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레온하르트가 갈 수 없는 곳도 있어요?”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레온하르트는 조금 어이가 없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은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글귀가 가리키는 건 화산이다.”
“화산이라고요?”
셀린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게임 속에서, 호수의 바로 다음 스테이지가 시시각각 용암이 차오르는 용암 지대였다.
“그래. 요즘은 좀 잠잠한 것 같다만…… 그래도 항상 용암이 흘러내린다고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점점 밝아지는 셀린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설마, 네 꿈에서 나왔나?”
“네.”
셀린느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암이 계속해서 차오르는 땅이었어요. 화산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용암이니 당연히 화산에서 흘러내려야지.”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암은 화산에서 흘러내린다는 건 레온하르트는 물론, 셀린느에게도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줄곧 게임 속 용암 지대만 머릿속에 떠올렸을 뿐, 실제 화산과 연관을 짓지 못했다.
셀린느는 그 이유를 알았다.
‘스테이지만큼은 게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저주받은 저택에서 깨어난 지 어느덧 두 달이 흘렀고, 게임과 현실의 경계는 점차 흐려지고 있었다.
당장 레온하르트조차 실제 게임과 달랐으니까.
하지만 셀린느는 스테이지만큼은 게임이라고 믿었다.
그래야만, 그녀가 진엔딩을 보았을 때 게임을 끝내고 본디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방금 레온하르트의 말은 셀린느가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다 현실이야. 저택도, 광산도, 호수도.’
셀린느는 게임 속이 아닌, 실제 자신이 클리어했던 스테이지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게임 속 스테이지들처럼 하나를 클리어하자마자 바로 다음 스테이지가 맥락 없이 튀어나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두 레온하르트가 살아가고, 살아갔던 이 세상 속에서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즉, 진엔딩을 본다 한들 ‘진엔딩을 본 셀린느 헌트’로서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불안이 셀린느를 엄습했다.
본디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진엔딩을 보는 걸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00%라고 생각했던 가능성이 50%가 되었는데, 누가 절망하지 않을까.
연신 감사를 표하는 남작의 인사를 받으며 북부로 떠나는 순간까지도 혼란스러운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
“셀린느!”
마차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나타샤가 곧바로 달려와 그녀를 꽉 껴안았다.
“무사한 것 같네. 정말 다행이야.”
“다 레온하르트 덕분이에요.”
나타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마, 눈이 완전히 뒤집혀서…… 아, 엘머 남작가에서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면서!”
셀린느는 잘 해결되었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나타샤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일단 브란체 선생의 진료부터 받아 봐. 참, 네 호위 시녀 잘 달래 주고. 이번엔 진짜로 죽을 기세였거든. 하도 걱정되어서 미리암을 붙여 놨어.”
가슴이 철렁했다.
대니는 셀린느가 납치된 게 다 자신 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어디 있나요?”
셀린느는 무거운 마음으로 대니가 있다는 방의 문을 열었다.
“누구…… 루테!”
미리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반면, 대니는 멍한 눈으로 셀린느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몇 날 며칠을 자지도 먹지도 못한 꼴인 대니를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
“미리암, 대니.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루테께서 죄송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미리암이 바로 대답하려 했지만, 대니가 한발 빨랐다. 고집 센 입매가 움직여 딱딱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다 저 때문에…….”
셀린느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 납치한 건 흑마법사예요. 대니가 있었다 한들 뾰족한 수가 없었겠죠.”
“그래도!”
대니의 격앙된 목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루테께서 하루라도 덜 고생하셨을 것 아닙니까.”
셀린느는 자신이 납치된 게 사흘이든 이틀이든 큰 상관이 없었다고 말하려다 멈추었다.
지금 대니의 모든 사고방식은 오직 그녀 자신을 탓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럴 땐 굳이 반박하려 들지 않는 게 좋았다.
“대니,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에요. 전 앞으로도 계속 대니가 절 보호해 줬으면 좋겠어요. 대니는 그게 싫은가요?”
“그럴 리가 없……!”
셀린느는 단호하게 대니의 말을 끊었다.
“그럼, 잠을 좀 자요. 먹는 것도 제대로 먹고요. 건강한 모습으로 내 호위를 해 줘요.”
갑자기, 그간 강해 보이기만 하던 대니의 어깨가 들썩였다.
“루테…….”
“저도 절 탓하려면 얼마든지 탓할 수 있어요.”
셀린느는 농담처럼 자조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건, 누구에게든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전 대니가 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대니는 대답 대신 눈물이 일렁이는 눈으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고개를 돌렸다.
“미리암, 미안하지만 음식 좀 가져다주겠어요? 배가 많이 고파서요.”
잠시 후, 미리암이 셀린느가 좋아하는 음식을 쟁반 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셀린느는 입 한가득 퍼져 나가는 크림을 음미하며 열심히 먹는 대니를 바라보았다.
‘꼭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할까.’
어쩌면 대니의 보호를 받으며 더는 죽지 않는, 안전한 삶을 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물론 레온하르트의 목숨까지 위협해 가며 진엔딩 루트를 따라갈 필요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대니에게 푹 쉬라고 신신당부한 이후, 문밖으로 나서는 그녀의 뒤를 미리암이 따라붙었다.
“제가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어…….”
셀린느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레온하르트를 만나려고요.”
베르누이성으로 오는 내내, 셀린느는 마차 안에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자칫하면 모든 진실이 터져 나올까 싶어 두려웠기에.
그들은 나타샤의 탑을 빠져나가 레온하르트의 탑으로 향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삭막한 분위기인 레온하르트의 탑은 그들이 떠났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걷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
놀란 듯한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나?”
셀린느는 마른침을 삼켰다.
“할 말이 있어요.”
“뭐지?”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지만 말해야만 했다.
여태까지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힘을 빌려 진엔딩 루트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는 진엔딩 루트를 나아갈 동력조차 잃어버린 상태였다.
“……제 저주, 평생 풀 수 없으면 어떨 거 같아요?”
“상관없다. 말하지 않았나. 평생을 네 곁에 있어 주겠다고.”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확신이 흘러넘쳤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여태까지 그녀가 봐 온 레온하르트르는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진엔딩을 본다 하여 본디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진 지금, 자신과 그의 목숨을 계속해서 위험에 빠트리는 것보다야 안전하게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잠깐만.’
순간,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레온하르트는 저 약속을 지키지 못해.’
분명 자신은 레온하르트의 미래를 보았다.
핏발 선 눈으로 사람을 살육하기 위해 달려오는 살인귀의 모습을…….
불과 5년 뒤, 레온하르트의 모습이었다.
‘5년도 아니구나.’
셀린느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축하하는 무도회가 열리던 와중 납치되었고,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났다.
남은 시간은 단 4년.
‘그래,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를 위해서라도…… 진엔딩을 보아야 해.’
머뭇거리던 셀린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약속해 줘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가?”
레온하르트의 의아해하는 되물음이 돌아왔다.
“평생, 변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의 레온하르트로 제 곁에 있어 주겠다고요.”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놀란 동시에 떨떠름해 보였다.
“나는 불로불사가 아니니까.”
“그런 말이 아니에요.”
셀린느는 조금 화가 났다.
‘어떻게 이렇게 당연한 말을 못 알아듣지?’
“전 지금의 레온하르트가 좋아요. 왜냐하면…….”
셀린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자마자 방금 한 말이 레온하르트에게 어떻게 들릴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아, 그러니까, 그게…….”
셀린느는 횡설수설했다.
무얼 말해도 고백처럼 들리고, 다른 표현을 생각해 보자니 이곳이 게임 안이라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결국 그녀는 레온하르트가 알아듣지 못할 몇 마디를 중얼거린 끝에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셀린느는 바닥의 무늬를 세기 시작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멈춰 버린 머리는 돌아갈 줄을 몰랐다.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몸은 괜찮은 것 같으니 다행이군. 내일 출발해도 괜찮겠나?”
셀린느는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어디로요?”
“화산으로.”
레온하르트는 당연한 게 아니냐는 듯 대답했다.
“거긴, 레온하르트가 못 간다고…….”
“네 꿈에서 해결할 방법을 보았을 게 아닌가.”
셀린느의 눈이 반짝였다.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용암 지대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준비할게요.”
“그리고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와 눈을 맞추었다.
“저주를 풀기 전까진 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다.”
“뭐라고요?”
셀린느는 멍하니 되물었다.
여태까지 자신은 4년이라는 시간 안에 진엔딩을 보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는 마치 며칠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5년, 10년이 걸리면요?”
“그럼 10년 뒤에 돌아가겠지.”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임무도 수행해야 하잖아요. 제게만 매달리는 건 불가능해요.”
“어차피 원래도 임무 수행 중 임무를 받곤 했어. 내 위치를 지속적으로 알리면 된다.”
“대공 각하께는…….”
“이미 말씀드렸다.”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버지는 항상 내 의견을 존중해 주시지. 임무 수행에만 차질이 없다면 뭘 하든 큰 신경을 쓰시지 않아.”
“…….”
셀린느는 멍하니 레온하르트만을 바라보았다.
여태까지 레온하르트는 몇 번이나 셀린느를 놀라게 했지만, 지금만큼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저, 뭐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뭐든지.”
“왜…….”
셀린느는 살짝 머뭇거렸다.
“레온하르트가 이렇게까지 해 주는지, 모르겠어요.”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무릎을 살짝 굽혀 셀린느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셀린느는 도저히 자신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을 참아 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열렸다.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사람 역시 네가 처음이니까. 셀린느 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