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기사들은 레온하르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사를 중얼거리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셀린느는 기사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이후, 조용히 물었다.
“왜 같이 가려고 했을까요?”
“뻔하지. 승진 심사라도 예정되어 있는 모양이야.”
공을 세우기 위해 기사단 전체를 사지로 몰고 가는 간덩이 부은 기사단장이 저자가 처음은 아니었고 마지막도 아니었다.
“폐하의 명이라던데…….”
“폐하께선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와라, 뭐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
“아.”
셀린느는 공작새처럼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기사단장을 떠올렸다.
“그리고 폐하께선 북부에 생색을 내시는 거고. 무려 직속 기사단까지 보내 주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렇군요…….”
이 세계에 대해 알면 알수록, 레온하르트가 흑화한 원인은 무능한 황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들은 곧 죽은 흑마법사의 근거지였던 동굴에 도착했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네.’
채석장과 동굴은 그들이 흑마법사를 처치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외부인의 출입을 막는 그 어떤 장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원래는 마법으로 막아 뒀어야 하는데.”
레온하르트가 언짢아하며 중얼거렸다.
“설마 누가 들어가리라 생각을 못 했나 봐요.”
“다른 흑마법사들이 이곳에 살던 흑마법사의 연구 자료들을 찾으러 올 테니, 동굴째 불살라 버리라고 알려 주었다.”
셀린느는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떠먹여 줘도 못 받아먹다니.”
“짐작은 간다. 마법으로 봉인하면 사실 흑마법사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또 흑마법사에게 점령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 멍청한 판단이었다.”
레온하르트가 동의했다.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다는 건 이해는 간다만 화는 나는군.”
“그럴 만해요.”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관계가 없는 그녀 자신조차 화가 날 정도인데, 레온하르트는 오죽할까.
그들은 천천히 동굴 내부를 탐색했다.
‘……많이 달라졌구나.’
셀린느는 조금 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이 동굴은 그야말로 평범한 동굴이었다.
벽면을 벌레들이 조금씩 기어갔고, 군데군데 물이끼가 끼어 생명이 느껴졌다.
흑마법사가 근거지로 삼던 시절에는 조금도 볼 수가 없었던 모습이었다.
“새로운 흑마법사가 이곳을 근거지로 삼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정확한데?”
옥구슬이 굴러가는 것처럼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품속에서 링조르를 빼 들었다.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흑마법사가 동굴 깊숙한 곳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건 밑으로 반쯤 드러난 입이 호선을 그렸다.
다음 순간, 라쉬르가 푸르게 빛나는 포물선을 그리더니 흑마법사의 몸은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부딪쳤다.
“또 이건가.”
레온하르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반으로 갈라진 흑마법사의 몸은 단면을 내보이며 너부러져 있을 뿐, 검은 피 한 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뭐죠……?”
“분신이다. 이것들의 흔한 술수 중 하나지.”
“분신이면, 환영 같은 게…….”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껍데기라고 생각해라. 약해 빠졌지만 모습은 그럴듯하지. 방금 보았다시피.”
“어떻게 구분하죠?”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껍데기들이 덜 사악하거든. 느끼지 않았나?”
“……아.”
셀린느는 그제야 흑마법사 근처라면 느껴져야 할 사악한 기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분은 쉽군요.”
“그래. 흑마법을 쓰지 못하면서 나 흑마법사요, 하는 것들은 다 껍데기라고 보면 된다.”
레온하르트는 짜증스럽게 등을 돌렸다.
“새로운 흑마법사의 흔적이라곤 이것뿐인 걸 보니 단순한 정탐이었나 보군. 나가지.”
“정말 이게 단가요?”
셀린느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잠시 쉬지도 못하고 황도까지 내려왔다.
“그래.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 볼 만한 인물이 황도에는 한 명도 없는 모양이야.”
레온하르트는 동굴 밖으로 성큼 걸어나갔다.
“평소에 이런 적이 많았나요?”
“많았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지금보다 훨씬 사소한 일로 북부에서 남부 국경 지대까지 가야 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화 안 냈어요?”
“그때는 어려서 못 냈고, 지금이라면 냈겠지. 아까도 그렇지 않나.”
셀린느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지금도 크게 화는 안 내는 것 같아요.”
“그런가?”
레온하르트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얼마간 후.
그들은 힘이 빠진 걸음으로 채석장을 건너 협곡에 도달했다.
셀린느는 눈을 비볐다.
아가티르수스로 들어서기 전, 레온하르트가 거칠게 쫓아 보냈던 기사단이 협곡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들은 또 왜 여기에 있지? 일단 임무는 끝났다. 껍데기였으니 회수하려면 회수하도록.”
“……?”
셀린느는 다시금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아.’
문양이 아주 조금 다른 걸 보니, 조금 전의 기사단과는 다른 기사단인 모양이었다.
“공자님.”
조금 전의 기사단장 못지않게 화려한 투구를 쓴 기사단장이 말에서 내렸다.
“역시 공자님이군요. 신속한 해결 축하드립니다. 이다음엔 어디에 가십니까? 제 생각엔, 국경 지대가…….”
“당분간 쉴 생각이었다.”
“예?”
기사단장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여길 파괴한 것만으로도 쉴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마물도 훨씬 줄지 않았나.”
“하,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무심한 듯 기사단장을 바라보았지만, 그 눈엔 불꽃이 튀었다.
“황도 마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가티르수스를 파괴했다. 잠시 쉴 여유마저 주지 않는단 말인가? 농민들조차 농번기가 지나면 쉬네!”
“공, 공자님…….”
기사단장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입을 다물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카르파티아가 있단 말입니다!”
셀린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의 입에선 이제야 알겠다는 듯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하.”
“죄송합니다.”
기사단장은 뜻 모를 사과를 중얼거렸다.
“그런 거였군. 이름이 뭐였지?”
“호프슨입니다.”
“호프슨, 그럼 이렇게 하지.”
레온하르트는 바짝 긴장한 기사들을 잠시 뜸을 들이며 훑어보았다.
“이번 카르파티아는 사냥 대회로 결정한다.”
“예……?”
“어차피 웬만한 마물과 흑마법사들은 내가 처리하지 않나. 옆에서 따라다니며 공적을 올린다 한들, 그게 정당한 승리인가?”
“…….”
호프슨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대꾸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와 함께 블랙에 올라탔다.
“다른 단장들에게도 알리도록.”
“예!”
셀린느가 질문을 쏟아 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체 카르파티아가 뭐죠?”
레온하르트는 잠시 멈칫했다. 카르파티아는 황도민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행사였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나?”
“뭐를요?”
“카르파티아.”
“아, 아! 네. 이름만 좀 듣고…….”
레온하르트는 조금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카르파티아는 마물 퇴치에 고생하는 기사단들을 치하하기 위한 행사다. 3년에 한 번씩, 그간의 공적을 모아 카르파티아의 칭호를 달 수 있는 기사단을 뽑지.”
“그럼, 저자들은…….”
“어지간히 명예로운 자리거든.”
레온하르트는 명백히 비꼬는 목소리였다.
“적어도 내가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고 하더군.”
“지금은 아니군요.”
“지금이야 뭐, 서류 작업에 능하고 눈치가 빠른 자의 자리에 가깝지.”
셀린느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계가 바뀌고 차원이 바뀌어도 사람만큼은 바뀌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냥 대회라니요?”
“여태까지는 참아 왔는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군. 가장 실력 있는 자가 카르파티아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단단히 붙들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흑마법사와 마물은 내가 거의 다 베어 왔으니 실적은 고만고만할 테니까.”
“……마물 사냥인가요.”
“당연하지. 실력을 겨루기 위해 눈토끼 사냥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마물을 풀어놓기라도 하나요?”
레온하르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럴 리가. 황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마물이 득실거리니, 하나씩 보내 공을 볼 생각이야.”
“그럼 레온하르트도…….”
“당연히 나도 항상 대기하고 있어야겠지. 하루니 네 저주를 푸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셀린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방향을 알려 줄 퀘스트가 없어 황도까지 오는 마차를 타는 내내 고민만 하고 있었다.
게다가 다음 스테이지는 늪.
이 드넓은 제국에 늪이 수도 없이 많을 거라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셀린느는 머리를 흔들어 불안한 감정을 떨쳐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레온하르트가 카르파티아에 일종의 참관인으로 참여함으로써 셀린느는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황도에는 자료도 많을 테니, 게임 속에서 본 늪지대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상당한 시간을 말을 달려 호텔에 도달했다.
이제 셀린느의 얼굴을 확실히 외운 지배인이 그들을 맞이했다.
“공자님, 루테.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고맙군.”
셀린느는 그들이 항상 묵던 객실에 들어가자마자 입이 벌어졌다.
‘이게 다 뭐지……?’
이 한겨울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궁금한 싱싱한 꽃이 사방에 가득했고 값비싼 장식품들이 눈길이 닿는 곳마다 자태를 뽐냈다.
장식만 보자면 베르누이성에 있는 레온하르트의 침실보다 수십 배는 더 화려했다.
셀린느는 유난히 발이 쑥 들어가는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비로운 은빛 털가죽이 바닥에 한가득 깔려 있었다.
“바다여우로군.”
레온하르트조차 반은 경탄하고, 반은 질린 듯한 반응이었다.
“희귀한가요?”
“그래. 여기 깔린 것을 전부 합하면…… 이 호텔을 사고도 남겠는데.”
“…….”
셀린느는 여기 깔린 털가죽 때문에 바다여우라는 희귀한 동물이 멸종하는 게 아닐지 하는 죄책감이 들어 서둘러 발을 뗐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당연히 예전에도 화려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갑자기는 아니지. 아가티르수스일 테니까.”
“아……!”
그제야 상황이 대략 추측이 갔다.
그들은 아가티르수스를 파괴하자마자 황실 연회에 참석했다.
당연히 그랜드 호텔은 그들이 제법 오래 황도에 머무르리라 생각하고 황실 연회가 진행되는 동안 인테리어를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황실 연회에서 바로 남부로 떠나 버렸다.
‘이렇게 늦게나마 보게 된 게 호텔로선 다행인데.’
만약 그들이 영영 그랜드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 사치스러운 방은 대공 부부가 드문 수도 나들이를 할 때까지 먼지만 쌓여 갔을 것이다.
“다행이군.”
“호텔이요?”
하루 종일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생각이 닮아 가는 모양인지, 레온하르트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셀린느의 추측은 온전히 빗나갔다.
“호텔이라니?”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셀린느에게로 다가왔다.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