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짐꾼들은 상자와 궤짝의 모든 짐들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대니는 그들을 감독하며 각종 장신구와 옷을 일사불란하게 정리했다.
“저어, 대니.”
셀린느는 대니가 조금 한숨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짐들이 정리되어 갔을 때, 조심스레 물었다.
“옷이 왜 이렇게 많죠?”
“공자님께서 남부로 갈 거라고 하셨거든요.”
“……!”
아가티르수스에서 돌아온 후, 셀린느는 퀘스트 [남부의 티아라를 찾아라]에 대해 레온하르트와 이야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그 짧은 사이 양피지에 적힌 글귀를 눈여겨본 모양이었다.
‘레온하르트…….’
이제는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그에게 대체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까.
하지만 셀린느가 고민에 한참 잠겨 있을 때, 대니가 그녀를 재촉했다.
“루테, 어서 준비해야 해요.”
“연회는 내일 아닌가요?”
“루테께선…… 일종의 개선장군이시잖아요. 거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빛나야죠!”
“레온하르트는요?”
“본인이 알아서 잘 챙겨 입으실 거예요. 은근히 저런 자리를 좋아하시거든요.”
“레온하르트가요?”
셀린느는 깜짝 놀라 눈을 깜박였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공녀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셀린느는 나타샤가 대니를 놀리려 한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니는 오늘은 가장 어울리는 차림새를 정해야 한다며 옷과 장신구들이 가득한 빈방으로 셀린느를 이끌었다.
‘……?’
대니가 들고 다가온 옷은 얇은 하늘색 드레스였다. 여름에 입는 가벼운 드레스에 가까워 보였다.
셀린느가 드레스를 다 입자마자, 대니가 방금 입은 것과 비슷해 보이는 드레스를 들고 다가왔다.
다만, 분홍색이라는 점이 달랐다.
“벗을까요?”
“아뇨. 그 위에 입으셔야 합니다.”
“네……?”
셀린느는 귀를 조금 의심했지만, 순순히 대니의 요구에 따랐다.
곧바로 대니가 또 비슷한 모양의 드레스를 들고 다가왔다. 이번에는 연두색이었다.
“……설마, 이거 말고도 또 있는 건 아니겠죠?”
대니는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두 벌 더 있습니다.”
“……!”
셀린느는 거부하려 했지만, 제발 한 번만 입어만 달라는 대니의 애원에 넘어가고 말았다.
마침내, 셀린느는 다섯 가지 드레스를 모두 입었다.
전부 가벼운 드레스였기 때문에 좀 무겁기는 했지만,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움직여 보세요.”
셀린느는 조금씩 몸을 돌려 보았다.
‘아…….’
뿌옇기만 하던 드레스의 빛깔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하늘빛에서 연둣빛으로, 연둣빛에서 노란빛으로, 노란빛에서 또 하늘빛으로…….
그리고 그 모든 빛깔들을 은빛이 덮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정말…… 예쁘네요.”
“그렇죠?”
대니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원랜 공녀님의 생각이었어요. 몇 달 전부터 만드신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가씨를 위해 양보하셨죠.”
“나타샤가…….”
그러고 보니,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하늘하늘하고 파스텔색 톤인 것이 나타샤의 취향이었다.
“하루 만에 루테의 체형에 맞춰 뜯어고친다고 재봉사들이 얼마나 고생했다고요.”
대니는 숄 대여섯 개 중 드레스와 가장 어울리는 것을 결정한 다음에야 셀린느의 머리를 만지기 시작했다.
세 시간 후.
셀린느는 자신의 초라한 머리카락으로 열 개가 넘는 머리 모양을 만들어 낸 대니를 존경하게 되었다.
“이제 좀 쉬면 안 될까요?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아요.”
대니는 무척 아쉬운 눈치였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셀린느의 안색을 보고는 한 발짝 물러섰다.
“어서 들어가서 쉬세요.”
셀린느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오후.
셀린느는 기진맥진한 몸으로 마차에 탔다.
중요한 일은 이미 전날 해 보았으니 옷만 입은 후 연회장으로 가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대니가 데려온 미용사는 셀린느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몇 시간 동안 괴롭혔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냥 피곤할 뿐이에요.”
레온하르트가 마차의 맞은편 의자에서 셀린느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잘생겼어…….’
그가 연회를 좋아한다는 나타샤의 말이 진실인지는 몰라도, 알아서 옷을 잘 차려입는다는 건 정말이었다.
하기야, 못 입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거적때기를 걸쳐도 빛이 날 것 같은 외모가 아닌가.
어느덧 그들은 연회장 입구에 도달했다.
영화처럼 그들을 호명하는 시종은 없었지만, 연회장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다.
레온하르트가 슬쩍 물어왔다.
“혹시, 긴장되나?”
“아뇨.”
“다행이군. 힘들면 바로 돌아가려고 했으니까.”
“그럴 리가요.”
수도 없이 죽었다. 겨우 아가티르수스의 파괴를 축하하기 위한 연회 정도로 긴장할 리가 없다.
레온하르트는 가장 먼저, 그들을 빤히 응시하는 황태자에게로 다가갔다.
“리카르도 전하, 강녕하셨습니까.”
“……다쳤다고 들었는데,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군.”
“보내 주신 의사 덕분입니다.”
황실 직속 의사는 마물에 입은 상처에 손도 대지 못하고 돌아갔지만, 레온하르트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거짓말했다.
“그래, 그럼 즐기도록.”
황태자는 최대한 빨리 그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었는지 대놓고 딴청을 피웠다.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인사하고 셀린느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전혀 안 기뻐 보이시네요.”
상황만 보자면 황태자의 기분이 좋아야 정상이었다. 그의 명을 받은 레온하르트와 셀린느가 아가티르수스를 파괴했으니까.
그런 황태자의 기분을 좋지 않게 할 사람은, 이 제국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폐하께서 한 소리 하신 모양이지.”
레온하르트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한 후 시종이 든 은쟁반에서 잔을 집어 들어 셀린느에게 건네주었다.
“술 아니에요?”
“그럴걸. 문제 있나?”
“아뇨.”
셀린느는 그대로 들이마셨다.
당장 오늘 마물을 죽이러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 술 몇 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맛있네요?”
술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한 탄산음료 맛이 났다.
“이것도 황실 독점인 걸로 안다.”
셀린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맛있는 걸 황실에서밖에 못 만든다니…… 따라 하면 목이라도 자르나?’
어느덧 악단이 처음 듣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주로 들었던 장중한 곡과 달리 빠르고 경쾌했다.
그때, 화려한 옷차림의 남자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레온하르트에게 할 말이 있는 사람인가 보네.’
셀린느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남자는 셀린느에게로 따라붙었다.
“레이디, 저와 함께 한 곡 추시겠습니까?”
“……?”
셀린느는 무척 당황해 잠시 입을 뻐끔거렸다. 당연히, 그녀는 이곳 세계의 춤에 대해선 하나도 몰랐다.
배우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춤을 추다 발이 삐끗해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죄송해요. 아가티르수스에서 빠져나온 지 며칠 안 지나서, 많이 피곤하네요.”
“아,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남자는 사과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춤이 싫은가?”
“못 춰서요.”
문득 올려다본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어딘가 즐거운 표정이었다.
‘연회를 좋아한다는 게 정말이었구나.’
셀린느는 술을 한 잔 더 들이켜며 뱅글뱅글 돌기 시작하는 남녀들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선남선녀들을 바라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간식이나 안주류는 없으려나.’
셀린느가 먹을 것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순간, 누군가 인파를 헤치며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눈 밑 짙은 다크서클과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 어딘가 예전의 레온하르트를 떠올리게 만드는 젊은 여자였다.
여자는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공자, 루테. 축하드립니다.”
이번엔 레온하르트가 아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레이디 아니타,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샤프 백작께선 건강하시고요?”
“아버지께선 돌아가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샤프 백작입니다.”
“……!”
레온하르트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샤프 백작은 물러나는 척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휴게실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
샤프 백작은 순식간에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미안하지만, 당장 휴게실로 가는 게 좋겠군.”
셀린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레온하르트의 곁을 걸었다.
중간중간 벌써 자리를 떠냐냐고 물어 오는 사람들에게, 피곤해서 좀 쉬었다 와야겠다고 웃으며 대답하니 수긍하는 눈치였다.
휴게실은 개인적으로 쉴 수 있는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직 연회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샤프 백작?”
레온하르트가 큰 소리로 물었다.
문 하나가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들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루테도 오셨군요?”
샤프 백작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레온하르트가 조용히 대답했다.
“같이 들어야 할 내용 아닙니까?”
“……그렇겠군요.”
샤프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말씀드리지요. 일주일 내 공자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샤프에 생명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을 겁니다.”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샤프의 기사들은 실력이 출중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샤프 백작의 눈이 붉어졌다.
“가장 뛰어난 자들이 황도로 차출당했다는 건, 공자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지원 요청이라도…….”
“저희가 바보인 줄 아십니까? 수도 없이 했습니다!”
샤프 백작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께선 절 공자께 보내려다 목숨을 잃으셨어요!”
“……실언이었습니다. 사과드리지요.”
샤프 백작은 곧바로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힌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선 분명 지원 요청을 받으셨습니다. 하지만 무시하셨죠.”
“…….”
“그 이유는 공자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년 전, 전 샤프 백작은 본인 소유 광산에서 난 사람 크기의 마력석을 황실에 팔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일견 사소한 일로 보였던 이 사건은, 샤프 백작령을 전 제국으로부터 고립시켜 서서히 말라 죽게 할 지경까지 갔다.
결국 전 샤프 백작이 정예 기사단을 황제에게 바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황실은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은 것이다.
“바로 떠나는 게 좋겠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샤프 백작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레온하르트는 서둘러 본론으로 들어갔다.
“먼저 출발하십시오. 혹시 벅켄 후작과는 아직도……?”
“여전히 좋다곤 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생존자들은 베론 남작령에 피신하고 있습니다.”
“그럼, 남작령에서 뵙겠습니다.”
샤프 백작이 휴게실을 떠나자마자 레온하르트는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만간 갈 줄은 알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가게 될 줄이야.”
“네……?”
“샤프 백작가는 남부를 대표하는 가문 중 하나다. 그리고, 샤프 백작령에 위치한 일곱 개의 광산을 남부의 티아라라고 부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