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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42화 (42/120)

42화.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손끝으로 금빛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작거렸다.

힘을 조금이라도 더 주었다간 바스러질 것처럼 느껴지는 여자.

실제로 쉽게 생명을 잃어버리고 마는 여자.

하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여자가 그의 곁에서 마음을 놓고 자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얼마 전부터 불쑥불쑥 치밀어오르는 당혹스러운 감정에 대해 생각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셀린느를 지키는 게 그의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분명 잘못되었고, 도려내야만 하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만약 베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누구든 벨 것이다. 설령 가족이라도…….

하지만 셀린느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대체 왜 나는……’

레온하르트는 수마가 그를 덮칠 때까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

샤프 백작은 베론 남작의 보고를 듣자마자 셀린느와 레온하르트를 찾아왔다.

“보여 주십시오.”

셀린느는 품속에서 조심스레 티아라를 꺼냈다.

샤프 백작은 티아라가 셀린느의 손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유의하면서 자세히 살폈다.

“그 티아라가 맞는군요.”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샤프 백작이 피식 웃었다.

“남작이 상당히 겁을 집어먹었던데, 사실 큰 비밀도 아닙니다. 나이가 좀 있는 영지민들은 다 기억하는 티아라지요. 본디 저희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었으니까요.”

“마법사가 직접 만든 게 아니었습니까?”

“일개 마법사가 어디서 이렇게 좋은 보석들을 구하겠어요?”

샤프 백작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보석을 하나씩 짚었다.

“이 다이아몬드는 황후 폐하의 관에 박힌 것과 쌍둥이 보석입니다. 이 사파이어는 본디 바다의 눈물이라는 별칭까지 있을 정도였죠. 에메랄드는…….”

레온하르트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을 끊었다.

“어떻게 그런 보물이 마도구가 된 겁니까?”

“이 마력석 때문에요.”

샤프 백작은 티아라 한가운데, 검붉은 마력석을 꾹 눌렀다.

“본디 이 자리는 언젠가 채굴할 보석 중의 보석이 들어갈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마법사가 억지로 마력석을 박아 넣었다더군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샤프 백작가의 재정이라면 내로라하는 마법사들을 동원했을 텐데도 누구도 봉인을 풀지 못한 게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 마법사는 광산의 봉인을 통째로 이 마력석에 박아 넣어 숨겨 버린 것이다.

“흑마법사였습니까?”

“그건 아니었다고 해요.”

레온하르트는 내심 안도했다.

만약 이 마력석에 담긴 마법이 흑마법이라면, 자신은 티아라 전체를 파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광산은 영영 닫히게 될 것이다.

“티아라는 돌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마력석은 빼내어 저희가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샤프 백작의 눈이 커졌다.

“당연히 티아라 전체를 드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력석을 빼내고 보석을 박아 티아라를 완성한다면 그 이상의 기쁨이 없을 것 같군요. 제의에 감사드립니다.”

레온하르트는 곧바로 마력석을 빼내려다 잠시 주춤했다. 라쉬르로 마력석을 빼냈다간 높은 확률로 티아라 전체가 파괴될 것이다.

그는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링조르로 가능하겠나?”

셀린느는 왼손으로 링조르를 만지작거렸다. 마력의 미미한 진동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지난 며칠 동안, 실력이 비약적으로 늘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다루기에는 부담감이 컸다.

“힘들 것 같아요.”

샤프 백작은 분명 아쉬울 터였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광산만 열어 주신다면 티아라는 공자와 루테의 정당한 소유물입니다.”

그들은 회의실을 빠져나와 피난민으로 북적이는 대연회장을 통과했다.

그때, 처음 보는 노인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산발이 된 백색 머리칼에 얼굴 전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파였다.

노인은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올려 그들을 가리켰다.

“저주받은 것!”

셀린느는 그저 어안이 벙벙했을 뿐이지만, 샤프 백작의 얼굴은 즉각 일그러졌다.

레온하르트는 가당치도 않다는 눈빛으로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노인을 응시했다.

“불길한 것! 이곳을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마라. 하늘이 무너질 것이다!”

“할머니!”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린 청년이 피난민 무리 사이에서 튀어나와 노인을 부둥켜안았다.

“공자님, 제 목을 대신 치십시오!”

샤프 백작은 청년을 알아본 듯했다.

“칼릭.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절 키워 주신 분입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지 오래니 부디 용서를……!”

“그럴 것 없다. 흔한 일이니.”

레온하르트가 손을 내저으며 연회장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샤프 백작이 그의 곁에 따라붙었다.

“공자, 백작령 전체를 대신하여 사과드립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

“제가 왜 미치광이의 말에 신경 쓰겠습니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프 백작은 속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베르누이 대공이 북부의 예언자란 예언자는 전부 추방시켜 버린 건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아버지보다는 이해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부디 레온하르트의 심기를 거스르는 다른 미친 예언자는 없길 빌며 둘을 배웅했다.

몇 시간 후.

그들은 봉인된 광산에 도착했다.

셀린느는 말을 달리는 내내 흔한 일이라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그들은 시답잖은 대화만 나누며 입구에 도달했다.

광산의 입구는 거대한 암석으로 막혀 있었다.

셀린느는 티아라를 꺼내기에 앞서 암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라쉬르로 쉽게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쉽게 볼 건 아니다. 열쇠가 있으니, 안전하게 가야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티아라를 끄집어 냈다.

티아라를 암석에 가져다 대려는 순간, 몇 시간 전 들었던 비명이 셀린느의 귓가에 울렸다.

“저주받은 것!”

셀린느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회장에서 그들을 가리키며 저주를 퍼부었던 노인이 숨을 헐떡이며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셀린느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분명 연회장에서의 레온하르트는 노인이 자신을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고 생각한 듯했다. 샤프 백작과 칼릭이라는 청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노인은 그녀를 똑바로 가리켰다.

‘내가 아니야.’

순간, 셀린느는 깨달았다.

노인이 저주를 퍼부은 대상은 그녀도, 레온하르트도 아니었다.

셀린느의 손에 들린 티아라였다.

“불길한 것! 그걸 썼다간 천지가 노해 네놈들을 파묻어 버릴 것이다!”

참다못한 레온하르트가 나서려는 순간, 셀린느는 노인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이거 말이세요, 할머니?”

그녀가 티아라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자, 노인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쳤다.

“묻, 묻어 버려야 해 땅속에…… 던져 버려…….”

“그냥 무시하는 게 좋지 않겠나.”

“잠깐만요.”

이곳은 게임 안이다.

뜻 모를 소리를 하며 플레이어 앞에 자꾸 나타나는 등장인물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물론 게임 안에서 이런 노인을 본 적은 없었지만, 진엔딩 루트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전 저 봉인을 풀어야 해요.”

“안 돼!”

갑자기, 노인이 셀린느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레온하르트가 곧바로 셀린느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비켜라!”

노인은 제풀에 못 이겨 바닥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악을 썼다.

“미친놈들! 저것이 뭔지도 모르느냐?”

“광산이잖아요?”

“저긴 악마 소굴이다. 네놈도 네놈의 가족들도 모두 죽여 버릴 악마가 산다고!”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만약 저 안이 또 다른 스테이지라면 노인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할머니, 그건 어떻게 아세요?”

“……직접 보았다, 이 눈으로.”

“네?”

노인은 대답 대신 다시금 셀린느를 향해 달려들었으나 레온하르트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셀린느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실제 게임이라면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행동하고 플레이어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게임이 현실이 되ㅌ린 이상, 셀린느는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할머니, 전 봉인을 풀 거예요.”

“……!”

노인은 이제 잔뜩 쉰 목으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 알려 주세요. 악마에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없다. 그런 방법 따윈 없어!”

“있을 거예요. 아시지 않나요?”

노인의 눈이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저걸 열지만 않으면 돼!”

“셀린느, 무시하고 봉인을 푸는 게 좋지 않겠나?”

레온하르트의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셀린느는 잠시 고민했다.

이 광산 안에, 노인이 ‘악마’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상당한 소득이다.

‘힌트를 얻을 수 있진 않을까 싶었는데…….’

하지만 노인의 상태를 보아하니 더 이상의 정보를 얻어 내는 건 무리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흥분한 노인의 몸이 상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야겠어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노인을 막는 사이, 광산 입구를 꽉 틀어막은 바위의 틈에 티아라를 올려놓았다.

‘……!’

티아라의 한가운데에 박힌 검붉은 마력석이 광채를 뿜어내며 들썩였다.

셀린느는 티아라를 꽉 붙잡았다.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링조르와 비슷해!’

티아라에 담긴 마법은 고삐가 달린 야수와 비슷했다. 고삐를 꼭 붙든 조련사가 없다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려 나가고 말 것이다.

“멈춰라!”

노인이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셀린느는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티아라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미쳐 날뛰는 낯선 마법을 제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건 링조르야. 링조르라고 생각해.’

마침내, 바위는 정확히 두 조각으로 갈라져 육중한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딪혔다.

“다친 덴 없나?”

“괜찮아요.”

어느새 노인을 저 멀리 떼어 놓은 모양인지 홀가분한 표정의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할머니가 저흴 쫓아오진 않겠죠?”

“저게 쪼개지는 순간, 달아나던데.”

셀린느는 의아한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그가 할머니를 쫓아내었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알잖나.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아.”

맞는 말이었기에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가 뛰쳐나올까 봐 무서워서 가셨나 보죠, 뭐.”

그들은 수십여 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광산 안에 발을 들였다. 한땐 제법 큰 광산이었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셀린느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스테이지 같지가 않아.’

다른 스테이지처럼 분위기 자체가 으스스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목숨을 위협해 오는 적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악마가 산다고 했는데…….’

그저 오래전에 버려진 평범한 광산일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은 막다른 갱도에 도달했다.

“……뭐죠?”

무언가 희멀건 것이 벽 부근에 잔뜩 너부러져 있었다. 셀린느는 질문을 내뱉자마자 그것의 정체를 눈치챘다.

‘뼈…….’

인간의 백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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