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온기와 강인함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적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음박질하던 그녀의 심장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래서였구나.’
셀린느는 그간 레온하르트가 자신의 생존을 확인하듯 껴안을 때마다 진정으로 그 감정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셀린느는 그동안 레온하르트가 왜 그리 자신을 부여잡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또한, 레온하르트의 온기와 쿵쾅거리는 심장 박동을 느끼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으니까.
어딘가 뻣뻣하게 느껴지는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입을 열었다.
“반동, 푼 것 축하한다.”
“네? 아.”
셀린느는 그제야 자신이 방금 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굳이 다시금 확인해 볼 필요는 없었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마력이 흑마법사가 죽음의 대가로 남기고 간 족쇄는 풀렸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이야.”
레온하르트는 순수히 감탄하는 투였지만 셀린느는 도저히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죽는 줄 알았어요.”
“내가?”
레온하르트는 놀랐다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줄 몰랐군.”
“그래도, 거기서 떨어지면……!”
“겨우 그 정도에 죽을 정도였다면, 진작 흑마법사의 손에 목숨을 잃었을 거다.”
“…….”
“그러니 다음부턴 그렇게 떨 필요가 없다.”
셀린느는 아직도 자신이 미세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애당초 죽을 리가 없었어…….’
다리에 힘이 풀렸다. 셀린느는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레온하르트가 크게 당황하며 셀린느를 부축했다.
“괜, 괜찮은가?”
“……네.”
셀린느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긴장이 풀려서요.”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안개가 끼어 있었지만 옅게 깔려 있었기에 시야를 확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두서넛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길이 절벽으로부터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기를 걸어가야 하는…… 셀린느?”
갑자기 이유도 없이 당황하는 기색의 셀린느를 본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러지?”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한쪽 팔을 그에게 들어 보였다.
소매가 조금씩 내려갔고, 그 자리엔 셀린느가 마법을 잃은 후부터 죽은 듯 잠자고 있는 자그마한 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동시에, 용 역시 그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깜박였다.
“깨어…… 난 건가?”
“잠든 용이 깨어났어요.”
셀린느는 멍하니 대답했다.
언뜻 동문서답처럼 들렸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보여 주었던 양피지에 있던 내용을 잊어버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그게, 그 소리였나. 당연히 화산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거늘.”
셀린느는 대답 대신 주머니를 뒤적거려 양피지 조각을 꺼내 보았다.
[용의 잠을 깨워라]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완료된 퀘스트가 표시되던 것처럼.
‘이 말이 정말로 루를 뜻하는 거였다니…….’
셀린느는 혀를 날름거리는 자그마한 용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몇 번이고 확인했다.
자신이 루를 부화시킨 건 우연에 불과했다.
그런데 진엔딩 루트 진행에 핵심적인 퀘스트가 루와 관련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설마 루도 스테이지의 일부였나…….’
크게 놀라는 셀리느와는 달리, 레온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반동이 풀렸으니, 깨어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가요.”
셀린느는 조금 찜찜한 마음으로 양피지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좀 더 생각하고 싶었지만 안개가 낀 절벽 끄트머리 위에서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아직 음악이 들리지 않는 걸 보니 진엔딩 루트의 세 번째 스테이지는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곧바로 길 위를 걷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이 길의 목적지가 짐작이 갔지만 확실하지는 않았기에 입을 다물었다.
‘화산 다음은, 분명 폐가촌이었어.’
주민들이 모두 집을 버리고 떠났는지 먼지만 가득한 폐가촌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미 게임과 상당히 달라진 상황.
폐가촌이 아닌 다른 것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안개 속에서 거대한 깃대가 우뚝 나타났다.
본디는 어느 영지 소속인지 알려 줬을 법한 깃발은 너덜너덜하게 헤져 문양을 알아볼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런 곳에 마을이 있다니.”
사람이 살지 못하는 화산에 마을이 있다면 분명 소문이 퍼졌으리라.
“완전히 고립된 곳이라 그런가.”
힐끗 곁을 보니 셀린느는 완전히 경직한 상태였다.
“혹시, 꿈에서 보았나?”
“……네.”
레온하르트는 안심했다.
셀린느가 자신이 꿈에서 보지 못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극도로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오늘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요, 들어가자마자 마물이 덮칠 거예요.”
“이번에도 공격하면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썰어 버려요. 마음껏.”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반가운 소리군.”
셀린느의 말대로, 그들이 폐가촌에 들어서자마자 마물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었다.
셀린느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한 다음 마력을 모아 마물들을 불살라 버렸다.
레온하르트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전혀 녹슬지 않았는데.”
“반동에 걸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요.”
참 많은 일들이 있어 길게 느껴졌지만, 그녀가 반동에 걸린 건 고작 보름 정도에 불과했다.
몇 달쯤 되었다면 제법 고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린느에게 지금 상황은 육상 선수가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니다가 떼어 버린 상황처럼 느껴졌다.
족쇄에서 벗어난 셀린느는 제 세상이 된 것처럼 날뛰었다.
-화르르!
라쉬르가 마물에 닿기도 전, 셀린느의 불꽃이 레온하르트 인근의 마물들을 불태웠다.
푸른 불꽃은 정확히 레온하르트의 살갗 근처에서 타올랐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놀란 얼굴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실력이 녹슬지 않은 정도가 아니군.’
셀린느는 오히려 몇 년간 마법 수련을 하다 온 사람처럼 실력이 크게 늘어 있었다.
반동에 걸리기 전 셀린느는 풍부한 마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위력에 비해 섬세함이 부족해 세밀한 마법은 쓰지 못했다.
반면, 지금의 셀린느는 당시와 다른 마법사라고 느껴질 정도로 섬세한 마법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다.
레온하르트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링조르야.’
셀린느는 그간 링조르를 쓰며 세밀한 마력의 흐름을 익혀 왔다.
족쇄가 되레 실력이라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이다.
“링조르를 쓸 생각은 없나?”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로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물었다. 그와 등을 맞대어 전방의 마물 무리들을 쓸어 버리던 셀린느가 웃었다.
“이제는 전혀 필요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레온하르트가 써요.”
“원래 링조르와 같은 마도구들은 주로 마법사들이 쓴다. 한번 써 보도록.”
셀린느는 의아해하며 얼굴을 약간 찌푸렸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품속에서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링조르르 꺼내 마물을 겨누었다.
“어……?”
셀린느의 입에서 의문과 뒤섞인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반동에 걸린 상태로 사용했을 땐 미쳐 날뛰던 야수처럼 느껴졌던 링조르가 마치 수족처럼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마물들을 그녀 본연의 마력을 쓰지 않고도 순식간에 처치할 수 있었다.
“역시.”
정확히 급소만 불타오르는 마물들을 본 레온하르트는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왜, 왜 이렇게 다르죠?”
“이것들의 심보는 고약해. 오직 마력으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자만을 진정한 주인으로 생각하고 따르지.”
“……그럼 링조르는 여태까지 절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은 거군요.”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반동이 풀리기 전까진, 링조르는 언제 자신의 손가락을 물지 모르는 사나운 개처럼 느껴졌으니까.
위력을 스스로 휘두르면서도 두려움을 종종 느꼈던 건 사실이었다.
“이제 링조르는 완전히 네 것이 되었군. 축하한다.”
셀린느는 멍하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작은 단검을 들여다보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힘에 심취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들은 옅은 안개가 감도는 마을 안이었다.
스테이지의 종료를 알리는 음악이 들리지 않는 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뭐가 또 달려들었는데.’
셀린느는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열심히 떠올리려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무슨 문제 있나?”
“뭐가 또 있어요. 그런데,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아서…….”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짚었다.
“걱정하지 마라. 화산보다 더한 게 나오겠나. 기껏해야 우두머리 마물 정도겠지.”
“…….”
이번만큼은 레온하르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무언가 존재감이 희끄무레했던 적이었지만, 분명 평범한 마물은 아니었다.
“조심해요.”
“항상 그래 왔지 않나.”
“거짓말, 안 좋아하는 거 맞아요?”
레온하르트는 멋쩍게 웃더니 손으로 안개를 휘저었다.
“이상하군. 딱히 고지대로 올라온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뿌옇지?”
셀린느는 그제야 시야가 완전히 가려질 정도로 사방이 뿌옇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제는 꺼멓게 먼지가 내려앉은 오래된 집들과 길거리를 나뒹구는 폭삭 삭은 가구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 바로 앞에 있는 것들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셀린느는 마법으로 최대한 밝은 불빛을 만들어 냈지만 짙은 안개엔 조금도 소용이 없었다.
‘이것도, 게임과 달라.’
이번 스테이지에 대한 기억은 좀처럼 나지 않았지만, 플레이어의 시야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끼었다면 기억이 났을 것이다.
소름이 우수수 돋았다.
물론 오늘 이전까지도 스테이지 진행상에서 게임과 다른 점이 여럿 있었다.
한 번도 플레이해 본 적이 없는 진엔딩 루트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였기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스테이지의 내용 자체가 바뀌어 버리는 경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돌아가는 게 좋겠나?”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뇨.”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면, [셀린느의 악몽]은 앞으로 나아가는 형식의 게임이라는 것이었다.
절벽을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바싹 붙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져 떨어지게 될까 봐 두려웠다.
-끼이익!
그들은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셀린느의 등줄기를 소름이 타고 내달렸다.
-끼이익!
누군가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끼이익!
소리는 그들 쪽으로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셀린느는 링조르를 빼 들었다.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의 앞을 가로막으며 속삭였다.
셀린느가 여태껏 들은 레온하르트의 목소리 중 손에 꼽을 정도로 다급한 목소리였다.
“뭘 보고, 뭘 듣더라도 티 내지 마라.”
“네……?”
“저건, 유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