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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63화 (63/120)

63화.

거리가 환호성으로 진동했다.

무릎을 꿇고 카르파티아의 상징인 휘장을 받는 기사단장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파라디소 기사단의 바트 단장이라…….’

레온하르트는 생각에 잠겼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이제 이름까지 알았으니 더 이상 카르파티아에 볼일은 없었다.

셀린느 쪽으로 곁눈질해 보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하늘에 맺힌 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카르파티아가 처음이라는 게 정말이었다니.’

레온하르트는 어딘가 느껴지는 뭉클한 감정에 셀린느 쪽으로 살짝 다가섰다.

그 순간, 청회색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마워요. 카르파티아, 안 좋아하잖아요.”

“그렇게 티가 났었나.”

레온하르트는 살짝 낭패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는 티 안 냈어요. 그냥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

“예언자의 능력을 여기서 발휘할 필요는 없는데.”

셀린느는 소리 내 웃더니 레온하르트에게로 다가왔다. 헝클어진 머리칼이 레온하르트의 턱을 간질였다.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셀린느가 자신을 올려다보더니, 입을 열어 한마디를 내뱉기까지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이제 돌아갈까요?”

호텔로 돌아가는 길은 축제가 막 시작되었을 때보다 더욱 혼잡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팔을 꼭 부여잡은 채 걸었다. 도저히 혼자서 길을 찾아갈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그랜드 호텔에 도착했을 때, 레온하르트도 셀린느도 피로에 절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쉬지 못했다.

사색이 된 지배인이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레온하르트가 다소 날카롭게 물었다.

“공, 공자님……파,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장님이…….”

“뭐?”

레온하르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지배인을 제치고 들어온 남자는 하늘에 맺힌 상으로 보았던 기사단장이었다.

카르파티아에서 바로 달려왔는지 아직도 어깨엔 자줏빛 휘장이 달려 있었다.

“파라디소의 바트 단장이었나?”

“예.”

바트 단장은 바로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

“그간 공자님을 뵙고 싶었으나, 제 위치가 위치인 터라 한 번도 기회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뽑힌 것도 공자님 덕분이라는 얘기도 들어서…….”

레온하르트는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는 셀린느에 쓴웃음을 지었다.

셀린느는 그날 사냥 대회가 끝나고 피곤한 모양인지 일찍 잠이 들어 전혀 몰랐지만, 대체 누가 카르파티아가 될 것인지는 상당한 논란거리였다.

우두머리 마물을 처치한 건 파라디소 기사단이었지만 가장 많은 마물의 머리를 베어 온 건 기동력을 앞세운 다른 기사단이었던 탓이었다.

파라디소 기사단이 본디 카르파티아의 유력 후보 중 하나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 유력 후보들은 우두머리 마물 하나 꼴랑 벤, 그간 자신들이 무시하던 기사단의 부상에 크게 반발했다.

“우두머리 마물을 기사단이 벤 건 근 십 년 만이지 않나.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감사드리고 싶었습니다.”

“……영광이군. 그래서, 인사만 하러 온 건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바트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트는 조심스럽게 호화로운 소파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채, 말을 시작했다.

“접경지대의 마물들을 이번 기회에 소탕하고 싶습니다. 우두머리 마물들까지도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조금 놀라운 사실이었다.

카르파티아가 된 기사단에겐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숙소, 말, 무기, 훈련장, 심지어는 임무 수행지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한까지.

그리고 대부분의 카르파티아들은 그 혜택을 최대한 궂은일을 피하는 데 사용했다.

“그간 고생했으니, 쉬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저희가 뭘 고생했습니까.”

바트는 씩 웃었다.

“전부 공자님께서 다 하셨죠.”

“그래서, 이번엔 자네들 힘으로 접경지대의 마물을 깡그리 소탕하고 싶다?”

“실은 그게…….”

바트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다른 기사단들도 동원해서 다시 한번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그중에서 실제로 도움이 될 자들은 얼마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공자님께서 도와주신다면 파라디소의 단원 모두가 인생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

레온하르트는 지그시 바트를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치고는 젊은 축에 드는 바트는 많이 긴장한 모양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나 대답을 듣고 싶은 게 있군. 왜 접경지대의 마물들을 해결하고 싶어 하지?”

“……예?”

“자네들은 이미 카르파티아야. 거기서 더 위로 올라갈 것도 없지 않나. 연속해서 카르파티아가 될 수 없다는 것도 알 테고.”

“저희에게 아무런 이득도 안 되는데, 왜 그러냐는 말씀이시군요.”

“그래.”

바트의 굳게 긴장한 입매가 움직였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라고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하게 굳은 바트에게 악수를 청했다.

“충분한 대답이군. 일정을 정한다면, 대신 리카르도 전하께 지원을 요청하겠다.”

“감사드립니다.”

바트 기사단장이 돌아가고 난 후, 레온하르트는 어두운 낯빛으로 셀린느에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게 되었군.”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해야 할 일인데.”

“……네 저주를 푸는 게 미뤄지게 되지 않았나.”

“괜찮아요. 지금은 당장 어디를 가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요.”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했다. 진엔딩 루트의 세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이후, 방향을 알려 주는 퀘스트가 없다는 사실에 한동안 방황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진엔딩 루트는 본궤도에 올라 달려가는 열차나 다름없었다. 조만간 다음 퀘스트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자못 심각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예요. 꿈으로도 잘 나타나지를 않아서…….”

“조금도?”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스테이지들에 대해선 어렴풋이 기억나긴 했다.

‘화산 다음은 늪지대, 그다음은 독물 지대였던가……’

여태까지 두 번째를 제외한 스테이지들이 모두 차례로 나타났으므로 다음은 늪지대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화산과 달리 늪은 그녀가 살던 지역에서도 흔해 빠진 게 아니었던가.

“늪 비슷한 게 나오긴 했어요.”

셀린느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대체 어디 있는 늪인지 모르겠어요.”

“늪?”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찾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리긴 하겠군.”

“제법 정도가 아닐걸요.”

셀린느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접경지대 인근에도 하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여태까지 경험상, 자그마한 늪으로 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거대한 늪지대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

“아…….”

셀린느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스테이지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늪지대였다.

스토리상 다음 스테이지인 독물 지대와 이어지는 늪지대기도 했고.

레온하르트의 말처럼, 평범한 늪지대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면 제국에 몇 없지.”

“정말이죠?”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화색을 띤 셀린느를 바라보며 즐거이 말을 이었다.

“그중 하나가 접경지대 근처에 있고.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럼요!”

청회색 눈이 반짝 빛났다.

“……하여, 저와 셀린느 루테, 그리고 이번 카르파티아인 파라디소 기사단 전원을 접경지대로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대답을 긴장하며 기다렸다.

오늘 황태자의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지만, 최근 자신에 대한 태도가 대놓고 냉랭해진 터라 답변을 예측할 수 없었다.

“왜지?”

“예?”

“왜 이 시기에 접경지대로 가느냔 말일세!”

그 순간, 레온하르트는 직감했다.

‘망했다.’

황태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 제국을 돌아다닌다고 보고했을 때도 웃어넘겼네. 그런데 이번 카르파티아까지 보내 달라?”

레온하르트는 그제야 황태자가 분노한 정확한 이유를 깨달았다.

황태자는 레온하르트가 황실의 핵심 병력을 빼내 가겠다는 걸로 받아들인 게 틀림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이게 정확히는 파라디소 기사단의 요청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진노의 불똥이 튀면 입지가 약한 기사단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번 기회에 접경지대의 마물을 완전히 소탕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거야 자네 생각이지.”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하는 대로 하게. 어차피 자네는 그날 이후, 자네 마음대로 하지 않았던가?”

“…….”

“하지만 지원은 단 하나도 해 줄 수 없군. 접경지대까지 마법 없이 가는 덴 한 달이 걸린다지?”

레온하르트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관리했다.

북부는 드넓은 땅과 매년 쌓이는 재물로 유명했으나, 대공을 위해 일하는 마법사만큼은 단 한 명에 불과했다.

칼 루테.

본래도 지나치게 바쁠뿐더러, 그 혼자서 한 번에 많은 사람을 옮겼다간 며칠을 앓아눕고 말 것이다.

‘가지 말란 소리군.’

레온하르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바트 단장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황실의 권위를 어떻게 제국의 수호자인 레온하르트가 스스로 떨어트린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대충 둘러대자니,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 기사단장의 강직한 눈과 태도를 상기해 보면, 웬만한 핑계에 속아 넘어갈 리가 없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그랜드 호텔로 돌아가 하루 정도는 생각할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황태자 전하가 거부하셨군요.”

“그래.”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어두운 낯빛만 보고도 상황을 눈치챘다.

“왜죠?”

“……모르겠다. 그리고 완전히 거부하신 건 아니다. 단지 지원만 하지 않으시겠다 했으니.”

“하지만 파라디소 기사단은 이제 카르파티아잖아요. 무기나 말, 종자가 문제가 안 될 건데요.”

“이동이 문제지.”

“아……!”

셀린느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냥 대회를 위해 접경지대로 이동할 당시, 모든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법사들이 마법을 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보진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마력의 흐름에 휩싸이며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할 때 느낀 경탄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래도, 그때보다 훨씬 규모가 작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요?”

“마법사가 없잖나.”

“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수십 명을 한 번에 옮길 정도로 이동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가 없다는 말이다.”

“해 볼게요.”

“……?”

“대신, 정확도는 좀 떨어질 거에요.”

“할 수만 있다면 상관이 없지. 그런데 칼 루테에게서 이동 마법은 못 배우지 않았나?”

“이론 정도는 알아요.”

셀린느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동 마법은 준비에만 며칠이 걸리고, 최상등품 마력석이 필요해 여태까지 실제로 펼쳐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고 망설이면 되는 일은 하나도 없기 마련이다.

“이론이라니…… 게다가 대규모 단위의 이동은 훨씬 어렵지 않겠나.”

“연습해 봐야죠.”

“어떻게?”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하며 되물었다. 사람 한두 명을 이동시키는 게 아니다.

대체 어디서 그 정도 규모의 인원을 단지 마법 연습을 위해 구한다는 말인가.

셀린느는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사자들로 하는 게 제일 간단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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