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셀린느!”
“하하하하하……!”
레온하르트의 입에서는 비명이, 노인의 입에서는 광기 어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셀린느는 그저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마법을 썼다. 그렇게 레온하르트가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마법을……!
심장이 쉴 새 없이 달음박질하는 와중에, 그녀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마법을 쓰면 흑마법에 강하게 이끌릴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 셀린느의 전신은 두려움에 압도되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 사람은 죽을 거야…….’
치명상을 입힌 건 레온하르트의 라쉬르였으나, 죽음을 초래한 근본적 원인은 바로 그녀의 마법이었다.
물론, 머리로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은 흑마법사이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을 것이다.
혹은 죽도록 유도하거나.
게다가, 레온하르트가 흑마법사인 줄 알았던 파벨 경을 죽였을 땐 별 충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과 두려움이 셀린느를 지배했다.
바로 그때, 노인의 충혈된 눈이 번쩍 떠지더니 크게 치켜 올라갔다.
노인은 라쉬르에 관통당한 몸에서 대체 어디 힘이 남아 있었는지 고개를 들고 셀린느를 노려보았다.
셀린느는 뒷걸음질 쳤다.
노인의 두 눈은 고통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그런 거였군!”
그리고, 숨이 끊겼다.
“……!”
셀린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방금 노인이 내뱉은 의미 모를 말 때문이 아니었다.
노인의 긴 수염과 흰 머리칼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더니, 살덩이 전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앞의 광경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다리가 돌덩이처럼 느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레온하르트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은가.”
“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흑마법에 전혀 끌리지 않으니까, 아니, 마법 자체에…….”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지금 느끼는 감정을 레온하르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마법을 쓸 수 없을 것 같다고, 마법이 두렵고 역겹게 느껴진다고…….
“마법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중요한 사안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뭘 말하려고 했나.”
셀린느는 불안한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다, 간신히 입을 열었다.
“되려, 더럽게 느껴져요. 두렵기도 하고…… 더는 마법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셀린느에게는 놀랍게도, 바싹 날이 서 있었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은 곧바로 안도감으로 풀어졌다.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에 물드는 마법사들의 전조 증상을 기억했다.
하나같이 더욱더 많은 마법, 더욱더 많은 힘을 추구했지 마법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레온하르트가, 그랬다고요?”
“그래. 오래전 일이지만.”
셀린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오래전이라고……?’
레온하르트의 나이는 스물넷.
그런 그가 오래전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면 대체 몇 살 때 일이었다는 걸까.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더 이상의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셀린느 역시 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법은 억지로 쓸 것 없다. 어차피 이자가 무너졌으니, 남은 것들은 나 혼자로도 문제없어.”
레온하르트는 무심코 이제는 오물 덩어리로밖에 안 보이는 흑마법사의 잔재를 가리켰다.
“우욱……!”
곧바로 셀린느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어서 나가는 게 좋겠군.”
“기분이 너무 이상해요.”
셀린느는 무심코 레온하르트의 오른팔을 부여잡고 일어났다가, 왼팔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레온하르트, 약 먹고 출발해요.”
“그건 아껴 둬.”
“레온하르트!”
“귀한 것이지 않나. 아까 네 말마따나, 아껴 둬야지.”
“…….”
레온하르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셀린느의 꿈]의 스테이지들은 갈수록 어려워졌기에 힐링 포션은 아껴 두는 게 맞았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왼팔을 조심스레 신경 쓰며 걸었다.
돌아가는 길은 길고 울퉁불퉁했지만 사악한 기운이 한결 사라져 훨씬 견딜 만했다.
셀린느의 몸에선 천천히 긴장이 풀려 갔다.
갑자기, 마물 무리가 나타날 때까지.
“……!”
오늘 그녀가 겪었던 마물들에 비하면 대수롭지 않은 마물들이었다.
만약 어제의, 아니 한나절 전의 그녀였다면 순식간에 불살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마법을 쓰기 위해 마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조차 두려웠다.
“잔챙이들이야. 금방 처리할 테니 앉아서 쉬도록.”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
하지만 그 모든 노력과 성과들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아니야. 레온하르트도 극복했잖아.’
셀린느는 흙과 마물의 피로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을 거야. 레온하르트에게 어떻게 극복했는지 방법을 물어보고……!’
마물의 숨결이 바로 등 뒤에서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무리에서 이탈해 약해 보이는 쪽을 노리러 온 마물을 눈치채지 못한 탓이었다.
셀린느는 즉각 몸을 돌려 마법을 날리려 했지만, 느껴지는 건 토기뿐이었다.
-쨍!
무언가 연약한 재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셀린느!”
다른 마물들을 모두 처치한 레온하르트가 어느새 달려와 셀린느를 공격한 마물의 목을 날려 버렸다.
“다, 다친 곳은! 어서 약을……!”
“전 괜찮아요.”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일단은 신뢰하지 않은 채,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다행히 셀린느는 조금 멍하고 어리둥절해 보였지만 조금 전 마물에는 전혀 다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그녀는 대답 대신 품속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졌다.
난생처음 보는 주먹만 한 수정구가 몇 조각으로 쪼개어져 있었다.
“이건 대체 뭐지?”
레온하르트는 수정구의 겉면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겉은 투명해 보였으나, 속은 전혀 보이지 않아 일종의 마법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칼 루테는 수정구를 다루지 않을 텐데.”
수정구는 예언자들의 물건이었다.
자신에 대한 불길한 예언을 들은 후, 크게 노한 베르누이 대공이 모든 예언자를 북부 밖으로 추방했기 때문에 북부에서부터 가져온 건 아닐 것이다.
셀린느는 대답 대신, 수정구 조각을 갈라 보았다.
“……!”
안엔, 구깃구깃 접힌 양피지 조각이 들어 있었다. 셀린느는 황급히 양피지 조각을 펼쳤다.
상아색 양피지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남부의 티아라를 찾아라]
“아…….”
셀린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상아색 양피지가 잘린 모양새와 고풍스러운 글씨체, 심지어 모서리의 얼룩까지 모두 눈에 익숙했다.
드물게 뜨는 퀘스트 창.
[셀린느의 악몽]은 퀘스트 없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기만 하면 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간혹 플레이어가 어떻게 클리어를 해야 할지 감도 못 잡을 정도로 어려운 스테이지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런 퀘스트 창이 뜨곤 했다.
진엔딩 루트의 두 번째 스테이지는, 시작부터 만만치 않음을 알리고 있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설명, 해 줄 수 있나?”
“…….”
셀린느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간 그녀는 레온하르트에게는 기행으로밖에 안 보일 행동들을 얼버무려 왔다.
사실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냥 탑에서 주웠다든가…….’
설령 셀린느가 설명을 거부하더라도 레온하르트는 강요할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렇게 할 수는 없어.’
셀린느는 게임 속 다양한 스테이지들을 떠올렸다. 도저히 북부나 황도로는 보이지 않는 스테이지가 많았다.
진엔딩 루트에선 스테이지가 통폐합된다 하더라도 그중 대부분을 들러야 할 것이다.
그때마다 레온하르트에게 둘러대는 건, 그에게나 자신에게나 할 짓이 못되었다.
“……절 미쳤다고 생각하실지도 몰라요.”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청회색 눈동자를 깊숙이 들여다보았다.
그 흔들림이 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는 깨달음에 가슴이 저렸다.
‘셀린느는 아직도 내가 그녀를 의심하리라고 생각하는 건가.’
셀린느가 내놓는 답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 자신이 그리 믿고 있다면 레온하르트 역시 의심치 않을 것이다.
“넌 내가 여태껏 본 사람 중 가장 강한 사람이다. 광기와는 거리가 멀어.”
“…….”
별안간, 셀린느의 눈에 슬픈 기색이 비쳤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무언가 말실수를 했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으나, 곧바로 셀린느의 말이 들려왔다.
“……제가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는 거, 아시죠.”
“그래.”
“그 꿈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제게 걸린 저주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게 저번 그 저택 아닌가?”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네. 그 뒤 또 꿈을 꾸었거든요. 이 수정구를 얻어야 한다는 꿈을…….”
“어떻게 얻었지?”
“그때 저택에서 제가 찾은 열쇠, 기억하세요?”
“물론.”
“토피엔을 돌아다니다 보니, 그 열쇠에 맞는 열쇠 구멍이 있었어요.”
“그것도 꿈에서 봤나?”
“……네.”
“그리고 지금 이건?”
“여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머리가 아파 왔다.
여태껏 레온하르트는 당연히 셀린느가 저택에 있던 시절에만 미래에 대한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에도 계속 꾸었었다니.
만약 셀린느가 여태껏 자신의 악몽과 비슷하게 힘든 꿈을 꾸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면…….
“……꿈, 많이 힘든가.”
“아뇨, 아니에요!”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힘든 감정이나 고통 같은 건 안 느껴지는, 평범한 꿈처럼 꾸는 거라서…….”
“다행이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안도가 담겨 있었다. 그는 한결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네 꿈, 거의 들어맞지 않는 줄 알았는데.”
“맞는 것도 많아요.”
셀린느는 가볍게 대답했다가, 레온하르트가 생각할 법한 자신의 꿈은 대부분 그가 그녀를 죽이는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이었다.
“레온하르트와 관련된 건 다 틀렸어요! 오직 저주와 관련된 것만 맞는 거예요. 그마저도 틀린 게 많고.”
레온하르트는 잠시 고민했다.
그동안 자신은 줄곧 예언자들이란 모두 반쯤 정신이 나갔거나 사기꾼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셀린느는 양쪽 모두 아니었다.
물론 자신에 대해선 완전히 틀린 걸 생각하면 그다지 신뢰는 되지 않았지만, 저주에 관해선 더러 맞는 듯했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진 않는군.”
“정말요……?”
“그리고, 그 저택에서처럼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겠다.”
“……!”
셀린느의 청회색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감격에 겨워 물기가 서렸다.
“레,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는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셀린느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물기가 기쁨의 눈물이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
다음 날.
리브론성은 아침부터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