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모릅니다.”
“……뭐라고?”
칼 루테는 레온하르트의 노기 서린 목소리에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
“공자님, 흑마법사를 죽인 마법사는 대부분 죽거나 같은 흑마법사가 되어 버립니다. 몇 안 되는 예외들은 모두 반동에서 벗어나지 못했고요.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방법이 없는 거군요.”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속단하긴 이릅니다. 제가 최대한 열심히 연구해 보겠습니다. 셀린느 루테께서도 노력하실 거고요.”
“그렇기야 한데…….”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쉽게는 아니라도, 분명 풀 방법이 있는 문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반동을 푼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칼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일단은 며칠 푹 쉬시지요. 흑마법사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 겁니다.”
“그걸 알 수 있나요?”
“받으셨다면, 지금 공자님과 그렇게 붙어 계실 수 있겠습니까.”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농담이 지나치다, 칼 루테.”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없었군요.”
칼 루테는 바로 사과한 후, 셀린느를 위로했다.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셀린느 루테는 보기 드문 자질의 소유자이니,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랜만에 나타샤의 탑으로 돌아가는 셀린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레온하르트는 탑 입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래요?”
“…….”
그는 한참을 셀린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요. 무엇이든 들어 줄 테니까.”
“반동을 풀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네?”
“네가 평생, 마법을 쓰지 못하더라도……나의 손님이자 북부의 손님인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레온하르트…….”
셀린느의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이제 그녀는 호칭만 루테일 뿐, 더는 마법사라고 할 수 없다.
칼 루테는 그녀를 위로해 주려고 했지만 마법을 되찾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링조르가 있다 한들 그녀 몸 하나 지키는 데나 도움이 될 뿐일 것이다.
“네 저주를 푸는 것도 있는 힘껏 도와주겠다. 풀게 된다면…… 마법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겠지.”
셀린느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레온하르트를 바라만 보았다.
대체 이게 몇 번짼가.
그녀가 느끼는 이 감정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어 말을 하지도 못하는 게.
올려다본 깊은 바다색 같은 눈동자엔 흔들림 하나 없었다.
셀린느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간신히 말을 시작할 수 있었다.
“레온하르트, 정말…… 정말.”
레온하르트는 숨을 쉬지도 못하고 셀린느의 말을 경청했다.
“잊지 않을게요. 언제까지나…….”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 테니,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겠지.”
“그런가요? 그렇군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입가가 미묘하게 떨리는 걸 보았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
다음 날 저녁.
나타샤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들어간 셀린느의 눈은 동그랗게 커져 감길 줄을 몰랐다.
눈을 깜박이는 순간마저 아깝게 느껴졌다.
무도회장은 한마디로 오색찬란했다.
“예쁘지? 칼 루테가 얼마나 불평하던지 몰라. 그래도 무려 삼 년 만의 무도회인데, 예쁘게 꾸며야지.”
셀린느는 무도회장 구석구석에서 칼 루테의 손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얼음으로 프리즘을 만들어 무지개를 띄우다니, 얼마나 고생했을까.’
나타샤는 셀린느의 손을 잡고 자신이 계획한 일정들을 하나하나 일러 주었다.
“……리고 짜잔! 칼 루테가 만든 새로운 마법이 선을 보일 거야.”
“뭐죠?”
“그건 비밀.”
셀린느는 칼 루테가 죽어 나갈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 음식은 정말 마음에 들 거야. 몇 날 며칠을 준비했거든. 수도의 요리사까지 데려왔어.”
“정말 신경을 많이 쓰셨네요.”
“원래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무도회는 이 정도는 해야 해. 그동안 못 했지만…….”
나타샤의 말엔 어딘가 울분이 섞여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무도회장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셀린느는 실력 있는 악단이 연주하는 부드러운 선율을 감상하며 슈크림을 집어 먹었다.
‘맛있어…….’
가장 좋아하던 빵집에서 사 먹던 맛과 똑같은 맛이 입 안 전체에 감돌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음악, 화려한 광경을 즐길 수만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 몇몇이 셀린느에게로 다가왔다.
“셀린느 루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다니 기쁘군요.”
“가문의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하나같이 그녀를 칭송하는 말들이었다.
셀린느는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저들 중 대부분은 아직 정식으로 베르누이가의 소속이 아닌 마법사를 데려가려 혈안이 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되었다.
“대공가엔 이미 루테가 한 명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가문은 루테만을 위한 가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사람처럼.
‘이 사람들은 내가 더는 마법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셀린느는 사람들을 적당히 끊어 낸 다음 미리 봐둔 발코니로 이동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고 싶었다.
대니가 빠른 속도로 그녀의 뒤에 따라붙었다.
“루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셀린느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냥 찬 바람 좀 쐬면 괜찮을 것 같아요.”
“방으로 올라가시지요.”
“잠시만 더 있다가요.”
이렇게 빨리 무도회장을 떠나 버린다면 나타샤와 레온하르트가 걱정할 것이다.
“칼 루테의 마법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모르세요?”
대니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그들은 어느덧 발코니 앞에 도착했다.
“대니가 어떻게 알아요?”
셀린느는 조금 놀라 되물었다.
“그거야,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공자님.”
대니가 발코니에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보고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레온하르트가 왜 여기에……?’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많이 피곤한가?”
“조금요. 신선한 공기 좀 쐬면 괜찮아질 것 같아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위해 발코니에 있는 의자를 빼 주었다.
겨울바람에 레온하르트의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이 미미하게 반짝였다.
문득 셀린느는 깨달았다.
무도회는 어느덧 무르익고 있었다.
대공의 후계자인 레온하르트에게 한가히 발코니로 나와 노닥거릴 시간이 있을 리가 없다.
자신처럼 지쳐 쉬어야 할 정도로 체력이 약한 것도 아니다.
‘여기 온 건, 날 위해서구나.’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좋은 영주가 될 거예요.”
“좋은 영주?”
레온하르트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평생 전 제국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더군다나 흑마법사들의 저주 탓에 후계자도 가지지 못할 운명.
현 대공 부부 사후엔 실권이 동생들에게로 넘어갈 거라는 추측도 팽배했다.
“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확신에 가득 차서 그가 좋은 영주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왜지?”
“정말 모르겠어요?”
셀린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레온하르트의 반응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전 여태까지 레온하르트처럼 남을 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셀린느는 속으로 그에게 결코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이 세상 안과 밖을 다 포함해서요.’
물론 레온하르트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 중, 타인을 위해 자신이 가진 힘을 망설임 없이 휘두르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
레온하르트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셀린느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기다려 주었고, 마침내 쓰디쓴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 않나.”
“당연히라니요!”
셀린느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게 어떻게 당연한가요.”
목이 메어 더는 말할 수 없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온하르트가 크게 당황하며 손수건을 꺼냈다는 사실이 셀린느를 더욱 울렸다.
“울지 마라.”
“레온하르트의 이런 점 때문에, 울게 되는 거예요.”
“…….”
“…….”
둘은 침묵 속에서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셀린느는 손수건을 모두 적셨고 레온하르트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졌다.
하지만 둘 중 누구 한 명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퍼펑!
셀린느와 레온하르트와 머리가 동시에 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붉은빛, 푸른빛, 주황빛의 아름다운 불꽃들이 거대한 밤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색색깔의 불꽃들은 잘게 쪼개져 긴 폭포수를 그리기도 했고, 점점 커지는 거대한 원을 그리기도 했다.
마치…….
‘불꽃놀이?’
셀린느는 어안이 벙벙해 입을 벌렸다.
“저, 저게 뭐죠?”
“정말 모르겠나?”
이번엔 레온하르트가 당황할 차례였다.
“불꽃이잖나. 마법으로 만들어 낸.”
“아…….”
그제야 셀린느는 하늘을 뒤덮은 불빛들이 그녀가 익히 잘 알던 화학 제품들로 만들어 낸 불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가 잘 아는 불꽃이라면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사라져야 할 터.
하지만 하늘 위에서 작열하는 불꽃들은 단 하나도 사라지거나 약해지지 않고 되레 더욱 강하게 빛났다.
“뭐, 못 알아본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본디는 그냥 하늘을 밝히거나 해를 본뜬 노란 불빛을 띄우는 정도니까. 이런 건 나도 거의 본 적이 없어.”
“…….”
셀린느는 대답 대신 청회색 눈에 색색깔의 불꽃들을 한가득 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두 손이 얼어붙을 지경이라고 느낀 셀린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는 게 좋겠죠?”
“그래.”
그들은 빠른 걸음으로 발코니를 빠져나갔고, 레온하르트는 순식간에 그가 있어야 할 곳으로 복귀했다.
무도회장은 여전히 사람들로 복작였다.
“루테, 올라가시겠어요?”
“네.”
셀린느는 대니와 함께 빠른 걸음으로 무도회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너무 밖에 오래 있었나.’
몸 전체가 으슬으슬하니 추웠다.
셀린느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새 감기에 걸린 것 같아요…….”
“브란체 선생님께 얘기해서 약을 가져올게요.”
“고마워요, 대니.”
브란체 선생의 약은 맛은 고약했지만 효력만큼은 뛰어났다. 지금 셀린느에게 그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었다.
셀린느는 어질어질한 머리로 눈을 감았다.
곧 수마가 그녀를 덮쳤고, 셀린느는 끝도 없는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한편, 대니는 브란체 선생에게 달려가 감기약을 받은 후 재빨리 셀린느의 침실로 되돌아갔다.
그녀는 몇 차례 노크한 다음 침실로 들어갔다.
“루테, 잠시만 일어나서 약을…….”
대니의 말이 뚝 끊겼다.
커다란 창문은 열려 방 전체에 찬바람이 들이닥쳤고 침대 위엔 베개와 이불만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어디에도 셀린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쨍그랑!
대니의 손에서 약병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