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휘둥그레진 청회색 눈이 두려움에 흔들렸다.
‘유령이라니.’
셀린느는 처음 베르누이성에 도착했을 때, 레온하르트의 유령에 대한 반응을 떠올렸다.
‘소문 한번 들어 본 적 없다는 둥, 아주 없는 취급을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유령이라니.
“레온하르트, 그게 무슨…….”
“쉿.”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자신의 품속에 숨기듯 끌어당겼다.
온갖 생각이 셀린느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쩌면 레온하르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폐가촌은 [셀린느의 악몽]에서 그녀가 클리어한 스테이지 중 하나였고, 레온하르트보단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뜻대로 그의 품 안에서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빈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가 저 정도로 행동할 땐 나름의 이유와 확신이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는 이제 그들에게서 단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시금 났다.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 왔지만, 미동도 없이 침착하게 서 있는 레온하르트 덕에 금세 가라앉힐 수 있었다.
-쿵!
셀린느는 멍하니 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크게 밀쳐 낸 탓이었다.
셀린느는 곧바로 땅을 박차고 일어나 레온하르트 쪽을 바라보았다.
넘어졌다 한들 바로 근처.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
레온하르트는 시퍼런 라쉬르를 휘두르고 있었다.
라쉬르는 그녀가 여태까지 본 움직임 중 가장 화려한 궤적을 그렸으나 상대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끼이익!
순간, 셀린느는 공포감에 질려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귀를 찌르는 소리는 정확히 레온하르트가 있는 자리에서 들려왔다.
그제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단순히 새하얀 안개에 휘감겨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라쉬르를 휘두르고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의 전신을 휘감아 순간순간 라쉬르에 의해 갈라졌다가도 곧바로 합쳐지는 희멀건 덩어리는 어딜 보아도 안개가 아니었다.
저것이 레온하르트가 말한 유령이자, 이번 스테이지의 적일 것이다.
“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서서히 폐가촌의 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유령이었어. 여기도.’
플레이어는 희끄무레한 유령을 피해 다양한 아이템들을 주워 스테이지를 통과해야 한다.
이곳의 유령은 히든 스테이지의 유령들과 달리, 별다른 형체가 없는 덩어리에 불과해 존재감이 거의 없었지만 위험하기로는 다른 스테이지의 적들 못지않았다.
플레이어가 유령과 접촉하는 순간, 플레이어의 체력은 무서운 속도로 닳아 데드 엔딩을 맞이하고 말았으니까.
‘그럼, 레온하르트도……!’
이미 용암 지대를 건너오며 흘린 땀으로 푹 젖은 셀린느의 이마에 또다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레온하르트가 게임 속 약했던 셀린느처럼 쉽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어떻게든 해야만 해.’
이제 반동에 걸려 무력하던 시기는 지났다.
셀린느는 마법을 되찾았고, 이제 링조르에게도 완전히 주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 링조르가 있어!’
셀린느는 조금 전 마법을 쓰며 링조르를 잡았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마치, 대포를 목표물 코앞에서 쏘는 듯한 그 예리함과 위력.
셀린느는 품에서 링조르를 천천히 꺼냈다.
‘저게 나를 눈치채게 하면 안 돼.’
게임 속에서는 피해 다니기만 했던 유령에 대한 셀린느의 지식은 제로 수준이었다.
그러니 레온하르트가 속삭여 주었던 짧은 지식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티 내지 말라고 했지.’
셀린느는 오직 레온하르트에게만 정신을 집중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유령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 보이는 레온하르트가 눈에 또렷이 박혔다.
초연한 듯하면서도 적을 꿰뚫어 보는 푸른 눈, 조각 같은 코와 턱선, 넓은 가슴, 길고 탄탄한 다리…….
어느덧 희멀건 덩어리는 셀린느의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셀린느는 지금이 바로 그때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품에서 링조르를 꺼내 레온하르트를 겨냥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레온하르트. 하지만 레온하르트니까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아 줄 수 있죠?’
링조르가 진정한 주인의 명령을 기뻐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본디 그녀가 가지고 있던 마력과 링조르 속에서 잠자고 있던 마력이 서서히 융합되고 있음을 느꼈다.
거대한 에너지가, 셀린느의 손끝에서 링조르의 칼자루로, 칼자루에서 칼끝으로, 칼끝에서 레온하르트를 향해 빠른 속도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유령에게 자신의 존재와 위치, 그리고 그것을 파괴할 계획까지 송두리째 알려 주는 악수만 될 것이다.
-끼이이이이익!
에너지가 레온하르트에게 닿는 순간, 유난히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셀린느는 오직 레온하르트의 억센 손과 라쉬르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라쉬르는 흔들림 하나 없이 익숙하게 셀린느의 마법을 받아넘겼으며, 그것을 쥔 레온하르트의 손 역시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쨍그랑!
셀린느는 링조르를 떨어트리는 동시에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몸속의 모든 힘이 빠져나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힘이 풀린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나왔다.
“셀린느.”
갑자기, 익숙한 형체가 그녀의 앞에 주저앉아 다정한 손길로 몸을 지탱해 주었다.
“레온하르트…… 그건, 어떻게.”
“힘들면 말하지 마라. 그건 멀리 달아났으니 안심하도록.”
“……다행이에요.”
셀린느는 힘없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왜인지 목이 메인 듯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귓가에 속삭였다.
“정말, 강해졌더군.”
“안 다쳤어요?”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잠깐.”
셀린느는 잠시 움찔했다가,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책망하기는커녕 되레 감탄하는 동시에 안도하는 표정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작게 미소 지었다.
“유령은…… 뭔가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멈칫거렸다.
“딱 한 번, 상대해 본 게 전부지만…… 아니, 이번은 두 번째군.”
셀린느는 문득 오늘 이전 레온하르트가 상대해 보았다는 유령이 궁금해졌지만 묻지 않았다.
어차피 괴로운 경험이었으리라.
“저것들 역시 마물과 다르지 않다. 모든 생명을 죽여 버리니까.”
“하지만 사악한 기운이나 악취는 느껴지지 않았어요.”
셀린느는 의아했던 점을 지적했다.
만약 우두머리 마물처럼 심한 악취가 났거나, 흑마법사처럼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느껴졌다면 훨씬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령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게 가장 슬픈 점이지.”
“네……?”
“저것들은 한때 모두 인간이었다.”
“……!”
셀린느의 몸이 딱딱하게 굳더니 부르르 떨렸다.
“놀랄 일이지.”
레온하르트는 당연히 셀린느가 단순히 놀랐을 뿐이라고만 생각한 듯했다.
‘……나타샤.’
셀린느는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레온하르트의 동생들과 호위 시녀들을 떠올렸다.
‘그런 거였어.’
그동안 셀린느는 유령이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5년, 아니 4년 이내.
레온하르트를 눈이 시뻘건 살인귀로 만들고 나타샤와 호위 시녀들, 그리고 대공 부부의 어린 막내아들까지 유령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어, 어떻게 유령이 되는 거죠? 흑마법사는 타락한 마법사라지만…… 유령도 타락한 사람들인가요?”
셀린느는 추측을 입 밖으로 내자마자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타샤와 호위 시녀들까진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심지어 엘머 남작의 아들처럼 마법적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한 남자아이가 대관절 타락할 수 있긴 한가?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 자체가 드물게 발생하기에 확실치 않다. 하지만 여태까지 보고된 것들의 공통점은 있지.”
가슴이 아파 올 정도로 셀린느의 심장이 방망이질했다.
“다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집념이 있었다.”
“어떤, 종류의…….”
“주로, 살아 있는 사람을 지키고자 하는 집념이었다. 가족이나 부모, 애인……. 그 대상은 다양하게 보고되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전에 처치했던 유령이 지키고자 했던 인간은 어린 손자였다. 그 유령이 손자 주위에 접근해 오는 모든 사람을 죽여 버린 탓에 미쳐 버렸지.”
“…….”
“죽은 사람은 무덤 속에서 평안하게 안식하는 게 옳다. 본인을 위해서도, 산 자를 위해서도.”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뜬금없게 느껴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레온하르트를 불렀다.
그녀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두 동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봐 왔다.
‘동생들을 소멸시키지도, 내버려 두지도 못해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르는 추측에 입맛이 썼다.
‘……정신 차려, 그걸 막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부여잡고 일어섰다.
“어서 가요.”
“어디로?”
“…….”
유령과 사투를 벌이는 사이, 그들은 방향조차 잃어버렸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고 이 스테이지에서 주워야 했던 아이템들을 떠올렸다.
사실, 대부분을 유령을 회피하거나 방어하는 쓰는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맞서 버린 지금은 찾아봤자 별다른 소용이 없을 듯했다.
‘……아.’
그중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려면 반드시 찾아야 하는 아이템이 있기는 했다.
폐가촌에서 가장 큰 건물에 들어서면 구석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사람의 뼈들이 있었다.
그 뼈를 주워 사람이 누운 모양으로 맞추어 주면 유령은 더 이상 플레이어를 쫓아오지 않았고, 다음 스테이지로 가는 문이 열렸다.
“여기서 제일 큰 건물을 찾아야 해요.”
“이렇게 안개가 짙은데, 어떻게 찾겠나.”
“그래도…….”
갑자기, 셀린느의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였다. 그 건물의 지붕엔 거대한 철제 장식물이 달려 있었다.
‘철은 빛을 반사하지.’
셀린느는 바닥에 떨어진 링조르를 주웠다.
‘……?’
링조르에게선 아주 약간, 사람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 느껴졌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링조르는 자신을 바닥에 내팽개친 것에 대한 항의를 하고 있었다.
“미안해.”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린느는 링조르를 고쳐 쥔 채 팔을 쭉 뻗어 일직선상의 위치를 겨냥했다.
그리고,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밝은 빛을 만들어 냈다.
“레온하르트, 눈 좋아요?”
“나쁘진 않지.”
“그럼 봐주세요. 이 빛을 반사하는 곳이 있는지.”
셀린느는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이미 유령을 쫓아 버리는 데 거의 모든 마력을 소진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며 마력을 짜내야 했다.
“저기군.”
레온하르트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셀린느는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리 안개 속 어딘가에서, 거대한 철제 독수리가 위풍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