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셀린느는 조심스레 티아라를 집어 들었다. 만약 이게 남부의 티아라가 맞는]다면, 셀린느는 퀘스트를 완수했다.
레온하르트가 어느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남부의 티아라인가 보군.”
“모르겠어요.”
셀린느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기억에 따르면, 퀘스트 완수 시엔 스테이지 클리어와는 달리 별다른 이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이미 완수한 퀘스트엔 붉은색 줄이 하나 그일 뿐이었다.
‘아!’
셀린느는 주머니 속에서 양피지 조각을 꺼냈다. 실망의 한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양피지 위의 글자는 셀린느가 처음 보았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냥 줄만 안 그어졌을 뿐, 퀘스트는 이미 완수한 건지도 몰라.’
지금으로선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 돌아가나?”
“아뇨.”
셀린느가 확신에 찬 대답을 하는 순간, 그들이 선 모래섬이 흔들렸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졌지만, 셀린느는 그저 담담히 모래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잠시 후, 모래섬은 호수 안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셀린느!”
“괜찮아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태연스러운 목소리에 기겁했지만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과 모래섬 주위를 투명한 보호막이 둘러싸 물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모래섬은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으로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피곤에 굴복해 꾸벅꾸벅 조는 셀린느만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태연한 셀린느의 태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평정을 잃지 않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아가면 예언자들에 대해 조사해 봐야겠어.’
아무래도 예언자들은 그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것처럼 사기꾼들만 존재하는 건 아닌 듯했다.
마침내 모래섬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단단한 바닥에 착지했고, 셀린느는 잠에서 깨어났다.
작은 입술이 움직여 레온하르트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말을 만들어 냈다.
“다 왔어요.”
“다 왔다고?”
레온하르트는 눈을 깜박거리자마자 셀린느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란 석양빛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어디선가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울창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비탈진 흙길이 언뜻 보였다.
그들은 갱도의 입구인 산 중턱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여태까지 전 제국에서 레온하르트만큼 마법과 관련된 일을 많이 겪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를 알게 된 지난 두어 달은 그의 스물넷 인생 중 가장 기이한 일이 많이 일어났던 시간이었다.
“어서 내려가요.”
셀린느의 손에서 티아라가 햇살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
그들이 남작저에 도착했을 땐, 샤프 백작은 이미 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자신의 성으로 떠난 후였다.
“괜찮을까요?”
셀린느는 조금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우두머리 마물과 발견한 모든 마물들을 처치했다고 해도, 발견하지 못한 마물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샤프 백작가는 대대손손 마물에 강하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그런 곳이, 어쩌다…….”
레온하르트는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닥치지.”
셀린느는 그 말에 수긍했다. 사실, 자신이 그 대표적인 사례 아닌가.
지금은 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삶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이따금 예전의 평범한 삶이 떠오르면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냐,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갑작스레 풀이 죽은 셀린느의 반응을 오해한 듯했다.
“걱정하지 마라. 너 하나만큼은 언제까지나…….”
레온하르트의 말은 복도 저편에서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를 듣자마자 끊겼다.
집사의 보고를 받은 베론 남작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공자님!”
“별일 없었습니까.”
“아이고, 당연하지요. 다 공자님께서 저희를 지켜 주신 덕분입니다.”
그때, 여태껏 바닥에 넙죽 엎드릴 기세였던 베론 남작이 펄쩍 뛰어올랐다.
그렇지 않아도 소의 눈망울처럼 커다란 눈은 더욱 커져 튀어나올 것처럼 보였다.
“루, 루테……?”
“네?”
셀린느는 조금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러지?’
베론 남작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셀린느의 손목에 걸린 티아라를 가리켰다.
“이, 이건…….”
“광산에서 발견한 겁니다.”
레온하르트가 조금 지나칠 정도로 날카롭게 베론 남작의 말을 끊었다.
베론 남작의 눈은 이제 정말로 튀어나와 허공에 반쯤 걸릴 지경이 되었다.
“광산이라니, 정말입니까?”
“그럼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아이고,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공자님, 이 티아라가 정확히 어떤 물건인지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이건…….”
베론 남작은 손을 비비적거렸다.
“이걸 제가 말씀드려도 될지 확신이 잘 서지 않습니다. 백작님께 보고를 먼저 드려야…… 아니, 백작님께서 직접 말씀하셔야…….”
“대체 뭡니까?”
참다못한 레온하르트가 단도입적으로 물었다.
“당장 말씀해 주십시오. 남작도 아시다시피, 전 바쁘지 않습니까. 남작령에 남은 마물이 있든 없든 당장 북부로 떠나도 될 만큼.”
베론 남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그럼 이것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만약 샤프 백작님께서 노하신다면, 절 보호해 주십시오.”
여태껏 딱딱하게 굳었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샤프 백작은 화내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녀의 충직한 가신이라는 점을 이번에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샤프 백작은 충신의 등에 칼을 꽂을 사람이 아닙니다.”
“…….”
베론 남작은 그래도 불안한 듯 눈알을 잠시 굴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샤프에 광산이 모두 몇 갠지 아십니까?”
“일곱 개잖습니까.”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건 모두 여섯 개입니다.”
아주 잠시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왜 한 개엔 들어갈 수 없죠?”
“문이 열리지 않으니까요.”
“광산이 문으로 막혀 있다는 말입니까?”
“예. 마법으로 만든 문입니다.”
베론 남작은 빠르게 남은 설명을 주절거렸다. 마치 조금이라도 빨리 이 대화를 끝내고 싶다는 듯이.
“사십 년 정도 전, 어느 마법사가 당시 샤프 백작께 앙심을 품고 광산 하나를 막아 버렸다고 합니다. 각지의 마법사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도 열지 못했고요.”
“백작가엔 참으로 불행한 일이었겠군요. 근데, 그것과 이 티아라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베론 남작은 손끝으로 셀린느의 손에 걸린 티아라를 아주 살짝, 건드렸다.
“각기 다른 여섯 개의 보석. 가운데에 박힌 검붉은 마력석. 이건, 그 광산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그랬군요, 이것도…… 열쇠였네요.”
셀린느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스테이지 클리어임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아 실망하던 차였다.
하지만 베론 남작의 말을 들으니 또 다른 스테이지를 클리어해야 진엔딩의 두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스테이지가 줄어들었다는 건, 클리어 보상이 줄어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셀린느는 품 안의 힐링 포션을 더욱더 아끼기로 결심했다.
베론 남작은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자세히 말씀드리는 건, 광산에서 들고나오는 건 그 무엇이든 공자님의 소유물이라는 걸 샤프 백작님께서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
셀린느는 문득 깨달았다.
베론 남작이 충격을 받은 건 단순히 수십 년간 막혀 있던 광산을 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광산 하나가 대공자의 손에 넘어갈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온하르트를 흘낏 올려다보았다.
‘대놓고 기분 나빠하고 있어!’
레온하르트는 이맛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지만, 짙은 먹구름 같은 기운이 눈에 감돌았다.
“……북부 사람은 재물을 탐내지 않습니다. 마법에 걸렸다는 광산 문은 당연히 열어 드리겠으며, 그 광산은 샤프 백작께서 소유함이 마땅합니다.”
“공, 공자님!”
베론 남작은 당장이라도 레온하르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자신의 혀를 물어뜯기라도 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셀린느는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그녀는 남작의 시선이 완전히 자신에게 쏠렸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덕분에 이 티아라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알 수 있었어요. 남작님이 아니었다면 영영 몰랐을 거예요.”
“셀린느 루테…….”
베론 남작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글썽였다.
바로 그때, 레온하르트가 더욱 심기 불편해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작과 얘기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요. 샤프 백작께선 언제쯤 돌아오십니까?”
“늦어도 내일 점심까진 오신다고 합니다.”
“…….”
레온하르트는 당장이라도 셀린느와 함께 말을 타고 샤프성으로 달려가고 싶은 눈치였다.
만약 셀린느가 지쳐 당장 쓰러질 듯한 안색이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셀린느의 상태는 말에서 졸아 떨어질 뻔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샤프 백작과 얘기하기 위해 말을 달리는 건 자살 행위였다.
“샤프 백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방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아이고 당연하지요. 어제 쓰셨던 방을 공자님에 걸맞게 꾸며 놓았습니다.”
잠시 후, 레온하르트는 자신에게 기댄 채 꾸벅이는 셀린느를 부축하며 남작저에서 두 번째로 좋은 침실에 도착했다.
원래 베론 남작은 자신의 방을 내어 주려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사양하여 후계자가 쓰는 침실을 쓰게 되었다.
침실로 들어선 순간, 레온하르트는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어젯밤 묵었던 고풍스럽지만 수수한 방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베론 남작은 성의를 남작저에 남아 있는 모든 귀중한 자재들을 끌어모으는 것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거대한 백호 가죽이 바닥에 셋이나 깔려 있었고, 사방엔 남부에서만 나는 희귀한 겨울꽃들이 장식되어 자태를 뽐냈다.
상당수 남작의 침실에서 가지고 왔을 법한 호화로운 가구들은 또 어떻고.
‘뭐, 성의는 나쁘지 않지.’
레온하르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의 도움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귀찮게까지 생각하는 것보다야, 보답하려고 애쓰는 게 훨씬 나았다.
그렇다고 그가 양측에 차별을 두는 건 아니었지만.
레온하르트는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마물과 흑마법사를 베었다.
그게 그가 아는 유일한 인생이므로.
그때, 문이 열리고 남작가의 시녀가 들어왔다.
“루, 루테를 방으로 모시려고요.”
레온하르트는 벌써 푹신한 침대에 너부러져 푹 잠이 든 셀린느를 내려다보았다.
“됐다. 옮기는 도중 깰까 싶어 두렵군. 여기서 자게 내버려 두도록.”
“하지만 공자님께서 이 방에 주무셔야……!”
“나도 여기서 자겠다. 그럼 문제없지 않나?”
“……예?”
“뭔가 문제라도?”
레온하르트는 멀뚱히 시녀를 바라보았다.
“없, 없습니다.”
시녀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반쯤 뛰쳐나가듯 방을 나가 버렸다.
방 안엔 오직 둘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