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에취!”
셀린느는 거듭된 재채기에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감기 기운은 극심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제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약을 가지고 온 대니가 자신을 깨우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대니, 약 있나요?”
다음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긴 대니도 약도 없어, 루테.”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말한 사람은 난생처음 보는 젊은 남자였다.
“……누구시죠?”
“글쎄, 말한다 한들 루테께서 아실까?”
셀린느는 눈앞의 남자를 찬찬히 관찰했다.
남자는 새카만 외투를 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이 세계의 사람치곤 제법 부유한 옷차림이었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물을 필요도 없었다.
‘납치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도, 대니도 너무 방심했었다.
마법사가 된 이후로 누군가가 그녀의 곁에 24시간 동안 상주할 필요가 없었다.
힘을 잃고 난 이후에도 링조르가 있었다.
당연히 대니가 좀 더 신경을 써 주긴 했으나, 약을 가지러 다녀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에 문제가 발생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하는 게 뭐죠?”
머릿속에 몇 가지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러니 마법을 탐낸 다른 가문이…….
“우리는 루테께 특별히 원하는 건 없어.”
“……?”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얌전히 여기 있어 주기만 하면 돼.”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며 몸부림을 쳤다.
두 손이 쇠사슬로 묶여 있었고 몸 전체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마법을 쓰려 해도 소용없어. 루테같은 꼬마 마법사들은 부술 수 없는 결계가 쳐져 있거든.”
“……마법사인가요?”
만약 이 남자가 마법사라면 칼 루테처럼 곧바로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럴 리가.”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용병이야. 돈만 주면 일하는.”
“대공가를 위해 일해 볼 생각은 없나요?”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신뢰도 나름 중요한 값어치라서 말이야.”
남자는 어깨를 털며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군. 이건 루테를 위해서 말해 주는 건데, 밖으로 나올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왜죠?”
“나와 보면 알게 될걸.”
셀린느가 남자의 말이 경고인지, 함정인지 고민하는 사이 남자는 이미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밖에서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하자.’
셀린느는 자신의 차림부터 살폈다. 침대에 누울 때 그대로인 두꺼운 잠옷 차림이었다.
‘있으려나.’
셀린느의 가슴속에 작은 희망이 차올랐다.
그간 숙달되는 데 도움이 된다 하여 한시도 몸에서 링조르를 떼어놓지 않았다.
앞으로 묶인 두 손을 허리께에 가져다 댔다. 두꺼운 잠옷 너머로 링조르의 감촉이 느껴졌다.
셀린느는 추위에 굽은 손가락을 펴서 링조르를 잡으려 애쓰며 납치범의 목적을 생각했다.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얌전히 있으라고 했지.’
아마 자신은 인질일 것이다.
‘왜 하필 나일까.’
결계까지 준비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인질은 반드시 셀린느여야만 했다는 뜻이다.
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에 손가락이 링조르의 날카로운 날에 언뜻 닿았다.
“허억……!”
셀린느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마력 그 자체인 링조르가 미쳐 날뛰고 있었다.
결계가 링조르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환희와, 링조르를 제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동시에 떠올랐다.
‘제어해야 해.’
셀린느는 이를 악물며 링조르를 다스리려 애썼다.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금은 그녀를 도와줄 레온하르트도, 폭주하면 막아 줄 칼 루테도 없다.
오직 혼자서 링조르를 제압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녀의 정신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됐다, 됐어…….”
앞머리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고, 전신은 부들부들 떨렸다. 여전히 목에선 잔기침이 토해져 나왔다.
하지만 링조르는 셀린느의 손에 들어왔다.
-우지끈!
셀린느는 마력을 움직여 두 손을 묶은 쇠사슬을 완전히 끊어 냈다.
온몸이 납덩이처럼 느껴졌다. 맨바닥에라도 드러누워 쉬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남자가 말한 상황이란 게 대체 뭔지는 몰라도 그녀에게나 레온하르트에게나 좋은 계획은 아닐 것이다.
셀린느는 당장 문으로 달려갔다.
남자의 경고가 걸리긴 했으나 저들은 그녀가 링조르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찌어찌 나와도 마법을 쓸 수 없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뜻이었으리라.
셀린느는 링조르를 휘둘러 문을 통째로 베어 냈다.
-쾅!
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밖으로 넘어졌다.
“누구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을 칭칭 두른 병사 여럿이 바로 나타났다.
셀린느는 곧바로 링조르를 휘둘러 병사들을 그녀가 갇혀 있던 방으로 날려 버렸다.
“으읍……!”
병사들은 방 한구석에 한데 엉켜 쓰러졌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걸 보니 다리가 부러진 모양이었다.
셀린느는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탑이었구나.’
나선형 계단이 끝도 없이 아래로 뻗어 나가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셀린느는 주저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거릴 무렵 바닥이 보였다.
셀린느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벌써 교대…… 어?”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링조르가 불러일으킨 바람에 추풍낙엽처럼 흩날려졌다.
셀린느는 몸을 날려 짐 마차 뒤편 어둠 속으로 숨으면서 주위를 파악했다.
사람들로 제법 복작복작한, 처음 보는 성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어딘지 파악할 시간도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다시금 품속에 넣은 채 으슥한 골목으로 달아났다.
‘아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고통을 느끼고야 마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이물질로 뒤덮인 돌바닥을 내딛는 맨발엔 찌르르한 고통이 퍼져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더는 고통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셀린느는 가만히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사방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셀린느는 아직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주위를 살피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너무 조용해…….’
이 골목도 사람이 사는 집들로 그득할 터.
하지만 지나치게 조용했다.
생활 소음이나 개 짖는 소리, 마차가 덜거덕거리며 달려가는 소리 중 무엇 하나 들리지 않았다.
셀린느는 링조르를 꽉 쥐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두려운가? 동족이여.”
“……!”
셀린느는 발화자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서도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흑마법사의 인근이면 으레 느껴져야 할 사악한 기운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애처롭군. 이 정도 힘을 가졌는데도 나 한 명 못 찾고 있다니…….”
“원하는 게 뭔가요?”
“뭐? 원하는 것? 으하하하하……!”
셀린느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훅 끼쳐 오는 웃음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족이여, 내가 원하는 건 없다.”
“그럼,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거죠?”
“그대가 원하는 게 있을 테니까.”
“……?”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순간, 머릿속에서 몇 가지가 스쳐 지나갔다.
당장 이 섬뜩한 거리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베르누이성으로,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죽어도 죽지 않는 저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돌아가고 싶어.’
여태까지 생각 자체를 피해 왔던 지점에 도달하자 셀린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돌아가고 싶었다. 이 게임을 하기 전, 평범했던 삶으로…….
‘정신 차려.’
셀린느는 이를 꽉 악물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게임 속 캐릭터에 불과하다. 자신의 깊숙한 소망을 알 리가 없다.
“베르누이성으로 돌아가는 것 말곤 원하는 게 없어요.”
“그보다 더 원하는 게 있을 텐데.”
“……?”
셀린느는 바싹 긴장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죽고 또 죽는 저주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반동에 걸려 있을 터.”
“아…….”
셀린느에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대놓고 즐거워하는 기색을 띠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라니, 애처롭군.”
“반동을 푸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납치한 건가요?”
“그래. 친절하지?”
셀린느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 대가로 뭘 요구할 거죠?”
짚이는 바가 있었다. 이 마법사는 아마도 다른 가문의 루테일 것이다.
그러니 반동을 풀어 주는 대가로, 셀린느가 다른 가문에 복속되기를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동족에게 대가 따윈 바라지 않아.”
순간, 깨달음이 번개처럼 셀린느를 직격했다.
‘이 남자는 흑마법사야.’
칼 루테도, 무능했던 스승 에밀 루테도 셀린느를 동족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녀를 그런 식으로 불렀던 건 오직 아가티르수스의 흑마법사뿐이었다.
그리고 마법을 쓰는 것만이 그녀의 행복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말투까지.
‘오래된 흑마법사끼리는, 서로 소통할 수 있다고 했지.’
셀린느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안이했는지 깨달았다.
아가티르수스의 흑마법사는 죽기 직전,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전 제국의 흑마법사에게 퍼뜨렸을 것이다.
이자도 그중 하나일 것이고.
“전 흑마법사가 되지 않을 거예요. 반동을 평생 못 푼다 한들 상관없어요.”
셀린느는 조용히 말했다.
“하, 그런 것치곤 링조르에 매달리던데.”
‘역시.’
셀린느는 서서히 목소리의 정체를 깨닫고 있었다.
처음 갇혔었던 방과 탑, 병사까지 전부 그녀의 능력을 최대한도로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었을 것이다.
‘제일 처음 그 남자야.’
셀린느는 확신했다.
자신은 용병에 불과하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그 남자.
당시 정신이 없어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목소리도 비슷한 듯했다.
문득 조소가 차올랐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거라니, 밖으로 꼬여 내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마법을 쓰지 못하는 결계는 애초에 없었어.’
이 흑마법사는 미끼를 던져두고 그녀가 발버둥 치는 모습을 즐거이 바라본 것이다.
“흑마법사가 절대 되지 않는다라…… 다들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지. 나도 그랬고.”
목소리는 확연히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어둠의 강력함을 깨달았다.”
‘아니야.’
셀린느는 남부에서 만났던, 끝까지 흑마법에 저항한 이름 없는 루테를 생각하며 링조르를 고쳐 잡았다.
목소리는 일정한 곳에서 들려왔다. 그 지점을 공격할 수만 있다면……!
다음 순간, 셀린느의 발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아악!”
입에서 본능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끝이 없는 하강이 불러일으킨 공포와 고통에 눈물이 흘러넘쳤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링조르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부여잡는 것뿐이었다.
셀린느는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 눈을 떴다가, 칠흑 같은 어둠만이 보여 다시 질끈 감아 버렸다.
귀 바로 옆에서 흑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을 써. 지금이라면 반동을 풀 수 있으니까.”
셀린느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으며 몸부림을 치다, 더욱 빨라지는 하강 속도에 기겁하고 웅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셀린느로선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다.
링조르를 움켜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셀린느는 이를 악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링조르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내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저자는 어떻게 하려는 걸까.’
바로 그 순간, 꽉 감은 눈꺼풀 너머로 친숙한 푸른 빛이 번쩍였다.
그녀가 너무나 잘 아는 라쉬르의 푸른 불빛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