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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55화 (55/120)

55화.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링조르를 내팽개치고 크게 손짓했다. 청회색 눈에 안도의 눈물이 차올랐다.

단 몇 분 후.

숨을 헐떡거리는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에게 당도했다.

“나는…… 네가…….”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두서없는 몇 마디가 흘러나왔다.

“저, 전 괜찮아요. 레온하르트야말로 갑자기 안 보여서……!”

“그런가.”

팽팽히 긴장한 상태였던 레온하르트의 몸이 눈에 띄게 안정되었다.

“네가 괜찮으면, 다 되었다.”

셀린느가 문득 메어 오는 목을 한 차례 다스리는 사이, 레온하르트는 주위 상황을 살폈다.

“저길 올라야 하는 건가?”

“……모르겠어요.”

탈력감에 젖은 목소리였다.

여태까지 셀린느는 몇 번이고 레온하르트에게 모르겠다는 말을 해 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녀가 이 세계에 무지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실망하지 마라. 예언자라고 해서 모든 미래를 알 순 없는 노릇이니까.”

“…….”

“내가 봐 온 예언자들은 대부분 사기꾼이었다. 네 예언은 여태까지 절반 이상이 맞았으니, 자신감을 가져라.”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땀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고마워요.”

“당연한 소리에 고맙다고 하는 건, 고쳤으면 좋겠군.”

셀린느는 그 말이야말로 레온하르트가 아닌, 자신이 할 소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는 대신 미소 지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지. 여기선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군.”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단단한 손을 꼭 붙들었다. 다시는 이 손을 놓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일 정도로, 힘 있고 단단한 손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다시금 오르막에 도달했다.

“아까와는 다른데.”

레온하르트는 당황한 눈치였고, 셀린느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충분히 걸어서 올라갈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던 산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변해 저 구름 위까지 우뚝 솟아 있었다.

“돌아가는 건…… 힘들겠군.”

어느덧 조각보 같았던 바닥들은 활활 끓는 용암으로 변했고 어디에도 발을 디딜 만한 잿더미가 없었다.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저길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이걸?”

레온하르트는 절벽으로 성큼 다가가 손을 짚었다.

흘러내린 용암이 굳은 듯 울퉁불퉁해 올라가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매달리듯 올라가다가 지친 상태의 셀린느가 추락해서 죽을지도 모를 터.

“이걸 파괴하면서 올라갈 순 없나?”

“모르겠어요.”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빼내 절벽에 조심스레 박아넣었다.

“……?”

라쉬르는 절벽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더욱 힘을 주어 박아 넣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냥 손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 같아요.”

“그것도 꿈에서 보았나?”

“……아뇨.”

레온하르트는 한참을 절벽과 씨름했지만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네 추측이 맞는 것 같군.”

충분히 쉰 셀린느는 절벽으로 다가갔다.

끄트머리가 구름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올라가자니 정신이 아찔했다.

하지만 그들은 더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까지 왔다.

어떻게든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했다.

‘적어도 레온하르트와 함께 있잖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곁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의 절망감을 떠올렸다.

“여기도, 네가 꼭 올라가야 하나?”

“네?”

“나 혼자 올라가도 되는 거라면…….”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 혼자 올라가는 거라면 모를까, 레온하르트 혼자 올라가는 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스테이지가 이미 그녀가 아는 내용에서 확연히 벗어난 지금은 모험을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제 생각엔……저희 둘 모두 올라가야 할 것 같아요.”

셀린느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절벽의 갈라진 틈에 발을 디뎠다.

레온하르트 역시 그녀 바로 옆에서 절벽을 타고 올라가려 했지만 한참을 주춤거렸다.

‘아.’

셀린느는 깨달았다.

용암 구덩이를 건너뛰며 왔을 때와 똑같았다.

이번에도 절벽을 올라가는 길은 오직 그녀에게만 보이는 것이다.

셀린느는 그 사실을 알렸으나 당연히 레온하르트의 반발에 부닥쳤다.

“네가 먼저 가다가, 마물이라도 만나면……!”

“저도 링조르가 있잖아요. 제 한 몸 간수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셀린느의 얼굴에 레온하르트가 보지 못하는 미소가 떠올랐다.

“전 레온하르트가 제 뒤를 지켜 주는 게 더 든든해요.”

“…….”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쉬고 그녀의 뒤만 밟으며 절벽을 올랐다.

잠시 후.

셀린느는 떨어지면 다치겠다는 위기감이 들 정도의 높이에 도달했다.

자신만만하게 갈라진 틈이 보이는 대로 붙잡고 딛던 시간은 끝났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뇨. 조금 힘들어서요.”

“천천히 가도록.”

셀린느는 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천천히 심호흡하며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정말로 떨어 손이나 다리가 후들거리기라도 하는 순간, 자신은 곤두박질칠 것이다.

셀린느는 위를 천천히 살폈다.

‘세 번 정도는 확실히 올라갈 수 있어.’

눈에 들어오는 갈라진 틈들은 모두 올라가기 쉬워 보였다. 셀린느는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가 반쯤 무아지경 상태에 빠져들었을 즈음, 새로운 난관이 등장했다.

“……!”

청회색 눈이 커지더니 두려움에 떨렸다. 도저히 올라갈 수가 없을 듯한 매끈한 절벽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군데군데 바위 틈새와 굳은 용암 덩어리들이 보이긴 했지만, 안전 장비 하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이동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듯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내려갈 순 없었다.

내려간다 한들,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셀린느는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았다.

그녀를 착실히 따라붙은 레온하르트의 밑으로, 어느덧 바닥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이 이어졌다.

“레온하르트…….”

“무슨 문제지?”

“못 올라가겠어요.”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당황한 것 같지도, 두려움이 엿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단단한, 평소의 그와 다를 것 하나도 없는 목소리였다.

“네 능력을 믿어라.”

문득 셀린느의 뱃속에서 자조하는 웃음이 부글거렸다.

능력?

지금의 그녀에게 능력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레온하르트가 황제에게 하사받은 링조르와,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레온하르트를 속여 먹은 게임 플레이에 대한 기억만 있을 뿐.

“……정말, 못 올라가겠어요.”

레온하르트가 살짝 목을 빼고 위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충분히 올라갈 수 있을 듯한데.”

“보, 보여요?”

“그래. 저기로 가면 되지 않나.”

레온하르트의 턱짓 끝엔 셀린느가 몸을 던져야 잡을 수 있을 듯한 용암 덩어리가 있었다.

“떨, 떨어질 것 같…….”

“받아 주지. 그러라고 내가 네 뒤에 있는 게 아닌가?”

“그랬다간 레온하르트까지……!”

“날 무시하지 마라. 널 등에 업고도 기어오를 수 있으니까.”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레온하르트가 옳아.’

내려갈 수 없다면, 어떻게든 올라가야 했다.

그렇다고 목숨을 걸고 몸을 던지고 싶지는 않았다.

죽는 것보다도, 죽으면 처음부터 여기까지 다시 올라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셀린느는 손으로 주위를 더듬더듬 만졌다.

‘틈이 있어.’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손가락으로 붙들 수 있는 틈이 느껴졌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왼발도 떼어 눈에는 잘 보이지 않은 틈을 절벽에 비비며 찾기 시작했다.

천천히, 하지만 안정적으로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처럼 셀린느는 이동했다.

레온하르트에게 상황은 좀 더 수월했다.

그는 셀린느가 찾지 못한 틈들도 직감적으로 찾아내더니 어느덧 그녀와 나란히 기어오르고 있었다.

셀린느의 가쁘던 호흡도 점차 제자리를 찾았고, 그들은 빠른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손끝에 평평한 땅이 짚였다.

셀린느는 이를 악물며 생채기투성이 몸을 끌어 올렸다.

‘시원해…….’

절벽 위는 옅은 안개가 끼어 차갑고 촉촉한 공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습기를 만끽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돕기 위해 아찔한 절벽을 살짝 내려다보았다.

굳이 소리를 질러 그를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신이 마침내 끝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

정확히 그 순간, 레온하르트가 붙잡고 있던 절벽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경악과 공포가 뒤엉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고 속이 울렁거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레온하르트는 허물어진 절벽에 라쉬르를 박고 매달린 상태였다.

추락하지 않았다고 안도할 상황이 아니었다.

칼자루를 쥔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는 손이 레온하르트가 얼마나 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지 알려 주었다.

‘괜찮다면, 나를 안심시켰을 거야.’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지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말 한마디 뱉을 정도로 힘들거나, 아니면 할 말이 없거나.

셀린느는 오돌오돌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레온하르트를 구해 낼 방법은 단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링조르 역시 라쉬르처럼 파괴만 가능했다.

지금 상황에서 파괴는 레온하르트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 뿐일 것이다.

마법.

머리에 언뜻 떠오른 단어에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당연히 마법만 있다면 레온하르트를 구해 내는 건 식은 죽 먹기이다. 하지만 그놈의 반동에 걸려 있는 지금, 마법에 대한 생각은 부질없는 미련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셀린느는 마법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를 구할 수 있는 힘에 대한 갈망이 순식간에 자라나 셀린느를 지배하여 놓아주질 않았다.

‘마법만 쓸 수 있다면……!’

셀린느의 눈에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레온하르트의 참혹한 미래를 풀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하지만 도리어 그 행보가 레온하르트의 목숨을 위협하다니.

이 모든 결정은 셀린느가 내렸고, 지금 상황에 대한 책임도 셀린느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흑마법사의 반동에 당한, 마법사라고도 부를 수 없는 무능력자일 뿐이니까.

‘레온하르트는 죽을 거야. 나 때문에…….’

달깍.

무언가, 머릿속에서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우두두 돋아났으며 힘이 전신에 차올랐다.

셀린느는 이 느낌이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마력이 전신에 차오르고 있었다.

셀린느는 왜, 어떻게를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였다.

순식간에 그녀가 서 있는 발치부터 레온하르트가 매달려 있는 절벽까지 거대한 얼음 계단이 자라났다.

마력은 거대한 회오리바람처럼 그녀를 휘감아 방패와 창을 선사했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에게 중요한 사실은 오직 마법으로 레온하르트를 구했다는 것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올라 덜덜 떠는 셀린느에게 도달했다.

“셀린느…….”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를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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