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멀끔히 정비된 파라디소 기사단의 훈련장은 예정된 임무를 위해 훈련하며 열심히 땀을 흘리는 단원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즐거운 기색이었지만 단 한 명, 기사단장 바트만이 무채색 벽면을 골똘히 노려보고 있었다.
‘……괜찮을까.’
무대포로 베르누이 대공자를 찾아갔지만, 그는 자신의 제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잘 인지하고 있었다.
파라디소 기사단 전원과 말들까지 접경지대로 이동시키기 위해선 황실 마법사가 최소 다섯 명은 필요할 터.
자신의 계획은 황실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최근 황태자의 눈 밖에 났다는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잘되었으면 좋겠건만.’
바트는 벽면에 기대 놓았던 바스타드 소드를 집어 들었다. 땀을 좀 흘려야 싱숭생숭한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단장님!”
입구에 세워놓은 신참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 공자님께서……!”
신참답게 얼이 빠져 어느 가문의 공자인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지만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바트는 바스타드 소드를 허리에 꿰찬 후 입구 쪽으로 뛰쳐나갔다.
“공자님!”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아가티르수스를 함께 궤멸시킨 마법사와 함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 보이는군.”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바트는 정중히 그들을 숙소 2층에 있는 응접실로 안내했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의 마법사가 사방을 정신없이 살핀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기사단 숙소는 처음 와 보나 보군.’
바트는 마법사를 향해 미소 지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셀린느 헌트예요.”
“셀린느 루테 되시겠군요. 저흴 도와주러 오셨습니까?”
“그럼요.”
청회색 눈이 반달 모양 눈웃음을 지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그 아가티르수스를 궤멸시킨 분 아닙니까. 같이 가 주시는 것만으로도 다들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겁니다.”
“어머,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셀린느는 겸손하게 대답했지만 표정은 제법 의기양양했다.
응접실에 도착한 바트는 뜨거운 물을 석 잔 따랐다.
“딱히 대접할 만한 게 없군요. 술은 금지하고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걸로 충분하네.”
레온하르트의 새파란 눈이 자신을 직시한 순간, 바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리카르도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실의 마법사는 내어 줄 수 없다고 하셨다. 단 한 명도.”
“……!”
바트는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황태자의 거절 자체에 놀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말투, 표정, 그리고 옆에서 딱딱하게 굳어져 가는 셀린느의 표정…….
그 모든 것이 황태자가 단순히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진노했음을 알려 주었다.
“카르파티아도 반납할 준비를 해야겠군요.”
바트는 자포자기한 채 중얼거렸다. 자신은 최악의 선택을 했다.
차라리 좀 더 기다리다가, 어느 정도 세력을 모은 다음 레온하르트를 찾아갈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으리라.
“그건 아니다.”
“……?”
레온하르트는 멍하니 벌려지는 바트의 눈과 입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의 요청이라는 건 숨겼으니까.”
“……공자님!”
“리카르도 전하께선 자네들에 대해선 전혀 몰라. 그러니 안심하도록.”
“이,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잔을 쥔 바트의 거칠고 억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은혜라고 생각할 것까진 없어. 정작 내가 자네들을 위해 한 거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황태자에 대한 자신의 요청은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튈 법한 불씨는 막아 주었으나, 무고한 희생자를 줄이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었던가.
바트가 이렇게까지 감사를 표할 이유는 없었다.
“……아닙니다.”
하지만 바트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했다.
“공자님,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저희 파라디소 기사단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어차피 자네들은 내 명에 반드시 따라야 하지 않나.”
“그, 그렇군요.”
바트는 멍청이가 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레온하르트가 좀체 권한을 쓰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들은 그가 무슨 명을 내리든 따라야 했다.
“그러니 그 문제는 되었고,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뭐든지 물어보십시오.”
“리카르도 전하의 명을 거스르더라도…… 접경지대로 갈 생각이 있나?”
“예……?”
바트의 눈과 입은 다시금 벌려졌고 코는 흥분으로 벌렁거렸다.
“하, 하지만 갈 방법이…… 물론 마법사의 힘 없이 그냥 방법도 있긴 하지만…….”
하지만 접경지대까지 이동하는 데만 한 달.
돌아오는 기간까지 계산하면 최소 두 달 동안 카르파티아의 의무는 내팽개치는 셈이 된다.
바트는 무모하게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바보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가?”
“그럼 당연히 가야죠!”
바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이런 일에 쉽게 나설 리가…… 아, 설마…….”
바트의 시선이 셀린느에게 닿았다.
“이동 마법에까지 능통하셨던 모양이군요!”
“아뇨.”
셀린느는 좀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규모 이동은 지금부터 연습해야 해요. 여기 온 것도 그래서예요.”
열심히 훈련하던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은 난데없는 소집에 놀라지 않았다.
이미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아가티르수스를 함께 궤멸시킨 마법사와 함께 건물을 방문했다는 소문이 퍼진 탓이었다.
“공자님께서 우릴 보러 오시다니!”
“멀찍이서나 뵙는 게 전부였는데, 이렇게 가까이…….”
“카르파티아가 된 보람이 있는구나.”
한마디씩 내뱉는 단원들의 얼굴에 선망과 존경이 불러일으키는 화색이 떠올랐다.
뒷배경이 없는 신입 단원이 대부분인 그들에게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전설에 가까웠다.
베르누이 대공자와 함께 임무를 수행해 보는 게 평생의 소원이라는 단원도 있을 정도였다.
마침내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훈련장에 들어섰다.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바트 기사단장과 함께.
눈치 빠른 단원들은 벌써 무언가가 심상치 않는다는 점을 눈치챘다.
“무언가 잘못되었나?”
“우리가 벌써 뭔갈 잘못했을 리가…….”
“그때 술 처먹고 난동 피운 자식 때문 아니야?”
몇몇이 카르파티아 뒤풀이에서 술에 잔뜩 취해 술집 대문을 박살 내 버린 단원을 노려보았다.
“나, 나 같은 무지렁이 때문에 공자님께서 여기까지 오셨을 리가 없잖아!”
주정뱅이 단원은 손사래를 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들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바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들 접경지대에서의 사냥 대회를 기억하리라고 믿는다.”
단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카르파티아로 만들어 준 대회를 어떻게 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능력 부족으로 접경지대의 마물들을 완전히 소탕할 순 없었지. 만약 그런 기회가 다시금 온다면…….”
바트는 우레와 같이 터져 나오는 환호성에 입을 잠시 물었다.
“그래, 제군들 예상이 맞다. 우린 다시 접경지대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레온하르트 곁에 서 있었던 금발 머리에 유난히 큰 청회색 눈을 가진 마법사를 가리켰다.
“이분이 우릴 데리고 접경지대까지 같이 이동해 주실 셀린느 루테시다.”
단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흥분과 환영이 아닌, 불안감에 찬 웅성거림이었다.
“황, 황실 마법사들은요?”
“……이건 내가 말하지.”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웅성거림은 잦아들고 훈련장 전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난 괜한 억측을 좋아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지. 리카르도 전하께선 이번 임무를 반대하셨다.”
“……!”
바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당연히 사기를 위해 황태자의 반대를 끝까지 숨길 생각이었다.
“따라서, 황실 소속 마법사들은 이번 임무에 단 한 명도 참가하지 않는다.”
레온하르트는 점점 경악에 질려 가는 단원들의 표정에 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담담히 말을 이었다.
“대신 셀린느 루테가 이동 마법을 맡을 거야. 하지만 그녀는 대규모 이동 마법에 대해선 초보자다. 따라서…….”
맹수와 비슷한 서늘한 눈빛이 단원들 하나하나를 응시했다.
“대규모 이동 마법을 완벽히 터득할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당연히 그 대상은 접경지대로 갈 자원자들이 될 터고.”
만약 바트가 똑같은 말을 했다면 훈련장 전체에서 불만에 격앙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난데없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터뜨린 사람은 바로 그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였다.
단원들은 그 기세에 질려 꼼짝도 못 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레온하르트도, 바트도, 셀린느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이 압박감은 그들의 편이었다.
“……자원하겠습니다.”
마침내,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 저도요.”
“저도 자원합니다!”
몇몇이 물꼬를 트니 그때부터는 쉬웠다. 순식간에 모든 단원들이 자원자가 되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확실히 해 두겠다. 가고 싶지 않은 사람은 얼마든지 가지 않아도 좋아. 그 어떤 불이익도 없을 테고. 그건 내가 여기 바트 단장과 함께 협의한 사항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누군가가 단원들 속에서 툭 말을 던졌다.
“……괜찮습니다. 저기 저 마법사님께서 연습하다가 제 몸을 반 동강 내지만 않으신다면요.”
분명 농담이었지만 누구도 웃지 못했다.
이동 마법에 미숙한 마법사가 본인의 상반신만 옮겨 즉사한 얘기가 도시 전설처럼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약속드릴게요. 그럴 리는 없을 거예요.”
셀린느는 웃어넘기려고 노력했지만 절로 표정이 굳었다. 당연히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겠지만 걸리는 점은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레온하르트와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해 보았다.
처음엔 계속해서 엉뚱한 곳에 떨어졌지만, 웬만큼 숙달되니 둘을 이동시키는 데까지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대규모는 물론이고 장거리 이동조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셀린느는 처음부터 장거리를 연습하고 싶어 했지만 레온하르트의 반대에 부딪혔다.
만에 하나 돌아오지 못하면 파라디소 기사단을 계속 기다리게 만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셀린느도 이동 마법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그 말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 결정은 사실상 백지상태에서 장거리 대규모 이동을 준비해야 하는 거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장거리는 시도해 보는 게 좋았을까…… 아니야, 욕심내지 말자.’
셀린느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대규모 이동이 안 되면 말짱 꽝이었다.
레온하르트도 그러지 않았던가.
정확도는 신경 쓰지 말라고. 어차피 상당수 거리를 이동했으면, 그만큼 또 가면 된다고.
“루테, 시작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바트 단장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어…… 어디로 이동시키면 될까요? 일단은 이 정도 규모를 이동시킬 수 있는지부터 확인을 해 봐야 해서요.”
“입구는 어떻습니까?”
“좋아요.”
셀린느는 이틀 내내 준비한 정교한 이동 마법이 담긴 마력석을 꺼내 들었다.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마력석에서 터져 나왔고, 셀린느와 레온하르트, 파라디소 기사단의 전원은 순식간에 훈련장에서 사라졌다.
잠시 뒤.
셀린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일 났네.’
그들은 모두 낯선 풀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파라디소 기사단 숙소의 입구와는 거리가 멀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함박웃음 지은 채 자신에게 달려오는 바트를 얼떨떨하게 올려다보았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