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 아가티르수스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에 의해 단 하루 만에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직접 보낸 전령으로부터 보고받은 관리들도 그 사실을 믿지 못했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베르누이 대공자가 분명…….”
“예전에 시도했을 땐, 반죽음 상태로 튀어나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몇 년 전이었잖나.”
“당장 확인할 기사단을 보내야…….”
“만에 하나 아닐 경우도 생각해야지. 정예 기사단을 잃으면 대공자가 북부에 있을 시 황도는 누가 지키나?”
“대공자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착각일 수도 있다는 거지.”
오전 내내 설전을 벌이던 관리들은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황제를 알현하러 온다는 소식에 더욱 시끄러워졌다. 비단 관리들뿐만이 아니었다.
황족부터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 하녀들에 이르기까지 리브론성의 모든 사람들이 레온하르트에 관한 이야기를 입에서 떼지 못했다.
그 결과, 레온하르트가 셀린느와 함께 황제의 알현실이 있는 본성 앞에 도달했을 땐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다들 왜 저러죠?”
셀린느는 조금 겁을 집어먹었다. 레온하르트가 유명 인사라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리고 이 제국의 영웅이기도 하지.’
차라리 몸짓 하나하나에 환호성이 울려 퍼지는 연예인 팬 같은 군중들이었다면 걱정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파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온하르트와 자신을 뜯어볼 뿐이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별일은 아니겠지.”
레온하르트는 이런 느낌의 군중을 몇 차례 겪어 본 적 있었다.
가장 최근은, 셀린느를 만나기 몇 달 전이였다. 그가 크게 다친 몰골로 리브론성에 도착했던 적이 있었다.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은 군중들은 ‘그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다쳤다는 사실에 호기심에 차 몰려들었다.
셀린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듯했다.
“그래도…….”
“흔한 일이다.”
그는 셀린느를 자신 쪽으로 조심스레 끌어당기고, 구경하는 인파를 그대로 무시한 채 리브론성의 중심, 다나이엘 궁전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알현실은 다나이엘궁의 입구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둘은 알현실의 거대한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저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셀린느는 마지막으로 물어보았으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알현실의 문이 안쪽에서부터 열렸다. 발을 들이니 황제 직속 기사단이 문으로부터 옥좌까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옥좌에서 적당히 떨어진 지점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를 정식으로 알현하는 건 몇 년 만이었지만, 알현실은 고향처럼 친숙했다.
“프레데릭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근엄하게만 보이던 황제가 옥좌에서 내려와 레온하르트를 일으킨 것이었다.
“어서 일어나게. 몸은 괜찮은가?”
“예.”
“고생이 많았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에 역경으로 주름진 얼굴의 황제는 잠시간 레온하르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사정은 리카르도에게서 들었다. 무례한 짓을 했더군.”
“잘못된 판단으로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송구할 뿐입니다.”
황제는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리카르도가.”
“예……?”
“자넨 짐의 명을 따랐을 뿐이다. 리카르도가 자네를 그런 식으로 취급한 건, 짐에게 반기를 든 것이나 마찬가지지.”
“…….”
레온하르트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짐의 뒤를 이을 자식이니 처분을 내리지는 못하겠으나…… 자네에게 충분한 포상은 내리고 싶군.”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황공합니다.”
“단도입적으로 묻지. 뭘 원하나? 자넨 북부의 후계자지만, 남부나 동부에 영지가 있어도 나쁠 건 없겠지. 직위를 원한다면 무엇이든 말하게. 아니면, 황실의 재물을 원하는가?”
“제가 원하는 건 모두 리카르도 전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네.”
황제는 그들이 알현실에 들어설 때부터 작은 함을 들고 있던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시종장은 천천히 다가와 함을 열었다.
별다른 조명을 받지 않아도 무지개색으로 번쩍이는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레온하르트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이건…….”
“받아 주게.”
황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레온하르트는 무릎을 꿇었다. 이건 받을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번쩍이는 단검의 이름은 링조르. 황실의 7대 보물 중 하나였다.
“자넨 장차 대공이 될 터. 원치 않는 영지와 직위는 짐만 될 뿐이겠지. 하지만, 작은 단검 하나 정도는 가지고 다닐 수 있지 않겠나.”
레온하르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링조르는 단순히 겉모습만 신비한 단검이 아니었다.
순수한 마력의 집약체인 링조르는 마검사나 마법사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마도구가, 일반인의 손에 들어가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동안 링조르는 무력이나 마법으로 강력함을 증명한 황족만이 하사받을 수 있었다.
“제겐 라쉬르가 있습니다.”
황제는 그 이상의 토를 달지 말라는 듯, 레온하르트를 엄격하게 응시했다.
“명령이다. 받게.”
레온하르트는 두 손으로 링조르를 받았다.
보석처럼 아름답고 깃털처럼 가벼운 단검은 평범한 사람이 써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평생토록 폐하를 섬기겠습니다.”
단검이 레온하르트의 손 위에서 희미하게 진동했다.
황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검집은 북부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겠지.”
“링조르에 걸맞은 최고의 검집을 만들겠습니다.”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 낸 그 어떤 검집도 링조르를 오래 버텨 내지 못했다.
그래서 링조르의 검집은 하사받은 황족이 직접 만드는 게 전통이었다.
사실 링조르에 검집은 별 필요가 없었기에, 아예 검집 없이 소지하고 다닌 황족도 꽤 되었다.
만족한 듯한 황제의 시선이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는 셀린느에 닿았다.
“셀린느 루테. 고개를 들라.”
셀린느는 황제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눈을 깜박거렸다.
“레온하르트가 곁에 두는 마법사라. 그 존재만으로도 공이 이미 크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돕도록.”
“네……!”
황제는 다시금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를 치하하는 연회를 열도록 하지. 근래 가장 큰 연회가 되겠군.”
“황공합니다.”
마침내, 황제는 옥좌로 돌아갔다.
시종장이 알현이 끝났음을 큰 소리로 외쳤고, 레온하르트와 셀린느는 정중히 인사한 다음 빠른 걸음으로 알현실을 빠져나왔다.
호텔로 돌아가는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레온하르트는 품에서 링조르를 꺼냈다.
“마검인가요?”
“아니.”
“그럼……?”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링조르를 셀린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청회색 눈은 순식간에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이것 자체가 마법이군요.”
“그래.”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조차 이것만 있으면 수십 명을 한순간에 죽일 수 있다.”
“라쉬르와 함께 사용하면 위력이 엄청나겠네요.”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내겐 라쉬르만으로도 충분해.”
“하기야 황실의 보물이니까요. 북부에 보관하실 생각이신가요?”
“아니. 이건, 네가 써라.”
셀린느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제가요?”
“그래. 당연히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만, 이것에 숙달되면 굳이 마법을 써야 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느끼고 있지 않나?”
“…….”
레온하르트의 말이 맞았다. 링조르를 손에 든 순간, 셀린느는 마력이 손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느꼈다.
그간 마력은 항상 셀린느의 일부였으며 체내에 피처럼 흘렀다.
하지만 링조르로부터 발산되는 마력은, 마치 낯선 야수 같았다.
“하지만 폐하께선, 레온하르트에게…….”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하사받았는데, 어떻게 쓰는지는 내 마음 아니겠나? 그리고 내가 죽으면 황실로 귀속되는 검이다. 부담 가지지 말도록.”
‘더 부담되는데……!’
하지만 셀린느는 링조르의 필요성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마법을 쓸 수 없는 그녀에게, 링조르는 최고의 생명줄이 될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레온하르트는 링조르를 다시금 가져와 품속에 넣었다.
“숙달될 때까지 네가 직접 가지고 다니는 건 위험해.”
“얼마나 걸릴까요?”
“길어도 일주일.”
“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건지, 아니면 링조르가 생각만큼 위험한 물건이 아닌 건지 잠깐 고민했다.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해도 그 감각이 어디 가진 않지. 그리고 네 실력을 봐 왔으니까, 확실하다.”
셀린느의 얼굴이 붉어졌다.
“레온하르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맞는 말이군. 슬플 정도로.”
“레온하르트!”
호텔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둘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떠나지 않았다.
***
“셀린느 루테!”
“대니!”
정확히 이틀 후, 대니가 산더미 같은 짐과 함께 호텔에 도착했다.
셀린느는 대니의 따뜻한 두 손을 꼭 잡은 다음 질문을 쏟아 냈다.
“잘 지냈어요? 위험한 일은 없었고요? 아, 대니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루테야말로, 정말 대단한 일을 해내셨잖아요. 아가티르수스라니!”
대니는 흥분한 어조로 외쳤다.
“아가티르수스를 파괴한 건 레온하르트예요.”
“살아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십니다. 아니면 설마…….”
“안 죽었어요.”
셀린느는 재빨리 대답했다. 대니의 얼굴이 곧바로 안도하며 풀어졌다.
“그런데 정말 놀랐어요. 기껏해야 공자님을 빼내기만 하실 줄 알았는데, 그 아가티르수스로 가시다니.”
“많이 걱정했죠? 미안해요.”
대니는 고개를 저었다.
“엄청난 일을 해내셨는데, 미안하실 게 뭐가 있겠어요.”
셀린느는 대니의 반짝거리는 눈에 잠깐 망설였다.
‘말해야겠지…….’
차마 이젠 마법을 쓸 수 없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호위 시녀인 대니가 알아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대니.”
“예?”
“전 당분간…… 마법을 쓸 수 없을 것 같아요.”
“루테……!”
대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셀린느는 억지로 미소 지었지만, 자꾸만 얼굴이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일시적인 것 같으니까.”
“그, 그래도…….”
“하여튼 그래서, 대니가 예전보다 더 많이 고생할 것 같아요. 미리 사과할게요.”
링조르에 대해서는 완전히 숙달되고 난 다음, 대니에게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테!”
대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루테를 지키겠습니다.”
“너, 너무 그러지는 말아요. 대니의 목숨이 제일 중요하니까.”
셀린느는 대니의 자살 소동이 떠올라 황급히 만류했다.
“그런데, 이 짐들은 다 뭔가요?”
대니가 도착한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아직도 짐꾼들은 객실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아, 공자님과 루테를 위한 황실 연회가 열린다는 연락을 받았으니까요. 허투루 준비할 순 없죠.”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그럼 이게 다 연회를 위해……?”
“예.”
대니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무얼 기대하셔도 그 이상을 보여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