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다음 날 아침.
샤프 백작은 광산엔 오래전 죽은 흑마법사의 유골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소식을 듣고서 무척 기뻐했다.
“백 번, 천 번 감사 인사를 드려도 모자랄 것 같군요. 평생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도 원하는 걸 얻었으니까요.”
샤프 백작은 그게 대체 무엇인지 궁금한 눈치였으나 묻지 않았다.
“아직 공자를 제대로 대접할 준비가 되지 않아 부끄러우나, 며칠 머물며 피로를 푸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와 셀린느가 머문다면 백작가는 매일을 축제처럼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장 전대 샤프 백작만 해도 얼마 전 목숨을 잃지 않았는가. 만신창이가 된 샤프성은 또 어떻고.
레온하르트는 그의 승리가 곧 생존자들이 피해자들의 장례를 치러야 함을 뜻하는 경우를 종종 봐 왔다.
이럴 땐 최대한 빨리 떠나 주는 게 도리였다.
“괜찮습니다. 조속히 피해를 복구하시길 바랍니다.”
예상대로 샤프 백작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공자께서 그러시다면야…… 대신 배웅은 허락해 주시겠지요?”
거부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그들은 샤프 백작과 함께 성내를 가로질러 남작저의 대연회장에 도달했다. 아직 대다수의 피난민들이 대연회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한 청년의 부르짖음이 들려왔다.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할머니!”
셀린느는 즉각 몸을 돌렸다.
청회색 눈이 커졌다.
샤프 백작이 칼릭이라고 불렀던 청년이, 그들을 방해하러 광산까지 쫓아왔던 노인에게 애걸하고 있었다.
“할머니, 악마 따윈 없어요. 마물은 공자님께서 다 죽이셨잖아요!”
“칼릭, 내 말을 들어라.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짐을 챙겨서 여길 떠나야 해.”
노인의 목소리는 셀린느에게 고성을 내지를 때와는 완전히 다른, 또렷한 목소리였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샤프에서 나가면 집도 없잖아요. 저흰 여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요!”
“악마에게 죽는 것보단 낫다.”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가 천천히 노인과 칼릭을 향해 걸어갔다.
칼릭은 레온하르트를 발견하자마자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몇 마디 더듬거렸다.
“공, 공자님…… 제, 제 할머니는…….”
“루테.”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레온하르트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레온하르트가 노인을 직시한 채 루테라고 불렀다.
노인의 얼굴이 즉각 일그러졌지만, 꽉 다문 입매에선 저주 하나 튀어나오지 않았다.
“흑마법사는 오래전, 당신의 노고 덕에 죽었습니다.”
노인의 반응은 격렬했다.
새까만 눈에서 불꽃이 튀었으며 당장이라도 레온하르트에게 침이라도 뱉을 것처럼 입이 움직였다.
칼릭이 기겁하며 노인을 제지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레온하르트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런 삿된 수작에 속아 넘어갈 것 같으냐!”
“루테.”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숙였다.
“직접 가 보십시오. 이제 그곳에 살아 있는 괴물은 없습니다. 오직 오래전에 죽은 흑마법사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황족에게 보고를 올릴 때처럼 깍듯하고 정중했다.
“…….”
노인은 주름진 입을 꾹 다물고 레온하르트를 노려보다가, 대연회장을 뛰쳐나갔다.
“할, 할머니!”
칼릭은 노인을 쫓아가는 것과 대공자와 백작에 대한 예를 차리는 것 중 고민하다 후자를 선택했다.
“면, 면목이 없습니다. 제정신이 아니신 분이니 부디 너그러이…….”
“그럴 것 없다.”
칼릭을 대하는 레온하르트의 어조는 사무적이었으나 차갑지는 않았다.
“다만,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겠나?”
칼릭은 대놓고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바로 대답했다.
“무엇이든 물어만 주십시오!”
“저자의 이름이 뭔가?”
갑자기, 칼릭이 수심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수그렸다.
“칼릭?”
샤프 백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을 재촉했다.
“왜 그러지?”
“……모릅니다.”
“자네를 키워 준 분이라 하지 않았나.”
“예. 하지만 그땐 이미 정신이 저렇게 되고 난 이후라…….”
셀린느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현재 노인의 정신 상태를 고려했을 때, 아이를 키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저자의 과거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은 없나?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말했더라도 상관없다.”
“그, 그건 잘…….”
“어디 살지? 널 키운 집이 있을 것 아닌가.”
칼릭은 잠시 머뭇거렸다. 결코 쉽지 않은 대답이 작게 열린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물에 파괴당했습니다.”
“안내해라.”
레온하르트의 말을 들은 사람 중, 놀라지 않은 건 오직 셀린느뿐이었다.
칼릭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저, 저희 집으로요?”
“그래.”
“대체 무슨 연유로…… 아, 아닙니다!”
칼릭은 곧장 대연회장을 빠져나가는 문으로 뛰어갔다.
샤프 백작은 이게 다 어찌 된 일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꼬치꼬치 캐물으며 레온하르트의 시간을 빼앗기보단 협조하는 쪽을 택했다.
“마차를 준비해 드릴까요?”
“말이면 충분합니다. 저 청년이 말을 타지 못한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칼릭은 샤프에서 제일가는 기수입니다.”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샤프 백작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칼릭의 집은 마물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에 위치했기에 가는 길 내내 장애물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칼릭은 장애물들이 애당초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가볍게 말을 몰았다.
셀린느는 한 발짝 앞서가는 칼릭이 만에 하나라도 대화를 듣지 못하도록 조심하며 레온하르트에게 물었다.
“그 할머니가 흑마법사를 봉인한 마법사라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느낌이 비슷했으니까.”
“무슨 말이에요?”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어떻게 각종 마법을 파훼하는지 셀린느에게 알려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법이든, 흑마법이든 개인마다 고유의 성질을 띤다.”
“그럼 광산에서는 왜 그 할머니를……!”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성을 잃은 마법사에게서 성질을 읽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 마법사는 연회장에서 아주 잠깐, 총기가 돌아왔어.”
셀린느는 한동안 말이 없더니, 조심스레 물어왔다.
“저도 알 수 있어요?”
레온하르트는 슬쩍 웃었다.
그는 셀린느의 마법은 마치 그녀를 그대로 본뜬 불같다고 생각했다.
첫인상은 미약하게 보이지만, 어느샌가 확 달아올라 온 세상을 뒤덮는 불.
“어떤 느낌이에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셀린느는 스스로 행한 첫 살상에 놀라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강력함을 묘사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이다.
“……그냥, 평범해.”
셀린느는 조금 실망한 모양인지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들은 칼릭의 집에 도착했다. 칼릭의 말대로 한바탕 마물이 휩쓸고 지나가 쑥대밭이 된 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빠르게 집을 훑어 내렸다. 정확히 절반이 내려앉았지만, 진입하여 단서를 찾는 덴 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공자님, 들어가시려고요?”
칼릭이 겁을 먹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이 뭐지?”
“없, 없습니다. 그냥 칼릭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럼 칼릭, 여기서 대기하고 있도록. 들어오지 않아도 된다. 아니, 들어오지 마라.”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한결 안도하는 칼릭을 뒤로하고 반쯤 내려앉은 집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더욱 처참했다.
마물 한 무리가 들이닥친 듯, 무엇하나 성한 물건이 없었고 바닥은 온통 마물의 발톱 자국으로 패여 있었다.
“이제 말해 줘요. 여긴 왜 온 거예요?”
셀린느는 내심 궁금해졌다.
어차피 흑마법사는 오래전에 죽었다.
레온하르트가 미친 마법사의 집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증거.”
“네?”
“저자가 흑마법사를 봉인했다는 증거.”
“이미 알지 않아요? 레온하르트는…… 아!”
셀린느는 그제야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온하르트는 확고한 증거를 찾고 싶은 것이다.
그 노인이 헛되게 미치지 않았다는 걸 샤프 백작에게, 어쩌면 칼릭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이미 눈치챈 것 같군.”
“열심히 찾을게요.”
“그럴 것 없다. 이미 찾았으니.”
“네?”
레온하르트가 방 한구석을 가리켰다.
사방이 박살 난 와중에 유일하게 멀쩡해 보이는 수납장이었다.
“저것만 멀쩡하네요.”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마물들이 차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고난도의 마법이.”
셀린느는 대체 그 정도의 마법을 쓰려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는지 생각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수납장을 열었다.
“비어 있네요?”
“그렇게 보일 뿐이다.”
단검으로 변화한 라쉬르가 텅 빈 공간으로만 보이는 곳에서 무언가를 베어 냈다.
셀린느가 숨을 들이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 두꺼운 책이 한 권 나타났다. 레온하르트는 경건하게까지 보이는 손놀림으로 책을 꺼내 펼쳤다.
“마법서인가요?”
레온하르트의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책장을 조심스레 넘겼다.
“일기군.”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일기를 왜 이렇게 철저하게 보관했을까요?”
“평생토록 남겨 놓고 싶은 기록이었겠지. 아니면 자기가 죽고 나서, 다른 누가 발견해 주길 바란 기록이거나.”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몸을 바싹 붙이고 일기장의 첫 페이지를 들여다보았다.
단정한 글씨가 백지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첫 문장은 강렬했다.
[나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일기엔 광기와 흑마법에 저항하는 한 마법사의 몸부림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이 내게 속삭인다. 내가 가진 모든 것, 지식과 이성을 붙들 방법은 오직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뿐이라고.]
책장을 넘기던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은 절반쯤 이르러 멈추었다.
점점 흐트러지는 필체와 제자리를 찾지 못한 글자들에 더는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폐허가 된 집 안에 울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이만 나가는 게 좋겠어.”
레온하르트는 너덜너덜한 문짝이 덜렁거리는 문으로 향했지만, 셀린느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방금 본 생생한 기록이 눈앞에서 계속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 마법사는 흑마법에 저항하다 미쳤다.
‘아냐.’
그렇게 간단한 말로는 진실을 담을 수 없었다.
이 마법사는, 광기에 침식당하는 상황에서 흑마법사를 광산에 봉인하고 모든 오명을 뒤집어썼다.
“셀린느.”
레온하르트가 어느샌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라쉬르를 들기 전엔, 수많은 마법사가 흑마법사에 대항하며 죽거나 미쳐 갔다.”
아.
그제야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그냥 지나쳤어도 될 불운한 마법사의 명예 회복을 위해 대체 왜 노력했는지 진정으로 깨달았다.
이 마법사는 레온하르트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흑마법사를 봉인했을 것이다.
죄책감, 책임감, 존경심, 연민…… 이 모든 것들이 뒤섞인 기묘한 감정의 덩어리가 레온하르트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레온하르트는 무언가 말을 이으려 했지만 목이 잠시 멘 듯 멈칫거렸다.
셀린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나가요. 칼릭 씨가 기다리겠어요. 조금 전엔 그냥 좀, 어지러워서…… 이젠 괜찮아요.”
밖으로 나가자, 칼릭이 초조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공자님, 원하시는 건 찾으셨습니까?”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칼릭에게 일기장을 내밀었다.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