렸다.

어설프게 했다간 다치기만 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기에 손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파직

본디라면 목숨이 끊어지고도 남을 만큼의 마력을 쏟아부었으나 작은 파열음만 들릴 뿐이었다.

슬그머니 눈을 떠 보니 파스스 부서진 수정구가 그녀를 반겼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안에서 양피지를 끄집어냈다.

[준비해라, 그리고 기다려라.]

손에서 양피지가 떨어졌다.

“……!”

흥분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으로 셀린느가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는 퀘스트가 나타났다.

양피지 위의 글귀는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 화면상의 퀘스트와 똑같은 내용이었다.

이건, 마지막 스테이지를 알리는 퀘스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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