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칼릭은 어리둥절한 눈치였지만 감히 대공자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읽기 시작했다.
“아…….”
잠시 뒤, 칼릭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오는 동시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대연회장에서 들은 레온하르트의 말과 이 일기장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눈치챈 듯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머니는 가끔 정신이 돌아오실 때마다 평범한 사람은 결코 알아낼 수가 없는 이치를 말씀하셨으니까요…….”
칼릭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샤프 백작에게 보여 주어라. 옛 시대의 영웅이 응당 받아야 할 처우를 내릴 테니.”
그들은 고개를 푹 수그리는 칼릭을 내버려 두고 말에 올라탔다.
“괜찮을까요?”
“그건 저자의 몫이다.”
레온하르트는 평소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어투로 돌아갔다.
“괜찮을 거예요.”
셀린느의 말은 추측보단 간절한 소원에 가까웠다.
그녀는 속으로 칼릭과 이름조차 잊힌 마법사 둘 모두 남은 생 평안하게 살기를 빌었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속도를 냈다. 조금이라도 빨리 북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샤프 백작령의 경계에서 멈춰야 했다.
샤프 백작이 잔존한 기사단을 거느리고 경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공자, 제가 배웅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샤프 백작의 말엔 섭섭한 기색이 엿보였다.
“이렇게까지 나와 주시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은인을 어찌 그냥 보내겠습니까.”
샤프 백작은 뒤에 다소곳하게 서 있던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녀는 작은 보석함을 들고 걸어 나왔다.
“보잘것없지만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샤프 백작은 직접 보석함을 열었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색색깔의 마력석들이 빛을 산란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북부가 제국에서 제일가는 마력석 산지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자연 마력석은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들 하니…….”
샤프 백작은 셀린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링조르를 쓰시더군요. 이것들로 검집을 만들면 쓸 만할 겁니다.”
“감, 감사합니다.”
셀린느는 당황하여 조금 더듬거렸다. 이 마력석들은 분명 레온하르트가 아닌 그녀를 위한 선물이었다.
그들은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수도로 올라가는 도로를 내달렸지만, 셀린느는 자꾸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샤프 백작과 그 일행은 쑥대밭이 된 영지로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며 앞을 바라보다, 조금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커다란 나무에 샛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개나리?’
셀린느는 곧 이 꽃나무가 그녀가 아는 그 어떤 식물과도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줄기와 나뭇가지의 형태는 벚나무를, 꽃은 개나리를, 군데군데 돋아난 이파리는 소나무를 빼닮았다.
“꽃이네요?”
일정한 속도로 다그닥 달리던 말이 멈추었다.
“그래. 꽃을 좋아하나?”
“그렇기도 한데…… 지금은 겨울이잖아요.”
지금은 한 해가 거의 끝나가는 12월 말. 봄과 맞닿아 있는 늦겨울도 아니라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
남작령에 머무르는 내내, 시종들이 레온하르트의 방을 열대풍 꽃으로 가득 장식한 건 보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온실에서 자라난 꽃처럼 느껴졌다.
“남부의 겨울은 짧다.”
“그럼 벌써 봄이……?”
“그래. 샤프로선 다행이지. 피해 복구가 그나마 수월할 테니.”
그동안 계속해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던 셀린느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샤프는 괜찮겠군요.”
물음이 아닌 확신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땅은 비옥하고, 백작은 능력 있는 자다. 네 걱정처럼 쓰러지지는 않을 거야.”
레온하르트는 이보다 훨씬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친 영지도 더러 보았다.
다행히 대다수의 영지는 삶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샤프의 상황은 나은 축에 드니 수월하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레온하르트에게 살짝 몸을 기대었다.
어서 북부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게임 속에서, 그녀가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으로.
***
“루테, 다 왔습니다. 일어나세요!”
대니가 푹 잠든 셀린느를 깨웠다. 쿠션 속에 푹 파묻힌 금발 머리가 흔들리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너무 졸리네요…….”
대니는 걱정스레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셀린느는 수도에서 북부까지 가는 여정 동안 계속해서 자기만 했다.
몇 번이고 셀린느에게 북부에 도착하면 브란체 선생한테 꼭 가 보라고 얘기했지만, 그때마다 그저 조금 피곤할 뿐이니 걱정할 것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셀린느는 기지개를 켜며 마차에서 내렸다. 눈으로 쌓인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마저 반갑게 느껴졌다.
“춥지 않은가?”
“추워요.”
셀린느는 곧바로 달아오른 얼굴로 레온하르트를 보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반갑네요.”
셀린느는 수도와 남부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주 다니는 길은 돌부리 하나까지도 외워 버린 베르누이성과, 낯설고 새로운 환경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이후론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해졌다.
물론 링조르가 있기는 했지만, 주변의 모든 사물을 링조르로 박살 내며 살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들은 천천히 성에 들어섰다.
“뭐지?”
레온하르트가 의아해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기이할 정도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성안을 으레 지나다녀야 할 하인 한 명조차 보이지 않았다.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청회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히든 스테이지의 시간대는 언제인지 언급되지 않았다.
그간 자신은 당연히 레온하르트가 미쳐 버리고 난 이후 베르누이성이 유령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지금 베르누이성을 유령성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이 일어났다면…….
“레온하르트, 셀린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는 한결 안도한 표정으로 그들을 향해 뛰어오는 나타샤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잘 아는, 무척이나 즐겁고 건강해 보이는 나타샤였다.
“얘기 다 들었어. 엄청난 일을 해냈던데? 아버지 입이 귀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시더라니까.”
“……사람이 왜 이렇게 없지?”
“사람이 너무 바쁘면 내일이 어떤 날인지도 잊어버리나 봐?”
나타샤는 평소의 놀리는 어조로 되물으며 레온하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휴.”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어이 무도회를 연 모양이구나.”
베르누이가가 가솔들만 참여하는 평범한 연회가 아닌, 큰 규모의 무도회를 여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인 한 명 보이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일하고 있을 것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잖아! 그동안 개나 소나 다 여는 무도회를 우리만 안 열었어.”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한 거지?”
“부모님이야 뭐…….”
나타샤의 눈이 반짝였다.
“레온하르트의 개선을 축하하지 못하셔서 안달이 나셨지. 어떻게 그렇게 오라비를 위하느냐고 칭찬을 다 해 주시던데?”
“난 전쟁에서 돌아온 게 아니다.”
“전쟁보다 더 어려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잖아. 온 북부가 레온하르트 얘기밖에 안 해. 아가티르수스라니!”
나타샤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물론 셀린느 얘기도 하지. 그 레온하르트 곁에서 살아남은 전설의 루테라고.”
“나타샤!”
당황해하는 레온하르트와 달리, 셀린느는 태연스레 받아넘겼다.
“영광이네요.”
“역시 셀린느야. 무도회에 참석할 거지? 드레스도 다 맞춰 놨어.”
“아, 그때 드레스…….”
“그걸 입고 또 죽기라도 했어? 신경 쓰지 마. 그럴 것 같아서 똑같은 디자인으로 또 하나 맞췄으니까.”
셀린느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나타샤에게 차마 수도에서 같은 옷을 새로 맞춰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레온하르트가 불쑥 끼어들었다.
“칼 루테는 어디 있지?”
“조금 전까지 무도회장 꾸미는 걸 도와줬어. 아마 지금은 자기 연구실로 가고 있을걸?”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문제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었다.
칼 루테의 연구실이 있는 서쪽 탑까지 가는 동안에도 하인 한 명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무도회 준비로 바쁜 모양이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대니에게 피곤할 테니 혼자 가겠다고 얘기했지만, 둘 모두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곧 그들은 서쪽탑의 입구에 도착했다.
문을 살짝 두드리자 놀라 토끼눈이 된 칼 루테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공자님, 루테. 벌써 돌아오셨습니까.”
“오늘 도착한다고 미리 전령을 보냈건만.”
레온하르트가 왜인지 심기가 불편한 듯한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요새 잠을 계속 못 잤더니 깜박깜박하게 되는군요.”
“나타샤가 많이 괴롭혔나?”
“아이고, 공녀님께서 절 뭘 그렇게 힘들게 하시겠습니까. 다만 개인적으로 하는 연구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잠이 부족합니다.”
셀린느는 샤프 백작이 선물한 마력석들을 떠올렸다.
‘링조르의 검집을 만드는 건 미루는 게 좋겠어.’
칼 루테는 마력석 세공까지 했다간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안색이었다.
“그래, 몸 챙기도록.”
칼 루테는 셀린느를 흘낏 쳐다보았다가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셀린느 루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그렇게 티 나나요?”
“제 수준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 눈치챌 정도로요.”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칼 루테의 말대로라면 웬만한 흑마법사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무능력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마법을 쓸 수 없어요. 쓰려고 하면 자꾸 구역질만 나고 죽을 것 같아서…… 심리적인 이유니 다른 마법사들도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했어요.”
“심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레온하르트가 흑마법사를 죽이는 걸, 제가 좀 거들었는데…… 그 직후부터 한 번도 못 썼어요.”
“예?”
아가티르수스가 사실 백 년이 넘은 흑마법사의 근거지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진실을 알리는 건 황실의 무능을 만천하에 내보이는 것이었으니.
레온하르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 함부로 말을 퍼뜨리지 않으리라 믿겠다. 아가티르수스는 사실 흑마법사의 근거지였어.”
“……그랬습니까.”
칼 루테는 신음을 삼켰고, 대니는 당장이라도 셀린느를 껴안기라도 하고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정말 두 분껜 하늘의 운이 따르셨습니다.”
칼 루테는 셀린느를 자세히 살폈다.
“지금으로선 추측일 뿐이지만, 셀린느 루테께선 반동에 묶이신 듯합니다.”
“반동이요?”
처음 듣는 소리였다. 레온하르트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칼 루테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지?”
“공자님께선 한 번도 못 느껴 보셨습니까? 흑마법사의 목숨을 빼앗을 때마다 오는 기이한 마력 같은 게, 느껴지셨을 텐데요.”
“……아.”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있다고 듣긴 했다. 내겐 별 해가 없어 잊고 있었다만.”
“공자님께선 마법사가 아니시니까요. 이것들은 마법사에게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죽인 건 나다. 셀린느는 나를 거들었을 뿐이야.”
“핵심적인 도움 아니었습니까?”
“……맞아요.”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칼 루테의 추측은 정확했다. 자신은 흑마법사를 죽이기 위해 마법으로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레온하르트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동은 어떻게 하면 풀 수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