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셀린느는 네 번째 스테이지를 기억했다.
전반적으로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사방에서 보석이 반짝이는 광산.
플레이 내내 ‘남부의 티아라’와 비슷한 것이라곤 본 적이 없었지만, 광산 자체의 이름이 ‘남부의 티아라’라면 납득이 간다.
‘그런데, 별로 어렵지는 않겠는데?’
퀘스트의 존재 자체가 스테이지의 난이도가 상당하다는 뜻이기에 상당히 겁을 먹은 차였다.
하지만 단순히 네 번째 스테이지로 가는 힌트 정도만 알려 준 걸 보니, 아무래도 진엔딩의 퀘스트는 여타 평범한 게임처럼 이정표 역할도 하는 모양이었다.
“샤프까지 가는 데 사흘은 걸린다. 그동안 링조르에 완전히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할 수 있어요.”
셀린느는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직도 마법을 직접 쓰려고 할 때마다 심한 토기가 올라왔으나, 레온하르트의 친절한 지도를 받으며 링조르를 다루는 덴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대니를 데려가도 괜찮을까요?”
단 한 번도 대니를 마물 사냥에 데려간 적이 없었다. 호위 시녀로서의 실력은 출중했지만, 마물을 상대하기엔 부족함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미 한 번 대니를 떼어 놓았다. 남부까지 말도 없이 내려간다면 많이 섭섭해할 것이다.
“아니.”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살리고 싶으면 말없이 떠나는 게 맞다.”
“…….”
셀린느는 연회에 잘 다녀오라며, 같이 갈 수 없어 아쉽다고 웃는 대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대니의 안전이었다.
“편지는 써 놓고 가야겠어요.”
“알겠다. 그리고 그 옷, 움직이기 불편하지는 않지?”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네. 하지만 나타샤의 옷이라…….”
“돌아가는 길에 똑같은 걸 하나 맞춰 가면 화내지 않을 거야.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짐들은 남부로 바로 보내 달라고 해야겠군. 네 호위 시녀는 이곳에서 대기하라 명하고.”
셀린느는 휴게실에 비치된 종이와 펜을 집어 들고 대니에게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아이고, 살았습니다!”
베론 남작은 당장이라도 넙죽 엎드릴 것 같은 얼굴로 레온하르트와 악수했다.
“공자님께서 행차해 주시다니…… 이제 죽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로 떠나겠습니다. 셀린느 루테가 갈아입을 옷과 좋은 말을 준비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애마, 블랙을 남부까지 데려오지 않았다. 수명 단축시키기 딱 좋은 짓이었기 때문이었다.
셀린느는 시녀의 안내를 받아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중간에, 루가 소매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용……?”
시녀가 소스라치며 중얼거렸다.
“안 물어요.”
셀린느는 ‘우리 집 멍멍이는 안 물어요.’ 수준의 가벼운 어투로 얘기했지만, 하녀는 더욱 겁을 집어먹은 듯했다.
“그, 그럼 불을 뿜나요?”
“아뇨. 새끼라 그런지 보통은 자요.”
사실, 루는 셀린느가 더는 마법을 쓸 수 없게 된 이후론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셀린느는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루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지 걱정했지만, 지금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샤프성의 입구에 도달했다.
“…….”
셀린느는 스산한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격적으로 남부라 불리는 지역에 막 도달했을 땐, 추위가 한결 가셔 초봄이라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샤프성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북부의 눈밭보다도 지독한 한기가 셀린느를 찔러 댔다.
성문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려 나온 것처럼.
‘도망치던 사람들이었을까.’
셀린느는 씁쓸해하며 샤프성에 발을 들였다.
‘…….’
여태까지 본 광경 중 가장 참혹한 현장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이, 이건…….”
저택의 함정에 당해 내장을 쏟아 내며 죽은 적도 있었다. 악취가 풍기는 마물 몇백을 죽인 적도 있었다. 코앞에서 흑마법사가 변해 오물로 녹아내리는 걸 보기도 했다.
하지만 셀린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눈앞의 현장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신체 한구석이 참혹하게 물어뜯긴 시체들이 눈길이 닿는 곳마다 너부러져 있었다.
모두 고통으로 얼굴이 크게 일그러진 채로.
“전부 죽었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느껴져,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야…… 오해하지 말자.’
레온하르트는 그저, 이곳 수준의 의료 기술로는 살릴 수 없는 환자가 있을까 봐 걱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명이 모두 빠져나간 성내엔 오직 그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셀린느는 시꺼먼 핏자국들로 얼룩진 복도와 아직도 격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복도를 참담하게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물이 천장에서 구멍을 뚫고 떨어져 내렸다.
“……!”
셀린느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품에서 링조르를 꺼내 휘둘렀다.
손끝에서 익숙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삼지창이 생성되어 마물의 몸에 정확히 박혔다.
“잘했다.”
“열심히 연습했으니까요.”
처음 링조르를 썼을 땐, 마치 고삐 풀린 말처럼 혼자 날뛰는 듯한 마력의 흐름에 무척 당황했다.
직접 마법을 쓰면 그녀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니 손쉽게 다룰 수 있다.
하지만 링조르는 칼자루를 쥔 오른손 하나만으로 미쳐 날뛰는 야수를 제어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검이라는 본질 때문인지, 오직 공격 마법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곧이어 다른 마물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렸고, 레온하르트는 손 하나 까닥이지 않고 그녀가 마물을 하나하나 처치하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불꽃이 링조르를 빙글 둘러싸더니, 마물들을 향해 화살이 되어 날아갔다.
본디 마법만큼 강력하지는 않았지만 마물의 움직임을 둔화시킬 수준은 되었다.
셀린느는 링조르로 마물의 머리를 겨냥했다.
-툭!
얼음 칼날 수십 개가 각기 다른 마물의 머리에 꽂혔고, 마물들을 일제히 바닥에 쓰러져 경련했다.
검은 피가 흥건히 흘러나와 셀린느의 발치에 닿았다.
“……휴우.”
링조르는 강력했지만 셀린느의 본디 마력량을 뽑아 쓰는 마법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단, 세밀한 살상에는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더 연습하면 마법에도 큰 도움이 되겠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를 향해 돌아섰다.
“많이 늘었죠?”
“……셀린느.”
라쉬르가 검집에서 뽑혀 나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등에 기분 나쁜 물기가 느껴졌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돌아서면 실수의 대가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죽었는지는 확실히 확인해라.”
“명심할게요.”
링조르로 하는 마물 처치는 처음이다 보니, 확실히 죽었는지에 대해 감을 잡기가 어려웠다.
셀린느는 다시금 몸을 돌려 앞을 향했다. 레온하르트가 완전히 두 동강 낸 마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레온하르트가 천장에 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았다. 구멍 사이로 위층이 보였다.
“저기로 가 보는 게 좋겠군.”
셀린느는 무심코 손을 들어 구멍까지 닿는 얼음 사다리를 만들려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괜찮다.”
“그래도요.”
“걸어가면 돼. 조금 천천히 도착한다고 누가 죽는 것도 아니니까.”
레온하르트의 말에 셀린느의 딱딱하게 굳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일단, 링조르를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딘가.
만약 이게 없었다면 셀린느는 꼼짝없이 레온하르트의 짐 덩어리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정신만 차리면 돼.’
셀린느는 링조르를 쥔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그들은 금방 위층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잔챙이 마물 몇 마리만 만났을 뿐, 찾아야 할 우두머리 마물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성 밖으로 나간 걸까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다.”
“그럼 어디에…….”
“적어도 이 안에 있는 건 확실하다. 놈들은 한 번 점거한 성을 절대 포기하는 일은 없으니까.”
“왜 그럴까요?”
“구조물에 안정감을 느끼는 모양이더군.”
인간이 만든 구조물에 집착하는 파괴와 살육의 존재.
모순적으로 느껴졌지만, 지금의 셀린느에겐 당장 해결해야 할 현실이었다.
그들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계속해서 우두머리 마물을 찾았다.
“허억…….”
셀린느는 벽면에 기대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많이 힘든가?”
“조금요.”
셀린느는 그동안 몸에 흘러넘치는 마법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주었는지 깨달았다.
추우면 따뜻하게 몸을 덥히고, 어딘가를 이동할 때 지름길을 놓는 게 이렇게 그리워질 줄은 몰랐다.
“익숙해져야죠.”
“…….”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셀린느의 곁에 멈춰 섰다. 어떻게 그녀를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곧 마법을 다시 쓸 수 있을 거라는 말은 부담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익숙해질 거라는 말은…… 셀린느가 마법을 되찾지 못하리라는 뜻이었으니까.
바로 그때, 셀린느가 기댄 벽면이 진동했다.
“뭐, 뭐죠?”
“비밀 통로가 있었나 보군.”
레온하르트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라쉬르로 진동이 느껴진 벽면을 바로 갈라버렸다.
텅 빈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통로의 끝에는…….
‘성게?’
거대한 성게처럼 생긴 우두머리 마물이 가시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왜 저러죠?”
“덩치가 너무 커져서, 갇힌 것 같은데…….”
레온하르트가 통로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 때였다.
-콰쾅!
우두머리 마물은 무서운 기세로 통로를 박살 내며 그들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갇혔다면서요?”
“그냥 쉬고 있었나 보군.”
레온하르트는 태연스레 라쉬르를 고쳐 잡았다.
다음 순간, 우두머리 마물의 수없이 많은 뿔이 일제히 부러져 민둥한 살갗이 드러났다.
-화르르!
라쉬르의 푸른 불꽃이 통로를 한가득 메웠다.
레온하르트는 오른팔을 길게 뻗어 통로 입구를 겨냥한 채,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수 초 후.
불길에 휩싸인 거대한 덩어리가 그에게 돌진했다.
-푹
라쉬르가 불덩이를 관통했다.
검은 액체가 팔을 타고 흘러 레온하르트의 전신을 뒤덮었다.
라쉬르를 빼내자 우두머리 마물의 육중한 몸뚱이가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우두머리 마물의 단단한 핵을 빼낸 다음, 셀린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어서 가지.”
잠시도 이 참혹한 성내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
베론 남작저에 머무는 모든 사람들은, 육중한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모두 우르르 몰려갔다.
“공자님!”
“대공자님!”
소란은 샤프 백작이 조용히 하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야 수습되었다.
아직도 상반신에서 마물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샤프 백작, 우두머리 마물을 처치했습니다. 이제 남은 기사단만 데리고 들어가셔도 될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백작가는 대대손손 공자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품에서 주먹만 한 물체를 꺼냈다.
검고 단단한 돌처럼 보이는 물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섬뜩한 붉은빛이 감돌았다.
“이건…… 우두머리의 핵 아닌가요?”
“본디는 황실에 귀속되는 것이나, 여긴 제가 황실과 무관하게 오지 않았습니까. 재건에 쓰십시오.”
샤프 백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공자께서 가지십시오.”
레온하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게 이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대신, 청을 하나 들어주십시오.”
“뭐든 말씀하세요.”
“샤프의 모든 광산에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