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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65화 (65/120)

65화.

“셀린느 루테! 어떻게 하신 겁니까?”

“네? 저, 완전히 실패한 게…….”

셀린느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실패라니요?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여기가 바로 접경지대입니다!”

“하, 하지만 준비가……!”

“저희가 누굽니까.”

바트는 씩 미소 지었다.

“이 정도는 준비되어 있어야 카르파티아의 이름에 부끄럽지가 않지요.”

바트의 말처럼 잎사귀를 털어 내며 일어난 단원들은 하나둘 자세를 잡았다.

그동안 셀린느는 주변을 살폈다. 바트 단장의 말이 옳았다.

접경지대의 울창한 숲과 무성한 풀밭은 특이할 게 못 되었으나, 깎아지른 듯한 황토색 절벽은 이곳뿐이었다.

“……?”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레온하르트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셀린느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사방을 두 번, 세 번 둘러보았다. 여전히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휘몰아쳤다.

무언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렇게 대규모 이동을 처음부터 시도하는 게 아니었다. 서넛, 다섯 정도를 시도하는 게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나에게서 제일 가까이 있었어!’

셀린느가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정신을 차리려는 와중에, 바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루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단원들은 모두 있나요?”

바트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짤막한 시간이 셀린느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예. 그런데 공자님께서…….”

셀린느는 눈을 꽉 감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안 계십니다.”

***

레온하르트는 질척한 진흙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황도는 확실히 아니군.’

눈앞에 드넓게 펼쳐진 늪지대는 황도의 중심부는 물론 변두리까지 생각해도 없었다.

‘셀린느도…… 없고.’

아무래도 자신과 셀린느, 그리고 파라디소 기사단을 모두 숙소 입구까지 옮길 예정이었던 마법은 크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다른 기사단원들이 없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엿한 황실 소속 기사단이었으니까.

게다가 카르파티아에서 보여 준 실력을 생각한다면 어디 던져 놓아도 잘 살아 나올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달랐다.

‘내가 없을 때 죽기라도 한다면…….’

더군다나 마법에 실패해 절망에 빠져있을 상황.

‘이동 마법을 다시 쓴다는 건 생각도 못 할 거고.’

레온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이동 마법이 실패했다 한들 바로 곁에서 휘몰아쳤던 마력의 흐름이 자신 혼자 엉뚱한 곳에 내동댕이쳤을 리가 없었다.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셀린느만큼은 자신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늪을…… 찾아올까.’

분명 셀린느는 늪을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이 늪지대는 조금만 떨어진 곳에서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서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

깎아지른듯한 황토색 절벽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이곳은 접경지대 인근이었다.

그리고 셀린느가 어디에 있든, 저 절벽을 보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기에 올라가면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였지.’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셀린느는 간신히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현재, 이곳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그녀였다.

걱정스레 자신을 살피는 바트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약간, 안 괜찮아졌어요.”

“놀라셨나 보군요.”

바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려 그 레온하르트 공자님 아니십니까. 어디 계시든 잘 헤쳐 나올 겁니다.”

“……그렇겠죠.”

셀린느는 아직도 마구 뛰어 대는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바트의 말이 맞았다. 레온하르트는 설령 불구덩이 속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멀쩡히 살아 나올 것이다.

지금은 그녀 자신과 난데없이 접경지대에 도착한 이 기사단원들을 위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레온하르트를 찾아야겠어요.”

바트는 친근한 호칭에 조금 놀란 모양인지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게 낫겠군요. 어쨌든 저희는 우두머리 마물을 모두 소탕하러 온 것이니…….”

접경지대에 남은 우두머리 마물은 모두 셋.

그날의 성과는 한꺼번에 집결한 황실 소속 기사단들의 규모에 겁을 먹은 마물들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이유도 컸다.

지금 이 인원은 많아야 스물.

레온하르트 없이 우두머리 마물을 소탕하러 섣불리 달려들었다간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컸다.

셀린느는 절벽을 가리켰다.

“혼자 다녀올게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공격 마법은 자신이 있어서요.”

셀린느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황토색 절벽을 노려보았다.

이동 마법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쉬워도 쓰진 않았겠지만.’

셀린느는 실패한 직후 또다시 같은 마법을 시도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절벽을 향해 서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셀린느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생각했다. 늪지대는 생각보다 걷기 힘들었고 절벽은 보기보다 멀었다.

셀린느가 이곳에 있다면 금세 기진맥진했을 것이다.

‘쉬게 해 주고 싶었는데.’

화산에서 있었던 일 이후,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얼마간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황도로의 소환에, 사냥 대회, 그리고 바트 단장의 요청까지.

전부 셀린느의 의사와 관계없이 진행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은 더해졌다.

‘……자책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셀린느는 자책하며 어떻게든 자신을 찾으려 들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걸음이 빨라졌다.

셀린느는 풀밭에 나뒹구는 나뭇가지와 무성한 가시덤불들을 가볍게 건너뛰었다.

‘헤르메스의 신발’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잘 미끄러지는지 알았다. 신발이 아니었다면 진작 장애물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진엔딩 루트는 이렇게 하나씩 죽는 원인을 제거해가는 걸까.’

노멀 엔딩에서의 주인공은 자신을 쫓는 적들을 피해 영원히 안전한 곳으로 도망친다.

진엔딩 루트의 주인공은 저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만 들었지만, 실은 이렇게 죽는 원인이 모두 없어지는 스토리였을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는 숨이 제법 차오른 채 절벽으로 올라가는 오르막 끄트머리에 도착했다.

“……느!”

“……!”

순간, 셀린느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돌아갔다.

떨어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렇게나 보고 싶었던 사람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땀에 흠뻑 젖은 머리칼의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다행히 셀린느는 넘어지기 직전, 균형을 잡았다.

“조심해야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대답하지 못했다.

‘레온하르트가 무사해. 나 때문에 떨어졌는데…… 그래도 무사해. 그런데 진흙은 뭐지…… 위험한 상황에 빠졌었나? 그래도 레온하르트니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서로 부딪치고 뒤엉켜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거의 주저앉은 수준인 셀린느와 눈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나는 걱정할 것 없다. 파라디소 단원들도 흩어졌나?”

셀린느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레온하르트는 간단한 질문 하나로 우선순위를 알려 주었다.

그녀와 레온하르트,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 모두 무사하게 접경지대에 도착했다.

“아, 아뇨. 전부 저와…….”

“너와?”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셀린느 홀로 절벽을 오르고 있기에, 당연히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 역시 흩어졌으리라고 생각했다.

“혼자 가라고 그러던가? 마물이 넘쳐나는 이곳을?”

“아, 제가 여기 혼자 오겠다고 했어요!”

셀린느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전 혼자서도 마물에 잘 대처할 수 있지만, 기사단분들은 흩어지면 힘드니까…….”

“…….”

레온하르트는 속에 부글거리는 말들을 삭이며 지그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혼자서도 마물에 잘 대처할 수 있다니.

이곳은 조무래기 마물들이 몰려다니는 곳이 아니었다.

오래 방치당해 지능이 높아진 우두머리 마물들이 어둠 속에서 숨어 있는 접경지대가 아니던가.

설령 셀린느의 말이 맞는다 하더라도 마물 처치에 능한 기사단을 함께 대동하는 것과 혼자 다니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다 같이 올 수도 있지 않았나.”

“아.”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 같이 이 절벽에 올라, 상황을 파악하자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 생각을 못 했어요. 제, 제가 같이 있어야 저분들도 안전한 건데…… 다 같이 올 걸 그랬네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는 그녀 역시 안전해진다는 점을 빠트렸지만, 굳이 꼬집어 주고 싶지가 않았다.

“셀린느.”

“……?”

청회색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 순 없다.”

“알아요. 여태까지도 많이 떨어져 있었잖아요.”

셀린느는 서둘러 대답했다.

레온하르트가 말하고자 하는 게 대체 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내가 레온하르트 없이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아니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태까지 자신은 최대한 레온하르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했고, 레온하르트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네가 예상치 못할 때……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내가 네 곁에 없을 수도 있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해라. 파라디소 기사단을 못 믿어서 여기 혼자 온 게 아니잖나.”

침묵이 흘렀다.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셀린느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낯빛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아주 천천히, 셀린느의 입이 움직였다.

“레온하르트는요?”

“……?”

레온하르트는 잠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말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분명 대답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자신은 셀린느보다 훨씬 강하다. 아니, 제국에서 자신을 따라올 사람은 없다……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입을 멈추게 한 건 그가 오래전, 셀린느의 도움을 요청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존재 없이는 잠 한숨 잘 수 없었던 언젠가.

“……나도 그러도록 하지.”

“정말인가요?”

“…….”

“레온하르트였어도, 여기 혼자 왔을 거예요. 제 말이 틀렸나요?”

레온하르트는 반박할 수 없었다.

셀린느는 그의 표정을 슬쩍 보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딱히 타박하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저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워요.”

셀린느는 정확한 이유를 얘기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자신이 항상 이방인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말을 대충 이해한 듯했다.

“알았다. 그럼…… 최대한 네 곁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지.”

셀린느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레온하르트에게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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