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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5화 (35/120)

35화.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레온하르트의 진지한 두 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만 기억해라. 넘어가지 마라.”

“네.”

그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셀린느가 흑마법사가 될 경우를 대비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자신이 흑마법사가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기에.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흑마법사가 될 경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았기에.

죽이고, 되살아나기 전에 죽이고, 또 죽이고…….

레온하르트는 이를 꽉 악물었다. 지금으로선 오직 셀린느를 믿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설령 지금을 잘 넘기더라도, 앞으로 타깃이 되겠지.’

셀린느에 대한 정보가 전 세계로 퍼졌으리라는 사실에 가슴이 시큰했다.

전부 그의 탓이었다. 아가티르수스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덤벼든 결과이니.

“악!”

셀린느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발밑에 무언가 뜨겁고 물컹한 것이 밟혔다.

그녀가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푸른빛이 눈앞에서 번쩍이더니 시커먼 피가 발목을 적셨다.

레온하르트가 한숨을 내쉬며 라쉬르를 검집에 집어넣었다.

“……역시.”

“뭐죠?”

“계속 이런 것들을 보낼 거다. 내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그리고 네 마법을 유도하기 위해.”

레온하르트는 쓰게 내뱉었다.

“그날, 기억하나? 처음으로 마물을 보았던 날.”

“네.”

“내키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날처럼 해야겠군. 그때처럼 내 뒤에만 붙어 있도록. 절대 마법은 쓰지 말고.”

“발밑에서도 올라오잖아요.”

“네가 해를 입기 전에 처치할 수 있다. 믿어다오.”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하르트의 뒤에 숨어만 있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흑마법사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는 건 더더욱 원치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듬직한 등에 바싹 달라붙었다. 등이 조금 긴장하더니, 레온하르트의 목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보기보다 병에 약했다. 갑작스러운 열병이라도 났다면 큰일이었다.

“어디 아파요?”

“아니.”

“열이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레온하르트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몸을 슬쩍 피했기 때문에 셀린느는 그의 이마조차 짚어 보지 못했다.

‘하기야, 아프다고 해도 여기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힐링 포션은 전신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었지만 바이러스성 질환에도 먹힌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쿠웨에엑!

갑자기, 뻥 뚫린 천장에서 거대한 마물이 떨어지며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니까.

셀린느는 벌레의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악취 나는 진액에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주 옛날처럼 느껴지는 그날처럼, 눈을 꽉 감은 채 레온하르트에게 의지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법을 써서는 안 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법이 없더라도, 셀린느는 절대 당시의 무력하고 아무것도 몰랐던 그녀가 아니었다.

셀린느는 펄쩍 뛰어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물러섰다.

‘돌아가면 칼을 배워야겠어.’

흑마법사 외에도, 그녀가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는 상황이 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지금처럼 레온하르트의 뒤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스으윽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어디선가 육중한 생명체가 흙바닥에 몸을 끌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우두머리……!’

그날 보았던 우두머리 마물과 매우 흡사한 우두머리 마물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셀린느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두머리 마물‘들’이었다.

서로 하나처럼 한데 엉겨 붙은.

거대한 구더기들은 서로를 물고 물린 채 그들을 향해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셀린느는 올라오는 토기를 간신히 참았다. 구역질 따위로 레온하르트를 방해해선 안 된다.

하지만 셀린느는 계획처럼 우아하게 레온하르트의 뒤에 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구더기들이 대놓고 셀린느만을 노리며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악!”

셀린느는 비명을 참으려 했지만 자꾸만 벌어지는 입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순간, 라쉬르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번쩍였다. 구더기 마물들은 모두 쩍 갈라진 단면을 내보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모양만 우두머리 마물을 흉내 낸 것들이다. 그자도 생각보다 밑천이 바닥난 모양이군.”

불행히도, 레온하르트의 추측은 틀렸다.

셀린느가 처음 보는 형태의 마물들이 끝도 없이 나타나 오직 그녀만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은 악취 나는 검은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서로를 의지하며 서 있었다.

마물이 더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공간은 계속해서 진동해 살짝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셀린느는 헐떡이며 물었다.

“이렇게 힘을 다 빼놓은 다음, 굶어 죽게 하려는 게 아닐까요?”

레온하르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시도를 한 자도 있었지.”

“네……?”

“당연히 실패했다. 마물의 고기도 바싹 구우면 먹을 만하거든.”

“레,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더듬거렸다.

악취 나고 흉측한 마물의 살덩이들은 불에 굽는다고 먹음직스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레온하르트의 입맛은 까다로운 편.

고독 속에서 굶주림을 버티다 역겨운 고기를 입에 넣었을 레온하르트를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반응을 잘못 받아들인 듯했다.

“걱정할 것 없어. 저자들은 정보를 공유하니 그런 헛수고를 다시 하지는 않을 거다.”

“정말 다행이네요.”

셀린느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굳이 레온하르트에게 자신이 가진 연민을 꺼내 보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나도 일주일간 굶지 않았더라면…….”

레온하르트는 말을 멈추었다.

그들이 서 있는 땅 전체가 진동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상을 향해 솟아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수직으로.

셀린느는 엉겁결에 레온하르트를 부여잡았다.

레온하르트의 몸은 팽팽히 긴장한 채 당장이라도 적을 벨 준비를 하고 있었다.

땅은 속도감은 느껴지지만 공포감이 느껴지지는 않을 속도로 솟아올랐다.

문득, 셀린느의 입에서 친숙하지만 이곳의 사람으로서는 낯설어야 할 단어가 튀어나왔다.

“엘, 엘리베이터……?”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셀린느가 재빨리 대답하자마자 움직임은 멈추었고, 그들은 흑마법사가 기다리고 있는 지상에 안착했다.

‘어디지……?’

이곳은 그들이 추락했던 터널이 아니었다.

종유석과 석순이 서로 맞닿아 일자 기둥이 될 정도로 자란 동굴 안이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동안 얼마간 느껴지지 않았던 사악한 기운이 이곳에 전부 몰려 있는 듯했다.

악취 역시 더욱 심해져,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였다.

동굴 한가운데, 종유석과 석순이 한데 들러붙어 만들어진 거대한 붉은빛 석주가 눈에 들어왔다.

허연 수염을 기른 흑마법사는 피처럼 붉은 석주 바로 앞에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야.’

셀린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마법사의 충혈된 눈은 오직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진 입이 천천히 움직였다.

“무력하게 느껴지지 않나? 힘이 있는데도, 쓰지 않는 자신이…….”

셀린느는 귀를 막고 싶었다.

첫마디부터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본 자가 쏟아 낼 말들이 두려웠다.

레온하르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네놈의 말장난은 소용없다.”

“하! 새끼 늑대,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얘기하지? 마법사라면 알 수 있다. 힘이 주는 그 희열을……!”

흑마법사의 눈이 기이하게 번득였다.

“어린 마법사여, 동족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마법을 써 보아라. 그러면 무사히 내보내 주마.”

셀린느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레온하르트 역시 잠시간 몸을 뻣뻣하게 굳혔을 뿐,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침묵이 동굴 전체를 잠식했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들이 서 있는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

경악한 쪽은, 흑마법사였다.

“여기는……!”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사의 팽팽한 집중력이 끊어진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셀린느에게 자신에게서 떨어지라 외치며 몸을 크게 앞으로 던져 라쉬르를 휘둘렀다.

-퍼더덕!

흑마법사는 온데간데없고, 잿빛 박쥐 한 마리가 날갯짓하며 레온하르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라쉬르를 단검으로 바꾸어 박쥐를 쳐 냈다.

라쉬르가 잿빛 거죽에 닿는 순간 박쥐는 거대한 뱀으로 변해 레온하르트를 칭칭 감았다.

라쉬르를 잡은 오른팔이 압박으로 뒤틀렸지만, 레온하르트는 끝까지 라쉬르를 놓지 않았다.

-화르르!

새파란 불길이 레온하르트의 전신에 흘렀다.

그를 옥죄는 뱀의 몸뚱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시뻘건 눈은 괴로운 듯 쪼그라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대검으로 변화시켜 뱀의 몸에 그대로 박아 넣었다.

절반으로 동강이 난 뱀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너부러졌다. 하지만 이는 꼬리 끊기에 불과했다.

다음 순간, 뱀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잿빛 늑대가 나타났으니까.

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늑대와는 형상만 조금 비슷할 뿐이었다.

부드러운 털 대신, 스치기만 해도 살갗이 찢어질 정도로 날카로운 가시가 전신에 박혀 있었으니.

마물의 이를 흉흉히 드러낸 늑대는 바로 레온하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늑대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라쉬르로 시뻘건 눈을 노렸다.

하지만 가시와 이빨, 발톱을 피하면서 눈을 찌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가시가 수북이 박힌 왼팔은 감각이 없어 어깨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상태였다.

레온하르트는 늑대의 육중한 몸이 자신을 눌러 오는 와중에 냉정하게 판단했다.

셀린느가 발견했다는 그 약은 웬만한 상처는 손쉽게 치료가 가능한 듯했다.

어차피 왼팔은 전투에 쓰기 힘드니 왼쪽 어깨를 내주고 단검으로 라쉬르를 변화시켜 눈을 찌른다면…….

레온하르트는 머뭇거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과감하게 움직여 늑대의 머리를 겨냥했다.

당연히 움직이지 못하는 왼팔에 허점이 생겼고 늑대는 바로 왼쪽 어깨와 목이 이어지는 연결 부위를 물어뜯으러 달려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다가올 고통과 부수적인 결과는 머릿속에서 지우고 오직 늑대의 두 눈만을 노렸다.

그의 머릿속엔 자신의 부상을 보고 슬퍼할 셀린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쾅!

폭발음이 울렸다.

천장의 종유석들이 부서져 그들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어둑한 동굴에 섬광이 번쩍였다.

늑대는 머리에 떨어지는 거대한 핏빛 종유석을 피하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벌새의 날갯짓만큼이나 짧은 시간이었으나 레온하르트에겐 충분했다.

레이피어로 변한 라쉬르가 늑대의 왼눈과 오른눈을 관통했다.

다음 순간, 섬뜩한 형상의 늑대는 사라졌다.

전신을 라쉬르에 관통당해 검은 피를 토해 내는 노인만이 바닥에서 꿈틀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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