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말도 안 돼…….”
셀린느는 넋을 놓은 채 중얼거렸다.
평범한 게임으로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나, 실제 셀린느로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을 때나 결과는 같았다.
음악이 귓가에 울려 퍼졌고 클리어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텅 빈 상자가 모든 과정이 어그러졌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빈 상자를 보자마자 대충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그 약이 없어서 그런가?”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힐링 포션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꿈이랑, 달라요.”
“네 꿈은 틀린 적도 많지 않나.”
“아뇨. 이건…… 규칙이었는데.”
“규칙?”
레온하르트는 의아해하는 목소리였지만 도저히 둘러대면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생각해 내야 했다.
‘안 그러면, 다음 스테이지에서도 클리어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으니까.’
당장 이번 스테이지는 저번 스테이지의 클리어 보상으로 받은 ‘헤르메스의 신발’이 없었다면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게임에 답이 있을 거야. 생각해 내!’
셀린느는 머리를 쥐어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비슷한 상황이 하나 떠올랐다.
‘……설마.’
[셀린느의 악몽]에서 클리어 보상이 지급되지 않은 경우가 단 하나, 있기는 있었다.
정상적인 플레이에서는 결코 볼 수 없어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았던 경우.
‘치트 키…….’
난이도가 극악을 달리는 [셀린느의 악몽]엔 영어 단어 몇 개만 두드리면 과정을 모두 생략하고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는 치트 키가 있었다.
하지만 수십, 수백 번을 죽어 도저히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없는 사람조차 치트 키를 쓰는 걸 주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셀린느의 악몽]의 제작진은, 치트 키로 클리어한 스테이지에선 보상을 얻을 수 없게 만들었다.
페널티를 주고 싶다나 뭐라나.
‘설마.’
셀린느는 걱정스럽게 자신을 살피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실제 게임상 치트 키는 영단어였다. 게임상 캐릭터는 아니었고, 게임의 악역은 더더욱 아니었다.
‘잠깐만.’
셀린느는 유저들 사이에 유명해 굳이 쓰지 않은 사람도 모를 수가 없는 치트 키를 떠올렸다.
The Wolf.
“……레온하르트, 물어볼 게 있어요.”
“뭐지?”
레온하르트는 지금 이 상황에서 대체 자신에게 궁금한 게 뭐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혹시, 레온하르트에게 늑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요?”
“……무슨 소리지?”
“아, 아니면 괜찮아요. 미안해요.”
레온하르트는 횡설수설하는 셀린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북부의 늑대라 불렸다. 나를 특별히 늑대라 부르는 사람이 없진 않지.”
“아…….”
셀린느는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정말로, 레온하르트가 치트 키였다.
***
내려오는 길은 맥이 빠질 정도로 평범한 등산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처음 말에서 내렸던 장소에 도착했다.
“당분간 푹 쉬는 게 좋겠군.”
셀린느는 블랙에 올라타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까지 클리어한 스테이지는 오늘에 비하면 아이들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근처 백작령에서 일주일 정도 휴양한 다음 셀린느가 꿈속에서 본 장소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백작령에서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말에서 내리자마자 황실의 문양을 몸에 두른 전령이 레온하르트에게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곧바로 딱딱하게 굳었다.
“무슨 일인가.”
“저도 모릅니다. 폐하께선 단지 이것을 공자께 직접 전하라 하셨습니다.”
전령은 레온하르트에게 둘둘 말린 양피지를 건넸다.
‘……폐하께서?’
레온하르트는 놀란 기색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양피지를 폈다.
북부는 기본적으로 황태자 관할이었기 때문에 황제에게서 내려오는 명은 모두 심상치가 않았다.
“언제까지 올라오라고 하셨나.”
“이걸 받는 대로, 당장 올라오라고 하라…… 라고 하셨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양피지를 주머니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알았다.”
셀린느는 수도로 올라가는 마차 안에서 피곤한지 반쯤 졸기 시작한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레온하르트가 치트 키였다니.’
여태까지 클리어 보상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지극히 운이 좋아서였으리라.
‘아니, 내가 레온하르트를 의식적으로 뒤에 떼어 두어서야.’
광산에서도 레온하르트와 의문의 그림자가 맞서 싸우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클리어 보상을 얻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을 듣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셀린느는 고개를 숙여 ‘헤르메스의 신발’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클리어 보상을 포기할 순 없어.’
이번에 놓친 보상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음 번에도 놓쳤다간 진엔딩을 볼 수 있을지조차 애매해질 것이다.
레온하르트가 치트 키라곤 하나, 실제 게임처럼 전지전능하게 스테이지를 건너뛸 수 있는 치트 키는 아니다.
단지 그녀가 쉽게 해내지 못하는 일을 간단하게 해낼 뿐이다.
‘……그게 치트 키긴 하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클리어 보상을 포기하고 싶지도, 레온하르트를 떼어 두고 그녀 혼자 스테이지에 도전하고 싶지도 않았다.
셀린느는 다음 스테이지를 떠올렸다.
‘늪이랑 독물 지대였지.’
레온하르트의 도움이 없다면 수십 번이고 죽어 나갈 것 같은 곳들이었다.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다.
‘최소한도의 도움만 받으면 되지 않을까. 아냐, 더 이상의 클리어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진엔딩을 못 볼 수도……. 진엔딩도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셀린느가 한참을 생각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할 즈음, 분명 잠든 것 같았던 레온하르트의 눈이 번쩍 떠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지?”
“안 했어요. 레온하르트야말로 자던 거 아니었어요?”
“안 잤는데.”
셀린느는 그럼 자는 척하며 자신을 관찰했느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약 때문에 지금껏 고민 중인 거, 아닌가.”
“……네.”
“신경 쓰지 말도록. 지금도 충분히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간 셀리느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때마다 힐링 포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받아 클리어했기 때문에 클리어 보상을 받을 수 없는 지금, 힐링 포션 또한 극도로 아껴야 하는 자원이 되었다.
셀린느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대체 황제 폐하께선 무슨 명을 내리셨길래, 이렇게 급히 올라가는 거예요?”
“……읽어 봐라. 바로 이해할 수 있을 테니.”
레온하르트는 양피지를 셀린느에게 건네주었다.
“……!”
빠르게 양피지를 읽어 내린 청회색 눈이 크게 떠졌다.
양피지는 짤막하게 아가티르수스에 새로운 흑마법사가 나타났으니, 빨리 올라오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아가티르수스라니…… 전에 살던 흑마법사가 죽으면서 완전히 파괴된 거 아니었어요?”
“아니었던 모양이다.”
레온하르트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분노가 언뜻 엿보였다.
“불이라도 질러 누구도 들어갈 수 없게 해 달라고 했거늘. 흑마법사들이 거점으로 삼는 공간은 다 엇비슷해서, 한 명이 떠나도 금세 다른 한 명이 들어앉는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니.”
“궁금한 게 있어요.”
“뭐지?”
“저들도 아가티르수스에 머물면 레온하르트가 올 거라는 걸 알 거 아녜요. 저라면, 좀 더 안전한 곳을 거점으로 삼을 것 같은데…….”
“나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지.”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 흑마법사를 죽일 수는 없을 거다.”
“……레온하르트가요?”
셀린느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레온하르트가 무언가를 할 수 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한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옮겨 다니는 놈들은 눈치도 빠르고 영리해. 널 납치했던 놈과 비슷한 부류지. 잡으려고 해도 잡히지도 않아.”
청회색 눈이 커졌다.
“같은 흑마법사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
레온하르트는 무언갈 깨달은 듯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군.”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자체가 절 잡기 위한 함정일지도 몰라요.”
“…….”
레온하르트는 부정하고 싶었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셀린느의 추측이 옳았다.
이미 아가티르수스의 노쇠한 흑마법사로 인해 셀린느에 대한 정보가 노련한 흑마법사들에게 퍼졌다.
그 시작이 납치였고.
이것은 셀린느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흑마법사들의 다음 예고장이나 다름없었다.
“조심해야겠어요.”
태연자약한 셀린느를 보는 레온하르트의 속은 타들어 갔다.
“혼자 다녀올 테니, 호텔에 있어라.”
셀린느는 피식 웃었다.
“전 가장 안전한 곳에 있을 거예요.”
“안 된다.”
레온하르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안전한 곳에 있는다는데, 뭐가 문제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 들 테니까.”
“레온하르트 옆이 제일 안전하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요?”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레온하르트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마법은커녕 뒤에 숨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저를 마물 사냥에 데려간 건 레온하르…….”
셀린느는 황급히 입을 닫았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탓,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지금도 레온하르트 곁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하고요.”
마침내 열린 레온하르트의 입에선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셀린느, 넌 내 곁에서 몇 번을 죽었어. 이쯤이면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레온하르트가 없을 땐 백 번이 넘게 죽었잖아요.”
셀린느는 농담 삼아 얘기했지만 딱딱하게 굳은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누그러질 줄을 몰랐다.
“뭐, 정 레온하르트가 원한다면 호텔에 있을 순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 봐요. 베르누이성에 혼자 있다 납치되었는데, 호텔이라고 안전할까요?”
“…….”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
레온하르트는 황도에 도착하자마자 아가티르수스로 달려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들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황제 직속 기사단에게 가로막혔다.
레온하르트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화려한 투구를 쓴 기사단장이 말에서 내렸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제법 실력이 있었기에 평범한 마물 무리 토벌이었다면 반가웠을 것이다.
기사단장은 레온하르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저희들도 같이 가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상대는 흑마법사다. 아까운 목숨들 간수나 해.”
“공자님!”
“자네들은 기본적으로 내 명령을 따라야 하는 줄 알았는데.”
레온하르트는 그 어떤 직책도 없었지만, 제국의 모든 마물 토벌 기사단은 그의 명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레온하르트는 코웃음 쳤다.
“폐하께서 자살하라 명하셨나?”
“아닙니다!”
“그럼, 돌아가도록.”
레온하르트는 더 설명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블랙을 기사단 정중앙으로 몰았다. 기사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길을 비켜 주었다.
“고맙네. 안 비켜 주면 베어 버리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