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셀린느가 죽지만 않을 정도로 다쳤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레온하르트는 황급히 셀린느가 발견한 신비한 약 얘기를 꺼냈다.
“당장 그 약을…….”
“안 다쳤어요.”
“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청회색 눈은 아무런 고통의 기색 없이 오직 그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레온하르트가 수없이 봐 온 환상통도, 온몸의 뼈가 으스러졌다면 분명 느끼고 있어야 할 고통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셀린느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라쉬르로 깨 달라 부탁했지만 깨지지 않았던 수정구가 몇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이게 충격을 흡수한 것 같아요.”
“뭐라고?”
예언자들이나 쓰는 수정구가 강력한 마력을 흡수한다는 건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셀린느는 분명 큰 착각을 하고 있으리라.
레온하르트는 찬찬히 설명했다.
“수정구는 마력을 흡수하지 못한다. 당연히 방금 충격으로 깨지기야 깨졌겠지. 하지만 그것과 네가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은 건 상관이…….”
“이건 평범한 수정구가 아니에요. 라쉬르로 깨지지 않는 수정구를 본 적 있나요?”
말문이 턱 막혔다. 라쉬르로 부술 수 없는 수정구는 상식상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느가 마물에만 부서지는 것 같다고 말했고, 실제로 마물의 발톱에는 손상을 입었기에 그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 꿈에선, 어떻게 나왔나.”
“저와 관련이 있는 이유로만 깨지는 건 확실했어요.”
셀린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뭔지는 몰랐어요. 마물에만 깨지나 싶어 추측했을 뿐…… 하지만 이제 알았어요.”
조금 전, 명백히 살의를 품은 아이의 마력이 그녀를 강타했다.
셀린느는 죽음의 고통에 대비하며 이를 악물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쨍그랑!
대신,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귀에 명료하게 울렸다. 셀린느는 소리의 정체를 직감했다.
수정구가 깨지는 소리.
아가티르수스에서 수정구에 금이 갔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동시에 그녀는 라쉬르에도 금 하나 가지 않는 이 수정구가 어떨 때 깨지는지 드디어 깨달았다.
‘마물에만 깨지는 게 아니야. 이건…… 목숨 대신이야.’
수정구는 셀린느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살리고 깨진다.
하지만 셀린느는 기뻐할 수 없었다.
수정구가 그녀의 목숨을 한차례 살려 주고 깨진다는 건, 달리 말해 수정구를 깨기 위해선 죽을 위기에 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눈앞이 조금 아득해졌다.
앞으로도 이런 퀘스트들이 몇이나 나타날 것이고 그때마다 셀린느는 우연을 기다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목숨을 던질 것이다.
최대한 신속히 이 게임을 클리어해야만 하니까.
‘그래, 머뭇거릴 순 없어.’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5년.
길다면 긴 시간이었으나 셀린느는 언제 돌발 상황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온하르트가 평생 그녀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사람 일은 항상 모르는 법이다.
예측 불허인 게임 속 세상이라면 더더욱.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지원해 줄 수 있을 때 게임을 최대한 클리어해야 한다.
“뭘 알았단 말이지?”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레온하르트가 대답을 재촉하는 걸 보니 지나치게 생각에 잠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건 제 죽음을 막아 주고, 대신 깨지는 듯해요.”
셀린느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감춘다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흔들리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궤짝이란 궤짝은 다 뒤져 보아야겠군.”
셀린느는 천천히 일어섰다. 이상하게도 피로가 다 가신 느낌이었다.
“안톤은…….”
“조금 골치 아프게 되었다.”
‘역시.’
레온하르트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투였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제 레온하르트에게 조금 골치 아픈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았다.
“구할 수 있나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벌렸으나, 셀린느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가능하면 구해 주세요. 전 신경 쓰지 말고요.”
“……그럴 순 없다.”
“그럴 수 없는 게 어딨어요.”
셀린느는 살짝 미소지었다.
“절 제물로 삼아서 안톤을 살리라는 얘기도 아니잖아요. 그냥 안톤을 구할 때, 제게 너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에요.”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에야 레온하르트는 대답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그는 라쉬르로 아이가 있을 방향을 정확히 겨냥했다.
고삐 풀린 아이의 마력을 가두는 작업을 마무리 단계에서 중단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듯했다.
‘……!’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본디 무채색에 가까웠던 안톤 엘머의 마력은 이제 완연한 살기를 띠고 있었다.
살기의 타깃은 레온하르트, 자신이었다.
“안톤, 마력을 거둬라.”
레온하르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명령했지만, 아이의 마력은 되레 더욱 폭주하기 시작했다.
‘가둬 둔 게 악수가 되었군.’
엘머 남작은 아들을 살리고 다른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가두어 놓고 국가로부터 마냥 숨기기만 했다.
그동안 아이는 이 지하의 지배자가 되었다.
잠시나마 자신과 셀린느를 농락할 정도로.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계단 밑에서 아이 쪽으로 라쉬르를 겨냥한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살기 띤 마력이 그를 향해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지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 마무리 단계에서 중단했던 작업의 흐름을 다시금 붙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어둠과 함께 그를 옥죄려 시도하던 아이의 마력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날 선 살기 역시 존재조차 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셀린느에게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뒤에서 그녀가 쫓아오는 게 느껴졌다.
지하에서 나가는 출입문 바로 앞에 한 어린아이가 축 늘어져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조심스레 아이의 맥박을 확인했다.
셀린느는 입을 간신히 열었지만, 몇 마디 뜻 모를 웅얼거림만 나올 뿐이었다.
다행히 레온하르트는 바로 셀린느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알아차렸다.
“죽진 않았다. 이건 그간 지나치게 마력을 끌어다 쓴 결과지. 며칠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긴 하겠다만 무사할 거야.”
셀린느는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공자!”
엘머 남작이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왔다.
충혈된 눈이 축 늘어져 레온하르트에게 안겨 있는 어린 아들에 닿았다.
“공, 공자…….”
“괜찮습니다.”
“예?”
“더 이상 자제분의 마력은 폭주하지 않을 겁니다. 며칠 동안 잠만 자긴 하겠지만, 무사합니다.”
엘머 남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는 상태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레온하르트에게서 아들을 받은 다음, 앙상해진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말…… 정말로.”
엘머 남작은 마치 자신이 아는 말이 그 한 단어밖에 없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예.”
레온하르트는 잠시 뜸을 들이고 사무적인 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일주일 정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몸이 저절로 회복하는 과정이니 염려치 마십시오.”
“안톤…….”
“그리고, 깨어나면 믿을 만한 마법사를 반드시 스승으로 붙이십시오.”
엘머 남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꼭 그래야만 합니까. 마법을 쓰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자제분은 길을 잃어 홀로 집을 찾다가 누군가가 내민 손을 덥석 잡은 어린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다시는 홀로 길을 잃도록 내버려 두시면 안 됩니다.”
엘머 남작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깨달음에 찬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제가, 제 손으로 안톤을 망친 거군요.”
레온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
셀린느는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제 발로 침실에 들어오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기억이 없었지만, 폭신한 이불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퀘스트!’
셀린느의 머릿속에 어제 미처 확인하지 못한 양피지의 문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갈라진 수정구 사이에서 구깃구깃한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용의 잠을 깨워라]
‘무슨 뜻이지?’
셀린느는 양피지를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이제는 예전처럼 막막하지 않았다.
분명 다음 스테이지로 인도하는 퀘스트일 것이다.
‘다음 스테이지는…… 용암 지대였지.’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첫 번째 스테이지인 저주받은 저택에서 세 번째 스테이지인 고문실로 바로 건너뛰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중간에 한두 스테이지를 건너뛸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남은 스테이지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잠자는 용과 관련이 있는지 알아내려 애썼다.
‘……모르겠어!’
게임 속 등장하는 그 다양한 몬스터 중 중 잠자는 용은커녕 용과 비슷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설마……!’
얼토당토않은 듯한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셀린느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미동도 없이 손목에 착 감겨 있는 자그마한 용, 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안 돼.’
셀린느는 멍하니 루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닐 것이다.
자신이 루를 발견한 건 지극히 우연에 불과했다.
‘애초에 내가 루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이 퀘스트, 달성하지도 못하는 거잖아.’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며 소매를 내렸다.
‘일단 레온하르트에게 물어봐야겠어.’
셀린느는 침대 바로 옆 놓여 있는 깨끗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다음, 문을 열려다 되레 자신 쪽으로 열리는 문에 이마를 부딪쳤다.
“괜, 괜찮은가?”
셀린느는 고개를 들었다.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조심해. 겨우 안 죽었나 했는데, 문에 부딪쳤다고 죽으면 허탈하니까.”
“이 정도로 죽진 않아요.”
“다행이군. 죽은 듯이 자길래 좀 걱정했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농담 아닌 농담에 웃을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어느 정도 잔 건가요? 좀 오래 자긴 했는데…….”
“이틀.”
셀린느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틀이나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겪은 일을 생각하면 무리가 아니지. 중간중간 깨어나 물도 마시긴 했는데, 혹시 기억이 나나.”
“아뇨.”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지난 이틀 내내 그녀의 곁에서 간호했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갑자기, 셀린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기시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가티르수스에서 보았던 것과 쏙 빼닮은 양피지 조각이었다.
“……설마.”
“그 설마가 맞아요. 이 말에 따라야 하는 것 같은데, 뜻을 전혀 모르겠어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에게서 양피지를 건네받았다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혹시, 레온하르트도 모르겠나요?”
셀린느의 목소리가 살짝 불안에 떨렸다.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를 말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여긴 갈 수가 없는 곳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