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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49화 (49/120)

49화.

“예……?”

짤막한 한 음절에 커다란 감정이 휘몰아쳤다.

남작의 얼굴에 사랑이 풀무질하는 희망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제가 남작의 원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아닙니다.”

엘머 남작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공자, 부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엘머 남작이 다리를 절뚝이며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레온하르트는 그 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쇠창살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전 어떻게 할까요?”

“출구 쪽에 있어. 여차하면 뛰어 올라가고.”

셀린느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더는 그의 뒤에만 붙어 있으라고만 하지 않고, 그녀의 선택을 신뢰했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움켜쥔 채 라쉬르의 푸른 불빛에 빛나는 레온하르트를 응시했다.

푸른 궤적이 번쩍였고, 쇠창살은 순식간에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은 다음, 어둠 속으로 성큼 걸어가며 상대의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다.

“안톤 엘머.”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안톤 엘머!”

이번엔 어둠 저편에서 마력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안도했다.

불안과 공포에 사나워졌을 뿐, 아직 어둠에 물들지 않은 마력이었다.

“나는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다.”

“……!”

어둠 속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레온하르트는 상대의 마력이 그의 말에 반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둡고, 뒤틀리는 방향으로.

‘안 좋아.’

레온하르트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아직 손을 허리춤에 가져다 대지도 않았다.

“해치러 온 게 아니다. 널 도와주러 왔다.”

“……아냐!”

상처 입은 맹수의 울음소리 같은 외마디 외침이 지하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화들짝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조금 전 외침은 아직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어린 사내아이의 목소리였다.

섬뜩한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제법 큰 자식이 있다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고, 끝까지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던 엘머 남작의 모습.

무엇보다도 안톤이 혼자 흑마법을 연구했냐는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돌아온 모르겠다는 대답…….

안톤 엘머는 정말로 어린아이였다.

레온하르트는 방금 외침이 들려온 방향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안톤, 널 죽이고 싶진 않다.”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마력은 레온하르트에게 응답하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다. 너에게나 나에게나 불행한 일이겠지. 네 아버지에게도.”

안톤의 미성숙한 마력은 레온하르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반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레온하르트의 무표정한 얼굴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이를 라쉬르로 벤 적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마침내 레온하르트는 목소리가 들렸던 곳에 도달했다.

그는 불필요한 자극을 피하기 위해 쇠창살을 자른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라쉬르를 꺼내지 않았다.

당연히 빛 한 줄기 없이 오직 감각에만 의지해야 했다.

“어려울 것 없다. 내 손을 잡아라.”

그는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

텅 빈 공간 너머로 벽이 느껴졌다.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한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지시대로 여차하면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 있도록 출구 쪽에 꼭 붙어 있었다.

흑마법의 무서움은 충분히 겪어 보았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고 덤비다가 레온하르트의 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뭐지?’

갑자기, 레온하르트의 아이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끊겼다.

셀린느는 침묵 속에서 링조르를 움켜잡고 상황을 판단했다.

수도 없이 죽음에 직면한 그녀의 직감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를 도우러 가는 것과, 계단을 뛰어올라 도망치는 것.

‘라쉬르가 아직 뽑히지 않은 걸 보니, 레온하르트가 판단하기에 위험한 상황은 아니야.’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뿐이었다.

레온하르트에게는 위험하지 않지만 그녀에게는 위험한 상황.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허어억…….”

이미 남작저에 도착하기 전부터 지쳐 있었던 셀린느는 계단을 오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 헐떡였다.

‘아, 아예 나가는 게 좋겠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무렵, 셀린느는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녀는 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

1층으로 나가는 문 앞 바로 앞에, 어린아이 한 명이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의 초점이 서서히 셀린느에게 맺혔다.

셀린느의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누군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안톤 엘머가 저 밑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나가는 문 코앞에 있었다.

그녀는 계단을 뛰어오르기 직전 품에 집어넣었던 링조르를 꺼내려다 멈추었다.

안톤은 아직 흑마법사가 아니다.

마법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고 했으니 실력도 아직 미천할 터.

링조르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이리라.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끝까지 라쉬르를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안톤 엘머는, 아직 구할 수 있어.’

그녀가 안톤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건 자살 행위겠지만,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해.’

셀린느는 우선순위를 생각했다.

아이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레온하르트뿐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현재 안톤의 위치를 모르고 저 밑 어딘가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안톤이 있다고 소리치면…… 자극하는 꼴이 되겠지.’

셀린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셀린느라고 해, 안톤.”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레온하르트가 자신과 안톤의 위치를 파악하기만 하면 되었다.

더 얘기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전 말만으로도 레온하르트에게는 충분하리라.

셀린느는 서서히 뒤로 물러섰다. 괜한 행동을 취해 안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조금만 더…….’

셀린느는 속으로 쉴새 없이 중얼거리며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은 심장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레온하르트가 곧 이 불쌍한 아이를 구하러 올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등은 식은땀으로 흥건해졌지만 아직 레온하르트의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늦지?’

셀린느는 아이를 곁눈질했다.

여전히 아이의 시선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딱히 공격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내려가야겠어.’

어쩌면 레온하르트는 계단을 올라올 생각을 못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아이에게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이는 링조르의 존재를 모른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 자신은 철저한 약자로 보였을 터.

그런 자신을 여태껏 공격하지 않았다는 건 아이에게 공격 의지가 없다는 뜻이리라.

셀린느는 살금살금 계단을 내려갔다.

예상대로 어두컴컴한 지하 공간에 도달할 때까지 그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 공간에는 오직 어둠뿐이었다.

‘기척을 숨기고 있는 걸까.’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레……!”

그 순간, 거대한 짐승의 발톱처럼 느껴지는 일격이 그녀를 강타했기에.

레온하르트의 경험상,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안톤 엘머를 죽이는 건 간단하다. 하지만 살리는 건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안톤 엘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무표정하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죽여야 할 수도.’

꽉 조여드는 가슴과 반대로, 머리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다.

아이는 이미 그들을 죽이려는 의도를 품었다.

조금 전, 아이가 있어야 했지만 없던 어둠 속 공간에서 느껴진 건 명백한 살의였다.

-타다닥

셀린느가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는 소리였다.

레온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적어도 아이가 셀린느를 해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어둠 속을 천천히 수색하기 시작했다.

지하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아이의 마력은 불안정하다.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아이의 폭주를 무사히 가라앉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몇 분 후, 계단 위에서 들려온 셀린느의 목소리에 레온하르트는 뼛속까지 얼어붙었다.

“나는 셀린느라고 해, 안톤.”

“……!”

레온하르트는 당장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가 셀린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다면, 아이는 순식간에 셀린느를 해칠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검집에서 라쉬르를 꺼내어 계단 위를 향해 겨냥했다.

꽤 오래 한곳에 머물며 비축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런 거였나.’

아이는 쇠창살이 잘리자마자 계단 위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실제 위치를 정확히 파악했으니 어려운 일은 다 끝났다.

단 몇 분 후.

거짓으로 뿌려 놓은 마력의 흐름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본연의 줄기를 찾을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아이의 날뛰는 마력을 차단하고 이성을 보호할 방패를 라쉬르로 그려 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온하르트는 본능적으로 그에게 필요한 시간이 오 초 이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라쉬르를 치켜들었다.

마침내, 라쉬르를 휘둘러 여태까지의 작업에 마침표를 찍을 시간이었다.

바로 그때, 단말마의 비명이 지하 공간 전체에 울려 퍼졌다.

“레……!”

레온하르트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방금 비명이 들려온 곳으로 뛰어갈 뿐이었다.

순식간에 라쉬르에 새파란 불길이 치솟았고, 오직 어둠밖에 없었던 지하 공간이 환하게 밝혀졌다.

깊은 바다만큼 푸른 두 눈에 셀린느의 처참한 모습이 뚜렷하게 들어올 정도로.

셀린느는 미동도 없이 바닥에 크게 엎어져 있었다.

등 뒤에서 공격당한 듯, 그가 걸쳐 준 망토가 처참하게 찢겨 있었다.

남작저를 할퀴었던 발톱 자국과 비슷했다.

피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 정도 일격이라면 전신의 뼈가 부서졌을 것이다.

레온하르트의 머리는 유일한 분석을 토해 냈다.

‘……죽었어.’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일그러지지도, 떨리지도 않았다.

되레 감정이라곤 존재하지 않은 사람인 것처럼 무표정한 상태로 셀린느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닥에 엎어진 셀린느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살아났을 때 가장 처음으로 본 게 지하의 더러운 바닥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었으면 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손이 가녀린 어깨에 조심스레 닿은 순간, 셀린느의 몸이 크게 움직였다.

“……?”

레온하르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셀린느의 죽음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이렇게나 빨리 살아날 리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열리는 청회색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 저…….”

그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셀린느의 말을 따라갔다.

“안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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