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함정으로 걸어 들어간 게 아니라서.”
“아.”
셀린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거다.”
“레온하르트가 걱정할 것 없어요. 이제 반동도 풀렸으니까…….”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말을 끊었다.
“내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 점이다. 반동이 풀려서, 네가 너무 무모해질까 봐.”
셀린느는 자신은 원래 무모했으며, 반동이 걸리기 전으로 되돌아갔을 뿐이라고 얘기하려 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조금 더 빨랐다.
“널 탓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단지.”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걱정될 뿐이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셀린느는 바다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앞으로도 무모하게 행동할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
만약 레온하르트가 앞으론 무모한 짓을 그만두라고 했다면 셀린느는 그럴 수 없다고 맞섰을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걱정엔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괜한 소리를 했군. 잊어다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조심할게요. 정말로. 약속할게요.”
레온하르트의 눈에 담긴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입매는 조금 누그러졌다.
“다행이군.”
***
“카르파티아라는 거…… 왜 레온하르트가 주관해요?”
셀린느는 예전에 묵었을 때보다도 훨씬 호화로워진 그랜드 호텔의 조식을 먹으며 물었다.
지난밤 내내 생각해 보아도 레온하르트가 황실 소속 기사단들의 평가를 주관해야 할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마물이나 흑마법과 관련된 임무를 총괄하는 황태자나 황제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레온하르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연하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기사단과 아무런 관련이 없잖아요.”
“상관이 없진 않아.”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칙적으론 내 수족 같은 존재니까. 내 손발을 내가 직접 관리하는 건 당연하지.”
셀린느는 수족치곤 하는 일이 참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필요한 질문만을 던졌다.
“레온하르트 전에는요?”
“전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없었잖나.”
셀린느의 머리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레온하르트 같은 사람이 뭐죠?”
“그게…… 모르나?”
레온하르트는 당황하다 잼을 잔뜩 바른 흰 빵을 떨어트릴 뻔했다.
셀린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군.”
레온하르트는 조금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내 오만일 수도 있겠어.”
그는 아침 햇살이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나이프를 노려보았다.
카르파티아를 모른다는 데서 예상은 했지만, 셀린느는 기이할 정도로 아무것도 몰랐다.
흠집이 될 만한 사실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이젠 너무나 중요해진 사람에게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해졌을 뿐이었다.
“엘머 남작의 아들, 기억하나?”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녀는 어둠 속에서 울리던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도 그런 경우였다.”
“……!”
“내가 태어났을 때, 전 제국의 예언자가 입을 모아 북부를 멸망시킬 운명을 지녔다고 했다.”
청회색 눈이 아주 커지더니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 말을 무시하셨다. 대신, 내가 마력을 지녔다는 사실을 발견하자마자 마법은 삿된 것이니 멀리하라고 가르치셨지.”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뱉었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그다지 순종적인 자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을 대놓고 거스를 만한 용기도 없었다.”
어린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물이 마법을 쓰게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돌멩이나 나무는 너무 약해 마력을 제대로 담지도 못하고 부스러졌다.
레온하르트가 찾아낸 건 금속이었다.
그중에서도, 검.
“내가 마검사가 된 건 소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었어.”
본연의 마력을 억누르고 무기체를 매개로 하여 마법을 쓴다는 건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역사에 마지막으로 기록된 마검사는 삼백여 년 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 병기였다.
당시 마검사를 만들기 위해 반강제로 투입된 마력을 지닌 어린아이는 모두 천여 명.
그중 단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당시 레온하르트는 단지 신기한 놀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만의 작은 비밀이라고 생각했지만 곧 들키고 말았지. 그것도 리카르도 전하의 면전에서.”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필 그 능구렁이 같은 황태자가……!
“그때, 몇 살이었어요?”
“열 번째 생일날.”
“…….”
셀린느는 할 말을 잃었다.
황태자가 쓰레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열 살짜리에게 마물 베는 훈련을 시킬 정도로 비인간적인 쓰레기일 줄이야.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흑마법사를 처음으로 벤 건 열다섯이었으니까. 리카르도 전하가 그 정도로 잔인한 분은 아니야.”
“훈련은 그 전부터 받았잖아요!”
셀린느는 어이가 없어 소리쳤다.
“게다가, 열다섯도 어린 나이 아닌가요?”
열다섯, 기껏해야 중학생일 나이. 셀린느는 흑마법사를 죽이는 데 처음으로 일조했을 때 휘몰아쳤던 감정들을 기억했다.
이 세상이든 저 세상이든, 그 어떤 열다섯도 겪어서는 안 될 감정이었다.
“어리긴 했지. 그만큼 부족하기도 했고.”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회한이 서려 있었다.
“어쨌든 내가 역사서 속 마검사처럼 손쉽게 흑마법사를 벨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던 날, 모든 황실 직속 기사단은 비공식적으로 내 휘하가 되었다.”
“……공식적이 아니라요?”
“공식적으로 난 아무것도 아니지.”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황실의 모든 기사단은 내가 소집하면 언제든 달려와야 해. 당연히 카르파티아도 내 소관이고.”
셀린느는 찡그렸다.
레온하르트가 쥐고 있는 권한은 설명만 들으면 무척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여태까지 황실 기사단들이 레온하르트에게 도움이 되었던 적이 있긴 있단 말인가?
“하는 일이…… 있긴 한가요?”
“아니.”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숨으려고만 하길래, 거추장스러우니 차라리 쉬고나 있으라고 한 지 오래다.”
“그럼, 이번에는 왜…….”
“도저히 못 참겠더군.”
셀린느는 아가티르수스에서 만난 기사단장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해요.”
“그리고…….”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렸다.
“네가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까.”
셀린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는 괜찮아요. 덕분에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서도 묵어 보고요. 호텔 측에서 가슴 쓸어내렸겠는걸요.”
“네가 만족한다면야 다행이지만.”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워 보였다.
“원래는 사냥 대회가 아니었다면, 뭐였어요?”
“적당히 실적별로 점수를 매겨 리카르도 전하께 올렸다. 그럼 전하께서 뽑으셨지.”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엔 죽기 일보 직전까지 굴려 버려요.”
“별소리 안 해도 본인들이 그렇게 하겠지. 카르파티아가 된다는 건 엄청난 명예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사냥 대회를 반대하시면 어떡하죠?”
“오히려 환영하실걸. 마물만 많이 처치하면 뭘 하든 상관이 없는 분이시니.”
***
“단장님, 그게 무슨 소립니까?”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원들은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다들 귀가 먹었나? 이번 카르파티아는 사냥 대회로 결정한다.”
순식간에 훈련장은 귀가 떠나갈 정도의 소음으로 시끌벅적해졌다.
“사냥 대회라니요?”
“고라니라도 잡아 오라는 말입니까?”
“바보야, 마물이겠지.”
“마물을 잡는 게 우리 일인데, 대회가 말이 됩니까?”
대다수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씩 던졌다.
“공자님 결정이라더군.”
파라디소 기사단의 단장, 바트가 한숨을 폭폭 내쉬며 설명했다.
“공국과의 접경지대 있지 않나. 대회라는 명목으로 마물 무리를 하나씩 소탕하실 계획인가 봐.”
기사단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공국과의 접경지대에 둥지를 튼 마물 무리들은 오랜 골칫덩어리였지만, 주 피해는 공국민들이 보았기 때문에 제국은 계속해서 궤멸을 미뤄 왔다.
“만만치 않을 텐데요.”
“기사단들이 모두 동원되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
바트는 웅성임과 함께 단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딱 잘라 차단했다.
“그간 궤멸이 미루어졌을 뿐, 방치된 건 아니잖나. 우두머리 마물은 모두 넷. 최악의 경우 공자님께서 나설 거라고 하달받았다.”
“……대회 우승이라도 노리신답니까?”
“당연히 아니지.”
바트는 씩 웃었다.
“그럼, 저희에겐 기회일 수도 있겠군요.”
단원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파라디소 기사단은 근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카르파티아가 된 적이 없었다.
“그래.”
바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변덕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동안 카르파티아는 이름만 카르파티아지 않았나. 모든 일은 공자님께서 하셨으니.”
“그건 제가 들은 게 있습니다.”
한 명이 의기양양하게 나섰다.
“북부에서 한창 연회를 즐기던 공자님을 갑자기 불러들였다고 하더군요. 근데 공자님께서 와 보니 단순한 껍데기라, 역정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하.”
곳곳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는 아무리 위험한 임무도 군말 없이 나섰지만, 껍데기에 속아 호출되는 것만큼은 극도로 싫어했다.
3년 전, 베르누이 대공이 역정을 내며 황도에 있던 모든 가솔을 데리고 북부로 떠나 버린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그 껍데기에 지레 겁 집어먹고 흑마법사라 보고한 멍청이들이 누구지?”
“호프슨네 애들.”
훈련장은 명백한 비웃음으로 시끌벅적해졌다.
“내가 거기 소속이었으면 지금쯤 혀 깨물고 뒤졌지.”
바트는 조소한 후,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그러니, 이번엔 우리도 잘해 보자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기회니까.”
파라디소 기사단은 근래 들어 가장 활기찬 태도로 훈련을 시작했다.
기사단의 문양인 야자수가 그려진 회색 깃발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게 휘날렸다.
나흘 후.
카르파티아를 결정지을 사냥 대회가 막을 올렸다.
근위대를 제외한 모든 황실 소속 기사단들이 모인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셀린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질서 있게 정렬한 기사들과 각 기사단별로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았다.
이 인원들을 나흘 만에 접경지대에 결집시키기 위해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고 했다.
“멋있네요…….”
그들은 접경지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서 있었다.
사냥 대회의 공식 주최자 역시 황태자이니 레온하르트가 면전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레온하르트는 비상 상황이 발생할 경우 즉시 눈치챌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알맞은 높이의 절벽을 찾아 셀린느와 함께 아래를 주시했다.
마법으로 증폭시킨 황태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출중한 실력을 보여 준 기사단이 카르파티아가 될 것이다.”
황태자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구라도 여기서 목숨을 잃으면 그 기사단은 자격을 박탈할 터이니, 모두 목숨 아까운 줄은 알면서 다니게.”
셀린느는 물끄러미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의 생각이죠?”
“그래.”
레온하르트는 순순히 인정했다.
“저런 조항이라도 안 걸면 뒷배경 없는 만만한 부하 하나를 산 제물로 집어넣을 단장이 많을 거다.”
잠시 후, 황태자가 기사단별로 맡은 구역을 모두 나열했다.
수천 마리의 말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