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라쉬르로 불덩이를 가르려 했다면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딱히 다르진 않군.’
레온하르트는 조소했다.
그가 처해 있는 상황에 비해 제법 여유로운 태도였다.
레온하르트는 처음부터 이 상황을 빠져나가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마주친 용암 괴물들은 제자리에 버티고 서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다.
이 용암 덩어리도 그가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빠져나가는 것 자체야 쉬울 것이다.
전신에 화상을 입는다는 게 문제였지만.
레온하르트는 크게 심호흡하려다, 체내로 훅 들어오는 열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여태껏 열기를 최대한 막아 주었던 라쉬르를 거두는 동시에 용암 덩어리를 그대로 통과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절규했다.
비틀거리며 나타난 레온하르트는 새빨간 불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활짝 날갯짓하는 용암 새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풀썩 쓰러졌다.
양손이 호소하는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레온하르트를 부여잡는 셀린느의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넘쳤다.
셀린느는 떨리는 손으로 힐링 포션의 뚜껑을 열며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것만 먹으면 레온하르트는 괜찮을 거야. 이것만 먹으면…….’
다행히 불꽃들은 본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인지 금방 꺼졌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전신은 화상과 탄 자국들로 가득했다.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는 덕에 몸체는 무사했지만, 맨살이 드러난 얼굴과 손은…….
셀린느는 흘러넘치는 눈물은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며 레온하르트의 입에 힐링 포션을 조금씩 흘러 넣었다.
‘제발, 제발.’
다행히, 힐링 포션의 위력은 여전했다.
화상과 수포로 가득했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차차 나아져 용암 새에게 공격당하기 전보다 더욱 매끈해졌다.
심지어 반쯤 타 버린 머리카락마저도 본디 상태로 돌아왔다.
하지만 청회색 눈에 한가득 고인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주 천천히, 레온하르트의 눈이 열렸다.
“……울지 마라.”
“어떻게 안 울어요.”
“그래도, 울지 마라. 우는 널 보면…….”
레온하르트의 새파란 두 눈이 셀린느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를 않았다.
“불에 타오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우니까.”
셀린느는 검댕이 잔뜩 묻은 손으로 눈물을 훔쳐 냈다.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끄집어냈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손수건은 홀랑 타 버려, 베르누이 가의 문양만 남은 상태였다.
“……정말 대단하군, 이 약은.”
“그, 그러게요.”
셀린느는 남은 힐링 포션의 개수를 헤아렸다.
단 4개.
만약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더 일어난다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용암 괴물, 몇 마리가 더 있었더라.’
셀린느는 머리를 쥐어짰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대체 누가 수개월 전 단 한 번 엔딩을 본 게임의 중간 스테이지에 괴물이 몇 마리 등장하는지를 기억하겠는가?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태까지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도 망설임 없이 앞으로 돌진했다.
‘이젠 안 돼.’
셀린느는 그제야 자신이 여태까지 앞만 보고 달려갈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뒤를 지켜 주는 레온하르트가 있었으니까.
‘왜 그걸 몰랐을까.’
셀린느는 그 답 역시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너무나 완벽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셀린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셀린느? 괜찮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조금 전 불덩이를 뒤집어쓴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는 그녀를 걱정하다니.
“괜찮아요.”
“보다시피 나도 멀쩡하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으니, 어서 출발하도록.”
셀린느는 머뭇거렸지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하나뿐이었다.
‘그래, 여기에 더 머무른다고 해결되는 건 없어.’
머무르면 머무를수록 불시의 기습을 당할 확률만 올라갈 뿐이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눈을 맞추었다.
“……고마워요, 레온하르트.”
“별말씀을.”
그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용암 지대를 빠져나갔다.
레온하르트는 힐링 포션을 마셨기에 최상의 컨디션이었고, 셀린느 역시 헤르메스의 신발이 있어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다행히 기습은 레온하르트가 당한 한 번이 전부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끝이 보이지 않았던 평지는 끝이 나고 마침내 그들은 오르막에 도달했다.
“여길 올라야 하는 건가?”
레온하르트가 시커먼 산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꿈에서도 여기까진 나오지 않아서요.”
셀린느는 머뭇거렸다.
일반 루트의 여섯 번째 스테이지인 용암 지대는 지금 끝나는 게 맞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경험상 스테이지가 지금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레온하르트, 조심…….”
셀린느는 말을 뚝 멈추었다.
분명 방금 옆에 있었던 레온하르트가 없었다.
“레온하르트!”
청회색 눈이 공포에 질려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새파란 하늘, 그와 대조되는 잿빛 땅, 불타오르는 용암……그 모든 것들이 한데 일그러져 뒤죽박죽으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전신이 벌벌 떨렸다.
이런 건 [셀린느의 악몽]을 플레이하는 내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셀린느는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소스라치며 나뒹굴었다. 반쯤 식은 용암이 등을 태워 고통스러웠다.
나뒹군 곳은…… 하늘이었다.
셀린느는 하얀 구름 한 조각에 푹 잠겼다가 순식간에 잿더미에 얼굴을 박았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와중에도 레온하르트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레온하르트를……!’
그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레온하르트가 느낄 절망과 무력감이 어느 수준일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셀린느는 핑핑 도는 머리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내가 해결해야 해. 내가…….’
분명 이건 진엔딩 루트에서만 발생하는 이벤트일 것이다. 그렇다면, 클리어할 방법도 분명 있으리라.
셀린느는 시시각각 하늘에서 잿더미로, 잿더미에서 용암으로 구르는 몸을 멈추려 노력했다.
‘됐, 됐어……!’
다행히 몸이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겨우 잿더미 위에 균형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셀린느는 주위를 바라보았다.
용암, 하늘, 잿더미가 거대한 조각보처럼 조각난 채로 이어져 있었다.
‘아.’
셀린느는 깨달았다.
[셀린느의 악몽]에서는 아니었지만, 다른 게임에서 이 비슷한 스테이지를 플레이한 적이 있었다.
함정을 피해 가며 올바른 길만 걸어가야 하는 스테이지였다.
‘레온하르트도 이 위에 있겠지.’
“레온하르트!”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끝도 없는 조각보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설마…….’
어쩌면 레온하르트는 진작 용암 속으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야, 아닐 거야.’
셀린느는 따가워지는 눈시울을 문질렀다.
레온하르트가 그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다. 이 끝없는 조각보 어딘가에서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으리라.
그러니 그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했다.
셀린느는 천천히 한 걸음을 자신이 서 있는 잿더미에서, 다른 잿더미로 옮겼다.
“……!”
잿더미는 그녀가 밟자마자 순식간에 하늘로 변했다.
셀린느는 기우뚱하다가 근처의 잿더미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행히 이번의 잿더미는 용암으로도, 하늘로도 변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이점을 살폈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어……?”
분명 멀쩡했던 지금의 잿더미가 흐물흐물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셀린느는 재빨리 다음 잿더미로 건너뛰었다.
이번 잿더미 역시 셀린느가 딛자마자 용암으로 변해 버렸지만, 곧바로 다른 잿더미로 도약했기 때문에 다치지 않았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셀린느는 오직 눈앞에 보이는 모든 잿더미를 밟는 데에만 집중했다.
가벼운 발걸음은 한 블록을 밟자마자 다른 블록으로 곧바로 튀어 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이 무색하게, 셀린느의 호흡은 흐트러지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반면 조각보는 여전히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눈물이 땀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금 셀린느가 하는 행동은, 스테이지 클리어라기보단 죽지 않기 위해 몸을 혹사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생각해야 해.’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뛰어다니기만 하다간 죽는 건 시간문제였다.
셀린느는 숨을 헐떡거리며 주위를 살피려 애썼다.
‘……?’
우연히 뒤를 언뜻 돌아본 순간, 예상치 못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여태까지 밟아온 블록들이, 모두 모여 화산으로 오르는 길이 되어 있었다.
안도감이 드는 동시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정말로 한 번 죽고 나서야 저 길을 눈치챘을 것이다.
셀린느는 재빨리 길 위로 다리를 옮긴 다음, 그대로 주저앉았다.
손아귀 사이로 바닥의 검은 가루가 바스러졌다.
‘재가 아니네?’
차갑고 수분기가 느껴지는 감촉은 흙이었다. 단단하고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흙.
셀린느는 홀린 듯 일어나 화산으로 서서히 다가가다, 우뚝 멈춰 섰다.
“레온하르트……?”
푸른 빛이 형형한 라쉬르를 빼든 채, 가벼운 몸놀림으로 잿더미를 질주하는 남자는 분명 레온하르트였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소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의 그녀처럼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었다.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은 그녀보다도 더 침착하고 빠른 속도였지만 레온하르트도 인간.
결국은 한계에 닥칠 수밖에 없으리라.
셀린느는 제발 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길 바라며 계속해서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외쳤다.
‘제발, 제발 뒤를 돌아봐요. 레온하르트…….’
하지만 거리가 제법 멀기 때문인지 그녀의 외침은 닿지 않았고, 레온하르트는 빠른 속도로 셀린느에게서 멀어져갔다.
‘생각을 해, 셀린느 헌트!’
이렇게 목이 터지라 고함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레온하르트에게 그녀의 존재를 알릴 만한 방법을……!
‘아!’
셀린느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링조르를 꺼냈다.
마법만큼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셀린느는 링조르로 레온하르트를 최대한 정확히 겨냥한 다음, 링조르의 날뛰는 마력을 움켜쥐어 최대 출력으로 레온하르트에게 쏟아부었다.
당연히, 공격 마법을.
본질이 검인 링조르로는 공격 마법만을 구사할 수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괜찮을 거야.’
셀린느는 이를 악물며 링조르에 있는 모든 마력을 레온하르트를 향해 쏟아부었다.
평범한 검사라면 순식간에 전신이 산산이 조각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레온하르트는 몸을 반 바퀴 빙글 돌려 라쉬르로 우아하게 셀린느의 공격 마법을 받아 냈다.
정확히 그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