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셀린느는 뒷걸음질 쳤으나, 레온하르트는 되려 흥미로운 눈으로 백골을 관찰했다.
“흑마법사로군.”
“네?”
“뼈들이 하나같이 뒤틀렸어.”
레온하르트는 발로 백골을 살짝 차 보았다. 분명 단단해야 할 인간의 뼈는 물렁물렁한 젤리처럼 꿈틀거렸다.
“그래도 형태가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니, 흑마법사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나 보군.”
“되살아나진 않겠죠?”
“그럴 리가.”
레온하르트는 능숙한 시선으로 뼈들을 하나하나 관찰했다.
“아사한 것 같은데.”
“아사라고요?”
“상처를 입은 흔적이 없어. 봉인을 생각하면, 아사가 정답일 확률이 높겠지.”
셀린느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어느 마법사가 샤프 백작에게 앙심을 품고 여길 봉인했다는 건…….”
“거짓 소문이야. 이유는 알 만하군. 동료가 갇혀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당연히 흑마법사들이 구하러 올 테니.”
소름이 셀린느의 전신에 우수수 돋아났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다행히, 이자는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흑마법사였고…… 그대로 굶어 죽은 모양이야.”
레온하르트는 백골 사이에서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검은 마력석이었다.
바로 그때, 티아라에 박힌 마력석이 크게 진동했다.
‘안 돼……!’
셀린느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마력석에 담긴 마법을 제어해야만 한다. 실패한다면 고삐 풀린 야수는 미쳐 날뛰고 말 것이다.
“티아라, 내게 다오.”
“……?”
“파괴해야겠다.”
셀린느는 생각하지도 않고 도리질을 치며 티아라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할 수 있어요.”
셀린느는 눈을 꼭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할 수 있어.’
칼 루테의 말이 완전히 빈말만은 아니라면, 그녀는 제법 재능 있는 마법사였다.
지금 당장은 마법을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법을 쓸 때의 감각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수 분 후.
레온하르트의 다급한 외침이 셀린느의 깊게 집중한 정신을 일깨웠다.
“셀린느!”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눈을 깜박였다.
품속에 끌어안은 티아라에서 어느샌가 진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마력석이 폭주를 멈추었는데도 네가 움직이지 않길래…….”
“괜찮아요. 안 죽었어요.”
셀린느는 티아라를 들여다보았다.
‘어?’
어느새 티아라의 한가운데 박힌 마력석이 색을 모두 잃고 검게 변해 있었다.
-달칵.
마력석은 작은 금속음을 내며 떨어져 내렸다.
레온하르트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티아라에서 떨어져 나온 마력석을 주워 들어 백골 사이에서 주운 마력석과 비교해 보았다.
“뭐지?”
두 개의 검은 마력석은 서로 공명하듯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두 개 다 놓으세요!”
이번만큼은 셀린느의 판단이 틀렸다는 직감이 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화상을 입는 듯한 격통을 버텨 냈다.
마력석 두 개는 그의 손 위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영향력 안에 들어온 자석처럼 서로를 향해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가 제지할 틈도 없이, 두 개의 마력석은 순식간에 하나로 뭉쳐 하나의 검은 마력석이 되었다.
‘마력석이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한데 뭉친 마력석은 처음엔 검은색인 것처럼 보이더니, 빠른 속도로 투명해져 은은한 빛까지 발산해 냈다.
“수정구라니.”
마력석은 마력이나 마법을 담고 있거나 담지 않을 뿐이었다. 다른 무언가로 변화한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셀린느,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나?”
“……깨 주세요.”
“뭐라고?”
“라쉬르를 써도 좋으니까, 깨 주세요.”
레온하르트는 어안이 벙벙해져 셀린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에서 봤어요. 이걸 깨야 해요.”
셀린느의 어조는 단호했고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손을 검집에 가져다 댔지만, 잠시 망설였다.
‘하기야, 파괴해야 할 것이긴 하군.’
어차피 흑마법사가 쓴 듯한 마력석은 파괴하는 게 원칙이었다. 그는 라쉬르를 빼내 빠른 속도로 바닥에 올려놓은 수정구를 내리쳤다.
라쉬르는 쨍하는 소리를 내며 수정구를 정확히 가격했다.
다음 순간,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어 눈을 깜박거렸다.
수정구엔 금 하나 가지 않았다.
그가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이, 셀린느가 걸어와 수정구를 집어 들었다.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셀린느의 목소리는 어딘지 서글프게 들렸다.
“왜지?”
“마물의 일격에만 깨지는 것 같아요. 저번에도 그랬으니까요.”
“…….”
레온하르트는 수정구를 노려보았다.
마물의 발톱 따위도 해낸 일에 실패했다는 점이 짜증스러웠지만, 마법적인 물건이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셀린느는 품속에 수정구를 집어넣었다.
“어서 나가요. 여기에서 할 건 다 한 것 같으니까요.”
흑마법사의 백골과 조금이라도 빨리 떨어지고 싶었다.
돌아가는 길은 더 쉬웠다.
별로 특별할 게 없는 갱도니 그저 익숙한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갱도의 입구가 저 멀리 보이는 순간, 레온하르트의 몸이 경직되었다.
“왜 그래요?”
“……멈춰.”
셀린느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경계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뻣뻣이 긴장한 레온하르트의 반응을 보니 분명 위험한 상황이었다.
단 몇 초 후.
레온하르트가 크게 뛰어올라 허공을 라쉬르로 갈랐다.
-쿵!
거대한 바위가 셀린느의 머리 바로 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뛰, 뛸까요?”
“가만히 있어.”
셀린느는 최대한 빨리 이 광산을 빠져나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졌지만 가시만큼은 형형한 가시덤불이 갱도를 꽉 메웠으니까.
섣불리 움직였다면 온몸이 가시에 꿰뚫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했다.
셀린느는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흑마법사는 죽었는데, 왜…….”
“자신이 죽고 나면 누군가가 들어오리라 생각했겠지.”
레온하르트가 무심하게 그들을 향해 덮쳐 오는 가시덤불을 베어 내며 대답했다.
“마지막 집념을 미래의 살인에 쏟다니, 흑마법사답군.”
“…….”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것들은 모두 죽은 자의 마력이니, 금방 바닥날 테다.”
하지만 꽤나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시덤불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들은 입구를 향해 겨우 몇 발자국을 나아갔을 뿐이었다.
셀린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링조르를 꺼내 휘둘러 보았지만, 가시덤불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실망할 것 없다. 링조르는 순수한 마법의 결정체야. 흑마법과는 정반대되는 성질이니, 타격을 입히지 못하는 건 당연…….”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입을 다물고 얼굴을 찡그렸다.
“어, 어디 아파요?”
“……내가 멍청했군.”
“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라쉬르를 바닥에 박아넣었다. 둔탁한 소리와 동시에 갱도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수 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라나던 가시덤불들이 점점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이것들은 마법이 아니다. 죽은 자의 사념이지.”
레온하르트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마법의 정교함이 도무지 느껴지지 않더군. 저것들은 저자가 죽어 가면서 남긴 메아리에 불과해.”
마침내 가시덤불들은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들은 지친 몸을 이끌고 갱도의 입구로 나아갔다.
어느덧 바깥은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셀린느는 그들이 가시덤불과 씨름한 시간이 적어도 한나절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그들을 기다리는 건 어둠만이 아니었다.
“별, 많네요…….”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에 별들이 금방이라도 땅으로 쏟아져 내릴 것처럼 한 아름 박혀 찬란하게 빛났다.
“저 별자리 이름이 뭔지 아나?”
셀린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간 레온하르트는 유독 별에 관해 관심도 지식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티아라 자리다.”
셀린느가 놀라 숨을 들이켰지만, 레온하르트는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북극성을 찾으려면 꼭 알아야 하는 별자리지. 반쯤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나는군.”
셀린느는 왜인지 모를 충동에 이끌려 품에서 티아라를 꺼냈다.
그 순간, 수십 수백 번을 곱씹어 떠올린 음악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스테이지를 클리어 할 때마다 들리는 [셀린느의 악몽]의 주제곡이…….
“셀린느, 무슨 문제가.”
레온하르트의 말이 뚝 끊겼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셀린느의 손에 들린 티아라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별빛은 아무리 밝아도 햇빛과 달빛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눈앞의 티아라는 마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티아라처럼.
셀린느는 티아라를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모든 보석이 별빛을 받아 반짝였고, 휑하던 빈자리에 별빛이 서서히 차올랐다.
한순간, 레온하르트는 티아라뿐만 아니라 셀린느까지도 별처럼 빛나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그는 홀린 듯 셀린느를 바라보다, 문득 그녀를 껴안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레온하르트?”
정신을 차리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셀린느가 지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아라는?”
“돌려주면 될 것 같아요.”
셀린느의 손에 들린 티아라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마력석이 빠져나간 자리는 휑한 상태였다.
“방금 그건 뭐였지?”
“모르겠어요.”
셀린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조금 전의 가시덤불도, 티아라에 차오른 별빛도 게임 손에서 본 기억이 없는 것들이었다.
오직 귓가에서 울리는 음악만이 그녀가 진엔딩의 두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음을 알려 주었다.
셀린느가 말에 올라타려는 순간, 레온하르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상자, 낮에는 없지 않았나?”
“……!”
셀린느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클리어 보상이 들어 있는 작은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어 보니 힐링 포션 세 개와 신발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그녀는 빤히 쳐다보는 레온하르트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신발을 신었다.
마치 치수를 재어 만든 것처럼 발에 꼭 맞았다.
‘벌써 헤르메스의 신발이 나오다니!’
헤르메스의 신발은 게임의 막바지에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으로, 플레이어의 이동 속도를 올려 주었다.
레온하르트가 다가와 힐링 포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구한 거였나.”
셀린느는 조금 죄책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꿈에서…… 어디에 가면 찾을 수 있는지 알려 주길래.”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염려하며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평상시와 전혀 다르지 않은 태도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곤해 보이는군. 어서 돌아가서 쉬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