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셀린느는 물에 빠트린 물감 덩어리처럼 퍼져 나가는 기사들을 내려다보았다.
‘영화 같아…….’
하지만 감상적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는 낌새를 눈치챌 수 없었던 마물들이 나타나 기사들에게 엉겨 붙었기 때문이었다.
‘……?’
마물에 접근하기 전 반드시 블랙에서 내렸던 레온하르트와는 달리, 기사들은 말에 탄 채로 싸웠다.
순식간에 마물들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왜 말들이 멈추지 않죠?”
“수가 많으니까.”
레온하르트는 여상한 일처럼 대답했다.
“스물 이상이었던가…… 그 정도 모이면 훈련으로 극복할 수 있다더군.”
셀린느는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전투를 관찰했다. 마물들은 기사들의 투구 하나 건드리지 못한 채 말의 다리만 긁으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얼마간 후.
셀린느는 자욱한 흙먼지와 마물과 기사들의 뒤엉킨 덩어리 속에서 특이한 기사단을 발견했다.
“저긴…… 내려서 싸우네요?”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셀린느의 손끝을 따라갔다. 회색 바탕에 야자수가 새겨진 칙칙한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나지막한 탄성이 완고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좋은 말이 아깝다는 걸 아는 모양이군.”
그제야 셀린느는 땅에 엎어지는 마물들과 함께 말들도 쓰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저 말들은…….”
“소모품 취급이지.”
언짢게 대답하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은 말들을 안전히 대피시킨 후 맨몸으로 싸우는 기사단에 못 박혀 있었다.
‘저긴 어디지?’
여태까지 한 번도 함께 임무를 수행해 본 적이 없는 기사단이었다.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기사단의 문양을 위풍당당하게 휘날려야 할 깃발은 낡아 빠졌고, 그들 중 가장 나은 축인 단장의 갑옷조차 초라했다.
안전한 곳에 대피한 말들조차 준마라고 부르기엔 한참 부족해 보였다.
‘뒷배경이 없는 모양이군.’
레온하르트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기사단은 매번 달라졌고, 황태자가 매 임무에서 레온하르트와 함께할 기사단을 결정했다.
황태자의 눈에 들지 못한 기사단에게 실적을 올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갑자기, 셀린느가 옆에서 숨을 들이켰다.
“우두머리……!”
거대한 우두머리 마물이 숲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나 빨리 나올 줄이야.’
접경지대의 우두머리 마물은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로 악명이 높았다.
사실 대회를 빙자한 이번 작전에서도 우두머리 마물은 경우의 수에 넣지 않았다.
그 수족을 모두 잘라 버려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도에 만족하려 한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당장 내려갈 채비를 했다.
황실 소속 중 유일하게 분별력 있는 기사단을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요.”
셀린느는 어리둥절해하는 레온하르트의 팔을 잡아끌며 가로막았다.
“저길 봐요.”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구닥다리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우두머리 마물을 공격하고 있었다.
단순히 개개인의 기량을 뽐내며 마물을 베던 때와는 달랐다.
두 줄로 우두머리 마물을 에워싸는가 했더니, V 자 대형으로 가장 실력이 출중한 기사를 내세워 마물의 급소를 노렸다.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기사단은 곧바로 세 명을 앞세운 대형으로 변했다.
우두머리 마물은 이 기사들이 여태껏 봐 온 조무래기들과 다르다는 점을 눈치챈 듯했다.
육중한 몸을 뒤뚱거리며 수십 개의 발을 길게 늘여 기사들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기사들은 순식간에 원형 대형을 이루어 빠른 속도로 한 명씩 돌아가며 우두머리 마물을 공격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음에도 안정감이 느껴졌다.
“……대단하군.”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드문 칭찬이 흘러나왔다. 그는 빼내었던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자신이 가 보았자 방해만 될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조무래기 마물들은 모두 검은 피를 흩뿌리며 흙과 함께 뒹굴었다.
아직도 땀을 흘리며 마물과 맞서는 기사단은 단 하나였다.
촌스러운 문양의 깃발을 휘날리는, 초라한 기사단.
천을 훌쩍 넘은 눈들이 우두머리 마물과 혈투를 벌이는 기사단을 주시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날카롭게 빛나는 눈은 황태자의 것이었다.
마침내, 우두머리 마물은 검은 피를 쏟아 내며 흙바닥에 쓰러졌다.
셀린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우승자네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감정이 천천히 차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멍하니 중얼거렸다.
“황실에 저런 자들도 있었단 말이지.”
“다행이네요.”
셀린느는 싱긋 웃었다.
기사단이 오직 본인들의 힘으로 우두머리 마물을 처치했다는 건 레온하르트의 부담이 줄어든다는 뜻이었다.
“카르파티아, 참석해요?”
“내가?”
레온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카르파티아를 공식적으로 뽑는 건 리카르도 전하시지. 내가 할 일은 없다. 그러니 자유…….”
“구경해도 되나요?”
“……?”
레온하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셀린느는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저분들이 카르파티아가 되는 걸 보고 싶어서요.”
“네가 그렇다면야.”
레온하르트는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에게 카르파티아는 번잡한 축제일 뿐이었으나, 셀린느가 구경하고 싶어 한다면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었다.
***
축제가 열리는 거리에 도착한 셀린느는 한껏 들뜬 얼굴로 레온하르트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길 잘했군.’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두건을 뒤집어쓴 레온하르트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셀린느는 시끌벅적한 카르파티아 축제의 소음이 들려올 즈음부터 표정이 부쩍 밝아졌다.
그간 레온하르트에게 축제란 번잡스러운 공간에 불과했다.
“사람이 많네요.”
“사람이 많은 걸…… 좋아했나?”
“아뇨. 하지만 축제잖아요!”
셀린느가 이렇게 들뜬 건 마력석의 마력을 흡수하며 발현한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녀는 인파에 떠밀리듯 천천히 이동하며 쉬지 않고 사방을 살폈다.
열 개의 공을 동시에 돌리는 곡예사 앞에서 손뼉 치며 감탄했고, 시시각각 모양을 바꾸는 그림자 공연을 손 모양으로 따라 하기도 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런 셀린느를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축제를 좋아했다니.’
연회는 그다지 반기지 않는 셀린느의 성격상 축제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속으로 전 제국의 유명한 축제들을 헤아리는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갑자기, 주위를 살피기만 하던 셀린느가 멈춰 섰다. 주전부리를 한가득 올려놓은 매대 앞이었다.
설탕을 몇 겹 덮은 자그마한 과일들, 색색깔의 물을 들여 알록달록한 설탕 과자들, 견과류와 함께 굳혀 오드득 씹히는 젤리들…….
셀린느가 이 세계에서 숱하게 먹어 온 정교하고 예쁘장한 디저트에 비하면 투박한 설탕 덩어리였다.
하지만 셀린느의 눈은 가판대 위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돈이…….’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셀린느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돈을 받은 적도, 돈을 써 본 적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셀린느든, 레온하르트든 실제로 푼돈을 사용해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마법사로 발현했을 때 대공에게 받은 선물조차 실제 화폐와는 거리가 먼 보석과 마력석이었다.
게임 내에서의 화폐는 마력석이었으나, 이 세계에서 실제로 쓰이는 화폐는 확연히 다르리라.
‘여기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네, 나…….’
셀린느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기가 무섭게 레온하르트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 다 조금씩 주게.”
“예, 나리!”
레온하르트는 금화 한 개에 대한 거스름돈을 치르기 위해 현금을 가득 꺼내 세기 시작하는 상인을 만류했다.
잠시 후.
셀린느는 행복한 표정으로 군것질거리로 가득한 종이봉투를 품에 소중히 안은 채 하나씩 꺼내먹었다.
정확히 기대했던 맛 그대로였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듯한 강렬한 단맛.
레온하르트에게도 권했지만, 살짝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길래 마음껏 먹는 중이었다.
“앗……!”
셀린느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뒷모습조차 금세 사라진 누군가가 그녀를 세차게 치고 지나간 탓이었다.
다행히 군것질거리들은 쏟아지지 않았지만, 부딪친 어깨는 제법 얼얼했다.
레온하르트가 곧바로 반응했다.
“괜찮은가?”
“아, 조금 아프긴 해요.”
셀린느는 봉투를 꼭 쥔 채 왼쪽 어깨를 문질렀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좀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는 게 낫겠군.”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들은 축제가 열린 거리의 절반 이상을 지나와 있었다.
손도 끈적거려 인적이 드문 곳에 가면 마법으로 물을 만들어 내 씻을 생각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빠른 속도로 인파를 빠져나와 으슥한 골목에 접어들었다.
“카르파티아는 어디서 발표해요?”
셀린느는 손을 씻으며 물었다.
골목의 대부분을 둘러보았으나 황태자가 카르파티아라는 칭호를 수여할 만한 무대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들어 본 적도 없는 모양이군.”
레온하르트는 놀란 표정이었다.
“당연히 기사단장들과 리카르도 전하는 궁에 계시지. 황실 마법사들이 그 모습을 이곳 하늘에 맺히게 해서 보여 줄 거야.”
셀린느는 피식 튀어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거대한 빔 프로젝터가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칼 루테는 빛 속성 마법에 능통하지 않아 모를 수도 있지만, 고도로 숙달된 빛 속성 마법은…….”
“알아요.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상을 전달하겠죠.”
“그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나름 장관이라고 하더군.”
원래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황태자 궁으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신에게 적대감을 표출한 황태자의 눈앞에 셀린느를 데려다 놓는 것만큼 바보짓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반 축제가 열리는 카르파티아로 선회했다.
‘황태자 궁으로 갔으면 큰일 날 뻔했겠어.’
레온하르트는 벌써 마법을 기대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는 셀린느를 바라보며 안도했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곧 시작할 것 같군.”
겨울의 낮은 짧아, 벌써 해가 하늘을 진홍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청회색 눈이 몇 차례 반짝거리기가 무섭게 그들이 이곳에 온 본 목적이 시작되었다.
해가 완전히 져 푸른 기운이 감도는 잿빛 하늘에 서서히 상이 맺혔다.
셀린느는 황태자 궁의 화려한 인테리어를 알아보았다.
황태자와 기사단장들은 그들이 황태자의 측근들을 검사했던 연회장에 서 있었다.
‘엄청 선명하네?’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하늘에 맺힌 상은 고화질 영상처럼 선명했다.
잠시 후, 셀린느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움찔거렸다.
빛으론 상만 맺히게 할 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자는 위풍당당한 기세로 입을 뻐끔거렸다.
“근래 카르파티아 중 가장 강력한 카르파티아를 보게 되어 기쁘다고 하시는군.”
“입 모양도 읽을 줄 알아요?”
“유용해서.”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수 초 후.
홀로 투박한 갑옷을 입은 기사단장이 천천히 황태자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