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셀린느는 초조하게 레온하르트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로서는 믿을 수도, 믿고 싶지는 않겠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직 진엔딩 루트의 절반도 오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저주를 풀어 나갈 수 있는 게 오직 그녀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할 것이다.
“……방금 같은 것들이 또 나타나지 않겠나.”
“보셨잖아요. 해치울 수 있어요.”
“그리고 용암으로 떨어질 뻔했지.”
“…….”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지만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가 알려 주고, 내가 먼저 건너가면 되지 않나?”
“그게…….”
셀린느는 망설였다. 그녀 자신도 답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항상 그녀가 레온하르트보다 앞서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다.
레온하르트가 먼저 스테이지의 마지막에 도달할 경우, 뒤따라온 그녀가 스테이지를 클리어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동시는 괜찮겠지만.’
하지만 동시에 건너뛰는 건 불가능했다.
함께 몸을 딱 붙인 채 서 있는 지금도 조금 불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크기의 바위였으니까.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망설이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기겁했다.
단단한 손이 어깨와 다리를 안정감 있게 받쳐 주었지만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레온하르트는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했다.
“이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 방향만 알려 주면 될 것 같은데.”
“하, 하지만 괴물이 나타나면……!”
“괴물도 나오나?”
“……꿈에선 그랬어요.”
“그럼 내려 주지. 나오면.”
셀린느는 지금 당장 내려 달라고 하려다 멈추었다.
‘어쩌면 이게 최선일지도 몰라.’
레온하르트라면 그녀를 안고도 능히 이 스테이지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기억에 따르며 바위를 건너뛰어야 하는 구간은 곧 끝난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야 할 바위를 가리켰고,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안아 든 채 가뿐하게 바위와 바위를 뛰기 시작했다.
‘……으아.’
셀린느는 속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레온하르트에게 꼭 붙었다.
서너 개쯤 더 뛰었을까.
다시금 숯덩이가 용암 속에서 튀어 올랐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부드럽게 셀린느를 바위 위에 내려 주고 라쉬르를 휘둘러 숯덩이를 폭파했다.
단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고맙다고 하려다, 인사 대신 피식 웃고 말았다.
멀끔했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숯가루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어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다시금 셀린느를 안아 올렸다.
“다음은 어디지?”
“저기…… 아!”
셀린느는 탄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한 사람이 겨우 서 있을 만한 바위가 아닌, 제법 넓어 보이는 땅이 나왔다.
“끝인가?”
“아뇨. 조심해요. 저긴 마물이…….”
다음 순간, 레온하르트는 땅 위에 착지하며 셀린느를 내려 주었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덮쳤다.
-푹!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분명 자신 위로 엎어지리라 생각했던 마물이 산산조각이 난 채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별것 아니군. 여긴 이 수준 마물들밖에 없나?”
“아뇨.”
셀린느는 침을 꿀꺽 삼켰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것들이 달려들어요.”
“용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정말인가? 아무리 네 예지력이…….”
레온하르트가 믿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셀린느가 이 세계에 몇 달간 있으며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건, 이곳의 사람들은 생각보다 초자연적인 현상에 익숙하지 않았다.
마법과 마물이 일상에 널려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심지어 마법과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레온하르트 역시 그랬다.
셀린느는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믿지 않으셔도 보면 알겠죠, 뭐. 하지만 이건 믿어 주세요. 절대 공격하지 마세요.”
“뭐?”
“링조르도, 라쉬르도, 마법도 먹히지 않아요. 공격했다간…….”
셀린느의 말꼬리가 절로 흐려졌다.
게임 속에서 용암 괴물에 멋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불에 튀겨지던 캐릭터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용암 괴물들은 [무적], 즉 시스템상 데미지가 단 하나도 들어가지 않게 설계된 적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꿈속이니 그랬던 것 아닌가.”
“아니에요.”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죽었어요.”
“……!”
레온하르트가 충격을 받아 말문이 막힌 사이 셀린느는 말을 이었다.
“그래도 꼭 공격해야겠다면…… 솔직하게 말해요, 레온하르트. 제가 먼저 할 테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레온하르트는 좀처럼 경악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지만 셀린느는 진심이었다.
‘용암 괴물을 섣불리 공격했다간,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죽을 거야.’
셀린느는 얼굴이 숯가루로 시꺼멓게 변한 와중에 형형히 빛나는 두 푸른 눈을 들여다보았다.
“네, 전 죽겠죠. 정말로 공격하고 싶으면 제가 어떻게 죽는지 한번 보신 후 결정하세요.”
“……네 뜻대로 하겠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암에 녹아내리며 죽는 것만큼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들은 잿더미 위를 천천히 걸어갔다.
“악……!”
셀린느는 펄쩍 뛰어올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단단한 땅이었던 곳이 순식간에 푹 꺼지고 용암이 차올랐다.
레온하르트가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펄펄 끓는 용암에 넘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싸늘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런 거, 게임엔 없었던 거 같은데…….’
셀린느는 가쁘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냥 기억을 못 하는 걸 거야.’
저택에서도 수없이 죽지 않았던가.
중간에 끼어 있는 스테이지의 디테일을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정도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셀린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법 오래 걸어 용암 괴물은 나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을 즈음, 사방이 심하게 흔들렸다.
레온하르트는 즉각 멈추며 라쉬르를 빼내 들었다.
“가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팔을 잡아당기며 뛰기 시작했다.
“약속했잖아요! 공격하지 마세요!”
“그럼 이게…….”
“네, 곧 나타날걸요.”
셀린느의 예상대로,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을 거대한 용암 괴물이 가로막았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마물과 흑마법사를 베며 살아온 지 10년.
하지만 여태까지 눈앞의 상대만큼 위압적인 적은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단순히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크기의 용암 줄기가 땅에서 솟구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빛이 뿜어져 나오는 이목구비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손발, 라쉬르조차 녹아내리게 할 것 같은 뜨거운 열기까지.
손이 자동적으로 칼자루를 향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여기에요, 여기!”
셀린느가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더는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내달렸다.
-펑!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불덩이가 떨어지며 폭발했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릴걸요. 어서 가요!”
셀린느가 가리킨 곳은 용암 괴물의 다리 사이였다. 본능에 반하는 결정이었으나 시시콜콜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정말로 예언자이기를 바라며 그녀와 함께 내달렸다.
셀린느가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을 훔쳐 내자마자 새로운 용암 괴물이 나타났다.
셀린느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과 비슷한 형체였던 첫 번째 용암 괴물과 달리, 두 번째 용암 괴물은 거대한 늑대 형태였다.
“다리 사이로 달려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네가 더 문제인 것 같다만.”
셀린느는 작게 미소지었다.
“저는 문제 없어요.”
제법 오랫동안 걷고 달리고 뛰었다.
이제 다리가 아파야 정상인데도 여전히 날아갈 것처럼 가뿐한 느낌이 들었다.
셀린느는 무심코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없었다면 난 진작 죽었겠지.’
왜 벌써 ‘헤르메스의 신발’이 나왔나 했더니, 이번 스테이지 때문인 모양이었다.
셀린느는 빠르게 용암 늑대의 네 다리 속으로 진입했다. 작은 불씨들이 사방에 튀었지만 신발 때문인지 큰 무리 없이 피할 수 있었다.
반면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휘둘러 불씨들을 튕겨 내야 했다.
자연히 그들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지만 정신을 용암 늑대를 통과하는 데만 집중한 셀린느는 완전히 빠져나올 때까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속도를 좀 줄여야겠어.’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라쉬르를 휘두르며 늑대의 배에서 떨어지는 용암과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걱정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니까, 그녀보다 조금 느리더라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로 빠져나올 것이다.
십여 분 후.
무사히 용암 늑대를 빠져나오는 레온하르트를 본 셀린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가 그대로 일그러졌다.
거대한 용암 새가, 그녀가 아닌 레온하르트를 덮쳤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수가 없는데……!’
스테이지의 적들이 실제 플레이어이자 앞서가는 그녀가 아닌 레온하르트를 공격하다니.
심지어 레온하르트는 첫 번째 스테이지와 향후 스테이지들에서 셀린느를 죽이려 들던 악역이 아닌가.
그녀는 당장 링조르를 움켜쥔 채 레온하르트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레온하르트의 형체는 보이지 않고 화염에 휩싸인 덩어리와 그것을 덮은 거대한 날개만 보일 정도였다.
그 순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화염 덩어리에서 들려왔다.
“가까이 오지 마라.”
“레온하르트!”
안도감이 셀린느를 한가득 채웠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괜찮아, 역시 레온하르트니까…….’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레온하르트의 말에 셀린느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약, 준비해둬라.”
힐링 포션을 굉장히 귀하게 여기는 레온하르트가 먼저 요구할 정도의 상황.
셀린느의 몸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많, 많이 다쳤어요?”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대한 새 모양 불덩이가 덮쳐 온 순간, 레온하르트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그것을 공격하는 대신 라쉬르로 자신을 감싸는 방패 막을 만든 것이다.
자신보다 셀린느를 더 믿었기에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이었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밖에서 셀린느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정확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필요한 말만 내뱉었다.
가까이 오지 말 것, 그리고 셀린느가 발견하는 신비한 약을 준비할 것.
얄궂게도, 이렇게 꼼짝없이 열기에 익어 가는 와중에 레온하르트는 절대로 공격해선 안 된다는 셀린느의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깨달았다.
여태까지 그가 라쉬르로 무력화하지 못했던 마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 불덩이들에선 그 어떤 마법도 읽어 낼 수가 없었다. 흑마법이라면 풍겨야 할 사악한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이것들은 마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