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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48화 (48/120)

48화.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에서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더 이상 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주위를 살피려고 했지만 시야가 온통 흐릿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셀, 셀린느…….”

머리에 조심스레 와 닿는 레온하르트의 손길은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져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셀린느는 잠시 노력한 끝에야 간신히 눈의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새파란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괜찮아요?”

“누가 할 소릴……!”

레온하르트는 먹먹한 한마디를 토해 냈다.

흑마법사가 셀린느를 숨긴 땅을 알아내기까지 자그마치 사흘이나 걸렸다.

결계의 파훼법을 알아내기까지는 반나절이 더 걸렸고.

마침내 결계를 파훼한 순간, 설원 위에 새하얗게 질려 누워 있는 셀린느가 눈에 들어왔다.

셀린느에게로 달려가는 짧은 시간 동안 그의 심장은 바닥으로 두 번, 세 번 곤두박질쳤다.

“지금 네 꼴을 알기나 하는 건지…….”

“어지러워요.”

레온하르트가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 없는 셀린느의 몸을 일으키며 망토를 씌워 주었다.

그제야 셀린느는 자신이 새하얀 눈밭 위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봄에도 황무지였을 법한 눈에 뒤덮인 평야만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병사들도, 성도, 골목도 모두 결계였던 것이다.

레온하르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말에 탈 수 있겠나?”

“모르겠어요.”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조심스레 블랙 위에 태웠다. 셀린느는 아주 잠시간 불안하게 비틀거렸으나 균형을 잡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참아다오. 근처에 엘머 남작저가 있다.”

“남작저라니요?”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하는 셀린느의 반응에 레온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수도 인근이다. 흑마법사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북부에 결계를 치고 사람을 숨길 리가 없으니까.”

“수도요?”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그럼, 꽤 시간이 지났겠네요.”

“사흘.”

“사흘…….”

레온하르트는 그동안 얼마나 미칠 듯한 심정이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지난 사흘간,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만이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대공가엔 아무런 연락이 안 갔나요?”

“그냥…… 네가 사라졌었다. 그걸로 끝이었어.”

“역시 그랬군요.”

셀린느는 한숨을 토해 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인질도 뭣도 아니었다.

차라리 대공가에게 무언가를 얻어 내기 위한 인질로 붙잡히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앞으로 흑마법사들은 계속해서 그녀를 진정한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리라는 생각에 소름이 쭈뼛 끼치고 가슴이 죄여 들었다.

“절 가둔 흑마법사는…….”

“목숨이 아까운지 결계만 남기고 멀리 달아났다. 네가 안에서 무엇을 보았든, 그놈이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해.”

“그런가요.”

셀린느는 쓴 한숨을 뱉었다.

당연히 여태까지 레온하르트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던 것처럼 그녀를 납치하고 겁박한 흑마법사도 금세 응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전지전능한 사람은 없는 법이다.

“결계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깨어나니까 처음 보는 방 안에 있었어요. 손은 쇠사슬에 묶였었고요.”

셀린느는 처음부터 상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겐 사소하게 느껴지는 사실도 레온하르트에겐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계속 버티고 있었는데, 레온하르트가 왔어요.”

“…….”

말이 눈밭을 달리는 소리만 서걱거리며 날 뿐, 레온하르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조금 불안해져 레온하르트를 부르자마자 후회했다.

어쩌면 레온하르트는 삼일 밤낮을 잠 한숨 못 잔 채 자신을 찾아 헤매느라 대답할 힘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입에선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청회색 눈이 놀라움으로 흔들렸다.

“레온하르트가 왜 미안해요. 나쁜 건 그놈인데.”

“방심했었어. 그놈들이 널 노릴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방심한 건 저도 마찬가지잖아요. 앞으로 같이 더 조심하면 되죠.”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셀린느를 자신 쪽으로 아주 살짝 끌어당겼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에 대한 반성도, 미래에 대한 대응책도 지금은 얘기할 때가 아니었다.

셀린느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레온하르트에게 의지하며 블랙을 타고 있는 지금이, 그 어느 순간보다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의 시야에 고풍스러운 저택이 들어왔다.

“저기가 엘머 남작저다. 갑작스레 방문하니 당황할 순 있지만, 우릴 내치지는 않을 거야.”

셀린느는 과연 이 제국 안에서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내칠 사람이 있긴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의 대문은 꾸벅꾸벅 조는 문지기 한 명이 지키고 있었다.

문지기는 레온하르트를 보자마자 고위 귀족이라고 짐작했는지, 차렷 자세로 정중하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예……?”

문지기의 눈이 튀어 나갈 듯 커지다가 곧바로 문을 활짝 열었다.

“들, 들어오십시오! 어, 어쩐 일이십니까?”

“하룻밤 쉬어갔으면 한다만.”

“예……?”

문지기는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감히 레온하르트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는지, 저택 안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나이 지긋한 집사가 나와 그들을 맞이했다.

“하룻밤 신세 져도 되겠는가?”

“예, 어서 들어오십시오.”

마구간지기가 달려와 블랙을 마구간으로 데려갔다.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천천히 정원을 걸었다.

‘뭐지……?’

셀린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와중에도 이상한 점을 몇 가지 눈치챘다.

분명 말끔하게 가지치기가 되어 있어야 할 정원의 나무들이 하나같이 반으로 쪼개지거나, 허리가 꺾어져 밑동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이 다 뒤덮지 않았다면 더욱 참혹한 현장이었을 것이다.

레온하르트 역시 셀린느와 마찬가지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무들이 왜 다 이렇지?”

“아, 아…… 그게…….”

집사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됐다. 남작이 함구령이라도 내렸나 보군.”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말주변이 미천하여.”

“엘머 남작은 어디 계시지? 신세를 질 분인데, 인사부터 드려야 하지 않겠나.”

집사는 현관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공자님, 잠시 보고드리고 올 터이니 기다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전 제국에서 그를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 뿐이었다. 황제와 황태자.

“안내하게. 당장.”

집사는 더욱 거부하다간 오히려 더 수상쩍어 보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곁에 꼭 붙어 걸었다.

정원과 달리 저택 내부에선 달리 이상한 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작의 집무실이 있는 듯한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상황은 달라졌다.

“레온하르트, 저건…….”

“쉿.”

셀린느가 거대한 짐승의 발톱에 의해 뜯겨 나간 것 같은 벽지와 계단을 슬쩍 가리키자, 레온하르트가 슬며시 경고했다.

셀린느의 가슴이 세차게 뜀박질했다.

멀쩡한 남작가의 저택이 마물에 크게 훼손당한 듯한 모습을 띠고, 그 사실을 숨기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집무실 문 앞에 도착했다.

“주인님, 베르누이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단 몇 초 만에 문이 벌컥 열렸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엘머 남작은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었지만, 중병에 걸린 것처럼 양 볼이 움푹 패고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엘머 남작, 편찮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실례했군요.”

“아닙니다. 공자께서 방문해 주시다니 영광이군요. 이런 변방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엘머 남작의 대답은 평이했으나 두 손과 입술은 겁에 질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이곳에 하룻밤 묵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예……? 그게, 무, 무슨…….”

“남작께선 이미 아실 텐데요.”

“그, 그, 그런 건 모, 모릅니다.”

“전 장님이 아닙니다. 정원의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냉정하다 못해 냉혹할 정도였다. 그는 집무실 문에 크게 긁힌 발톱 자국을 가리켰다.

“밖으로 나가 볼 것도 없이, 당장 이 자국이 그 답이 될 것 같군요.”

침묵이 흘렀다.

엘머 남작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짓이기듯 내뱉었다.

“……제가 대답하지 않는다면, 공자께선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강제로 이 집을 수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엘머 남작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셀린느와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자연히 남작의 시선을 따라 천장에 닿았다.

“……!”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천장 전체가 날카로운 날에 의해 난도질이라도 된 듯한 모양새를 띠고 있었다.

“따라오십시오.”

엘머 남작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자세히 보니, 왼쪽 다리를 미세하게 절고 있었다.

‘아니야.’

셀린느는 엘머 남작이 크게 다친 왼쪽 다리를 숨기려 애쓰며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도 분명 눈치챘을 터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엘머 남작의 뒤를 따랐다.

엘머 남작은 계단을 절뚝이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셀린느의 의문은 엘머 남작이 1층에 도달해, 어두컴컴한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었을 때 풀렸다.

엘머 남작은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대체 엘머 남작이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 줄지는 몰라도 상당히 충격적인 광경일 것이다.

마침내 엘머 남작의 다리가 멈추었다.

셀린느와 레온하르트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어둠과 어둠 사이를 가로막은 굵은 쇠창살이었다.

다음 순간, 셀린느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엘머 남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 아들, 안톤입니다.”

“……역시 아드님이셨군요.”

레온하르트는 전혀 놀란 듯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엘머 남작은 쓰디쓴 대답을 내뱉었다.

“예.”

“갑자기 발현한 겁니까? 마력을 가진 자제분이 계신다는 소리는 못 들었습니다.”

“안톤은 갓난아기일 때 이미 발현했습니다.”

“그럼 왜…….”

“제 고모님은 흑마법사로서 돌아가셨습니다.”

“……!”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전 안톤에게 그런 위험을 안겨 줄 수가 없었죠. 그래서 마법은 전혀 가르치지 않았는데, 차라리 가르칠 걸 그랬나 봅니다.”

“홀로 연구하다 흑마법의 유혹에 넘어간 거군요.”

“잘 모르겠습니다.”

엘머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젠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저것이 과연 내 아들이 맞는지도. 내가 저것을 아직도 사랑하는지도.”

셀린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대답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작님은 안톤을 사랑하시는 게 맞아요. 아직도 포기하지 않으셨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손을 검집에 가져다 댄 채,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명령했다.

“남작,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엘머 남작은 명에 따르는 대신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제 자식입니다. 끝까지 곁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은 눈으로 소리 없는 신경전을 벌였다. 놀랍게도, 먼저 물러난 쪽은 레온하르트였다.

“엘머 남작, 아드님껜 아직 구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나가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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