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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52화 (52/120)

52화.

셀린느의 머리는 멈추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인데!’

레온하르트야말로 그간 그녀에게 불가능한 것들을 해 주었지 않나.

셀린느는 만약 평범한 권력자가 레온하르트처럼 자신의 저주에 엮이게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 보았다.

‘어디에도 가지도 죽지도 못하게 평생 가두어졌을지도 몰라.’

당장 그녀 또한 레온하르트를 보자마자 끝없이 살해당하고 되살아나게 될까 봐 기겁하지 않았는가.

“레온하르트야말로…….”

셀린느의 말은 곧바로 레온하르트에 의해 끊겼다.

“내가 어떤지가 뭐가 중요하지?”

“그건……!”

레온하르트는 몸을 살짝 옮겨 셀린느와 다시금 눈을 맞추었다.

“방금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맞혀 볼까.”

집요한 시선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네가 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겠지.”

셀린느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레온하르트가 맞았다. 그녀가 한 건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설령 레온하르트를 돕는 것처럼 보인다 한들 모두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임무를 도운 것도 모두 날 위해서였어. 그와 나의 이득이 일치하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이 사실들을 입 밖으로 낼 만큼 뻔뻔하지 못했기에, 단지 시선을 땅으로 떨구었다.

“날 걱정해 주었잖나.”

“그거야 당연하잖아요.”

셀린느는 힘없이 대답한 다음 바닥의 무늬를 세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레온하르트만의 독특한 위로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명백하게 부정의 표시를 했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다친 데 없이 돌아오라고 한 건…… 네가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더 이상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되레 똑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것만큼은 바로잡아야 했다.

“그건 대단한 말이 아니에요. 레온하르트가 당연히 들었어야 할 말일 뿐이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너 하나뿐이지.”

셀린느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으나 레온하르트가 한발 더 빨랐다.

“여태까지, 난 오직 흑마법사와 마물을 죽이기 위해서만 살았다.”

“레온하르트는 옳은 일을 한 거예요.”

이번만큼은 레온하르트도 그녀에게 동의했다.

“그래. 부끄럽지도, 후회하지도 않아. 아마 앞으로도 평생 악한 것들을 죽이겠지.”

레온하르트는 이제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셀린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널 도왔을 때만……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을 꺼낸다면 자신에겐 너무나 과분한 레온하르트의 마음을 으스러뜨리는 꼴이 되고 말 것 같았다.

“……!”

레온하르트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셀린느가 그를 껴안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그들은 여태까지 포옹을 몇 차례 나누었다.

하지만 전부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것 그 이하 그 이상도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달음박질쳤다.

심장이 너무나도 빨리 뛰어 그 소리가 셀린느에게까지 들릴까 봐 두려워질 정도였다.

잠시 후, 셀린느가 조심스레 레온하르트에게서 떨어지더니 단호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일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지금 출발해요.”

***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그들의 목적지를 단지 ‘화산’이라고 부를 때마다 의아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 말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셀린느는 숱한 화산 사진과 영상 중 이 산만큼 화산이라는 이름에 들어맞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유황 냄새와 잿가루에 숨이 막혀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였고, 분화구에서 쉬지 않고 흘러내리는 시뻘건 용암에 눈이 아릿했다.

셀린느는 단지 게임에서처럼 용암에 닿지만 않으면 괜찮으리라고 생각한 자신이 안이했음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블랙을 그나마 아직 풀이 남아 있는 지대에 풀어 주었다.

“정말 여기에 와야 하는 게 맞나?”

셀린느가 고개를 끄덕이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행이군.”

“네……?”

“꿈에서 봤다는 뜻일 테니까, 예언자님.”

셀린느는 이마를 찌푸리며 게임 속 스테이지를 떠올렸다. 시간이 꽤나 지났기 때문에 디테일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건 쉽지가 않았다.

“평지에 용암만 흐르는 곳을 찾아야 해요.”

“음.”

레온하르트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당장 저기만 해도 평지고, 용암이 가득한 것 같은데.”

셀린느의 눈이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을 좇았다.

그들의 위치로부터 한참 떨어진 땅에 용암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요.”

레온하르트는 무슨 생각인지 묻지 않고 셀린느의 지시에 바로 따랐다.

그들은 재 가루가 자욱하고 종종 용암이 튀는 땅을 묵묵히 걸었다.

재가 무릎 높이까지 쌓여 있었기에 레온하르트는 걷는 데 제법 애를 먹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잿가루가 그득한 땅에 신발 자국만 낸 채 가볍게 걸을 수 있었다.

처음에, 셀린느는 그들의 체구 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발걸음이 이상할 정도로 가볍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셀린느는 잠시 멈춰 서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진엔딩 루트의 두 번째 스테이지 클리어 보상이었던, 헤르메스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셀린느는 조심스레 오른쪽 신발을 벗어 보았다.

“셀린느!”

“잠깐만요.”

셀린느는 곧바로 기겁하는 레온하르트를 제지하며 오른쪽 발을 잿더미 위에 올려보았다.

단지 가볍게 올려 보았을 뿐인데, 발은 푹 내려앉았다.

‘역시.’

셀린느는 발바닥의 재를 대충 털어 낸 다음 신발을 다시 신었다.

“무슨 짓이지?”

셀린느는 뒤로 돌아 그들이 걸어온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잿더미를 가리켰다.

“레온하르트,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 문제지?”

“발자국이요! 제 발자국만 이상할 정도로 가볍게 남았잖아요.”

“……아.”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네가 가벼워서 그런 줄 알았는데. 워낙 말랐으니까.”

“…….”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이면, 앞으로 좀 더 잘 먹도록.”

셀린느는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걸어가는 레온하르트에게 차마 신발 때문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곧 레온하르트가 가리켰던, 용암이 넘실거리는 평지에 도달했다.

“뭐지……?”

레온하르트가 당황해하며 사방을 살폈다.

분명 멀리서 보았을 땐 분화구부터 분출된 용암이 평지까지 살짝 흘러내린 수준이었던 이 땅은, 실제로 와 보니 웬만한 평야 수준의 평지 전체에 용암이 넘실거렸다.

화산은 저 멀리 지평선에 살짝 보이는 수준이었다.

“이상하군.”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셀린느는 확신에 가득 찬 듯한 목소리였다.

“꿈이랑 똑같아요.”

“네 꿈은 도대체…… 그래서, 여기서 뭘 해야 하지?”

“저 화산까지 가야 해요.”

“뭐?”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여길 건넌다고? 저기까지?”

“네.”

셀린느는 잿더미로 가득한 안전지대 끄트머리에 서서, 열기가 우글거리는 용암을 허리를 살짝 굽힌 채 자세히 살폈다.

갑자기, 등을 무언가가 끌어당겼다.

“위험해 보여서.”

레온하르트는 소리 없는 항의에 짤막하게 대답했다.

가느다란 몸이 금방이라도 용암에 빠질 것처럼 위태롭게 몸을 기울인 모습을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셀린느는 용암 위쪽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들끓는 용암 사이로 한 사람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을 듯한 바위가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저기로 갈게요.”

레온하르트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분명 셀린느는 꿈속에서 이 용암 위를 걸을 방법을 보았을 것이다.

바위와 그들 사이의 거리는 1m가량으로, 어렵지 않게 뛸 수 있는 거리였다.

레온하르트가 건너뛸 준비를 하는 바로 그 순간, 셀린느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제, 제가 먼저 갈게요!”

“……?”

“그, 꿈에서도, 제가 먼저 갔거든요.”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소매를 여전히 붙잡은 채 간절한 눈을 올려다보는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셀린느의 얼굴 어디에서도 불안이나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그에 대한 염려만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한참을 망설였다.

셀린느를 뿌리치고 저 바위 위로 건너뛰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셀린느를 불신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며칠 전 베르누이성에서만 해도 셀린느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떨지 않았는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 미소 지었다.

“……알겠다.”

셀린느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했다.

레온하르트에겐 자신 있다는 듯 얘기했지만, 자칫 삐끗했다간 용암에 몸이 녹아 버릴 위험을 감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전지대의 끄트머리와 바위의 사이는 1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다음, 잿더미를 박찼다.

‘……?’

생각보다 몸은 훨씬 가벼웠고, 착지는 안정적이었다. 이유는 그리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헤르메스의 신발.’

자신이 진엔딩 루트를 밟고 있다는 점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일반 루트였다면 신발 보정을 받지 못해 몇 번이고 죽었을 것이다.

셀린느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금 건너뛴 거리보다 조금 더 먼 곳에 다른 바위가 보였다.

셀린느는 망설이지 않고 그 지점을 향해 뛰었다.

동시에 레온하르트가 조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바위에 착지했다.

두 개쯤 더 뛰었을까.

갑자기, 용암 전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셀린느의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더니 망설임 없이 품에서 링조르를 빼내 들어 곧바로 도약했다.

“셀린느!”

셀린느가 공중에 머무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사이, 불이 붙은 거대한 숯덩이가 용암 속에서 튀어 올라 그녀가 조금 전까지 있던 바위에 부딪혀 활활 타올랐다.

-쾅!

셀린느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링조르로 숯덩이를 베자, 숯덩이는 흩날리는 잿더미로 변하며 폭발했다.

‘안 돼!’

방심한 탓이었을까.

셀린느는 착지하며 크게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용암에 삼켜질 거라고 직감한 청회색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 순간, 단단한 두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레,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숨을 헐떡였다.

“내가 먼저 가겠다고 하지 않았나.”

살짝 불만이 엿보였지만,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그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대답했다.

“길을 제가 아니까요.”

“내 눈은 나쁘지 않아. 다음엔 저기로 가면 되는 것 아닌가?”

레온하르트는 오른쪽에 위치한 바위를 가리켰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저기예요.”

레온하르트의 눈이 크게 커지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분명 셀린느가 가리키기 전까진 보이지 않던 바위였다.

‘잘못 보았나.’

셀린느는 그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려 주기 전까진 안 보일 거예요.”

“……믿을 수 없군.”

셀린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미간을 찌푸리는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믿으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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