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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4화 (34/120)

34화.

셀린느는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뿌리가 두 눈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빛을 밝혀도 소용이 없었다.

외적으론 어둠이, 내적으론 공포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뿌리는 태자궁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박으로 그녀를 조였다.

‘마법, 쓰지 말라고 했지…….’

왜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레온하르트의 결정을 완전히 신뢰하고 따라야 할 때였기에, 셀린느는 마법을 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다행히 온몸을 조이는 압박에 익숙해지자 레온하르트와 흑마법사의 대화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런지는, 보면 알겠지.”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던 찰나, 셀린느는 거대한 힘에 의해 내던져졌다.

어둠 속으로.

쾅!

머리가 바닥에 심하게 부딪혔다. 다행히 흙이 느껴졌다. 돌바닥이 아닌, 흙바닥인 모양이었다.

‘죽진 않겠네…… 다행이다.’

셀린느가 고통에 겨워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셀린느!”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억센 손이 부드럽게 셀린느를 뒤흔들었다.

눈이 바로 떠졌다.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레온하르트는 지금 이 자리에 있어선 안 되었다!

“죽었나?”

셀린느는 한차례 헐떡인 후에야 간신히 대답을 짜낼 수 있었다.

“아, 아뇨.”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안도했다.

셀린느의 말은 진실이었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난 그녀의 눈엔 항상 고통과 공포가 비쳤으니까.

더는 그 모습을 보고도 제정신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부드럽게 몸을 빼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두컴컴하고 좁은 통로 안에 있었다.

라쉬르의 푸른 빛이 밝힌 바닥은 회색빛이었고, 천장은 레온하르트의 머리보다 겨우 한 뼘 높았다.

마물의 심한 악취가 품기는 것 말고는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대체 왜…… 여긴…….”

“그자가 널 이곳으로 던져 넣었다.”

“레온하르트……!”

굳이 설명이 없어도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따라 균열에 뛰어들었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셀린느는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레온하르트는 가장 하지 말아야 하는 선택을 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든 죽지 않으니, 레온하르트는 흑마법사와의 대결에 신경을 집중해야만 했다.

“……휴.”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말을 멈추고 눈알만 도르륵 굴리는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능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그자는 어떤 수를 써서든 나를 이곳으로 집어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강하잖아요. 제가 없었다면 순순히 이곳으로 걸어 들어왔을 리도 없고.”

“그건……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는 자신의 말주변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떻게 보고만 있겠나.”

“그것도 그래요.”

셀린느는 조금 체념한 투로 중얼거렸다.

레온하르트를 어떻게 탓하겠는가?

그는 자신을 구하려 했을 뿐인데. 가장 큰 목적인 흑마법사를 눈앞에 두고서.

두어 달 정도 전이었다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선택을 크게 오해했을 것이다.

자신은 어차피 죽어도 죽지 않는 몸.

그런데 왜, 무자비한 악역이 무의미한 구조를 위해 눈앞의 적을 해치울 기회를 포기하는가?

예전의 셀린느라면 레온하르트가 악몽을 꾸지 않기 위해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알아.’

만약 그 자리에 셀린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어도 레온하르트는 균열로 뛰어 들어왔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악당이 아니니까.’

베르누이성에서 지낸 시간 동안, 레온하르트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셀린느는 알았다. 그는 좋은 영주가 될 것이다. 베르누이성이 유령성이 되는 일만 없다면…….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내가 막을 거고.’

셀린느는 5년 뒤, 그리고 10년 뒤의 멀쩡한 레온하르트를 상상했다.

‘나는 그 전에…… 스테이지를 클리어했겠지.’

셀린느의 생각이 더 깊은 곳으로 뻗어 나가기 전에,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상황을 일깨웠다.

“이럴까 봐 오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질책과는 거리가 멀었다.

“저 아직 안 죽었어요.”

“다쳤잖나.”

레온하르트의 눈길이 셀린느가 부딪친 머리에 잠시 머물렀다가, 바로 바닥을 향했다.

“다친 건…… 바로 낫지 않나?”

“죽은 게 아니니까요.”

상처들은 죽은 뒤에야 나았기 때문에, 가끔 셀린느는 마물과 싸우며 팔이나 다리를 잃게 된다면 치료를 받지 않고 자살해야겠다는 섬뜩한 생각을 하곤 했다.

“아까 그 약, 먹는 게 낫지 않겠나.”

“아까워요!”

셀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효능을 직접 체험한 레온하르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레온하르트가 앞으로 그렇게 다칠지도 모르잖아요. 저야 정 안 되면 죽으면 되지만…….”

“안 된다!”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격앙된 한마디가 튀어나왔지만, 셀린느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저보다 레온하르트에게 더 필요한 건 사실이잖아요. 레온하르트도 이 정도 다친 거로는 먹지 않을 거고요.”

“…….”

“저도, 그때 레온하르트만큼 다치면 먹을게요.”

“……약속하도록.”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역시 레온하르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어쩌다가 그렇게…….’

셀린느의 가슴 한편이 조여 왔다.

그녀는 게임 속 그래픽에서 핏발 선 눈으로 주인공을 향해 달려오던 레온하르트를 기억했다.

그리고 그 레온하르트를 여느 게임 속 몬스터와 다름없이 혐오했던 그녀도.

하지만 지금의 레온하르트는 게임 속 레온하르트와 그 어떤 공통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레온하르트는요?”

“……뭔가.”

“어디 다친 곳 없어요?”

“없다.”

“그럼 저희,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가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을 때였다.

갑자기, 통로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뒤흔들렸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셀린느는 태연한 척하며 물었다.

“우리를 산 채로 파묻을 생각인 걸까요?”

“그럴 리 없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저자는 널 죽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자신은 흑마법사 입장에서 귀찮은 조무래기일 뿐일 것이다. 흑마법사 본인도 그렇게 언급하지 않았던가?

‘아.’

셀린느의 머릿속에 불편한 진실이 떠올랐다.

“절 인질로 써야 하니까요?”

인정하기 싫어도, 그녀는 지금 레온하르트의 족쇄였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아니.”

레온하르트는 침통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조종당한 파블 경 기억나나?”

소름이 셀린느의 전신에 우수수 돋아났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자신의 것이 아닌 표정을 짓고, 자신의 것이 아닌 말을 하다 레온하르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을.

“저도 그렇게 만들려고……?”

“더 끔찍한 수를 쓰겠지. 너를……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꼬드길 것이다.”

“그런 일은 절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레온하르트의 입에서 쓰디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정확히 같은 말을 수년 전 들은 적 있었다.

- 레온하르트, 난 절대 흑마법사가 되지 않아.

셀린느가 불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절 못 믿는 거예요?”

“그게 아니다.”

레온하르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어쩌면 그저 가만히 침묵하고 싶어 하는 듯한 그를, 셀린느는 단지 눈빛으로 재촉했다.

“마법사들은…… 모두 힘을 추구하지. 너도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지 않나.”

“알죠.”

마법에 숙달될수록 전신에 흘러넘치는 마력은 그녀를 고양시켰으며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그 힘이 더욱 강해질 수 있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아요, 하지만…….”

“흑마법사의 위력은 직접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레온하르트는 도저히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흑마법사의 위력은 별과 별 사이의 어둠만큼이나 강력하다고.

아무리 하늘에 많은 별이 떠 있어도, 그보다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칠흑 같은 어둠들과 같다고.

“이곳에서 마법을 쓰면 쓸수록 흑마법에 더 이끌리게 될 테다. 그자 앞에서 쓰면 더욱 그렇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그래.”

거짓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일반적인 마법사가 흑마법사에 대항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평생.

“알았어요. 쓰지 않을게요.”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레온하르트를 지그시 바라보다 느닷없이 물었다.

“레온하르트, 이거 알아요?”

“……뭔가.”

“전 제 마법을 사랑해요. 바람을 불게 하고, 어둠을 밝히고, 온기를 선사하며, 물과 얼음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마법 말이에요.”

“…….”

“물론, 무언가를 태워 죽이거나 구조물을 강풍으로 파괴하고, 빛으로 눈을 가리며, 얼려 죽이는 데 사용할 수는 있어요.”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그의 마법은 창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하지만 전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써요. 레온하르트도 그렇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충분히 살육과 파괴를 위해 사용할 수 있잖아요.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범이 될 수도 있다고요.”

“내가 연쇄 살인을 할 이유가 없잖나.”

레온하르트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흑마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어요. 이건 오직 살육만을 위한 힘이라는 걸.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제가 그 힘을 원하게 될 리가 없잖아요.”

“흑마법사들은 각종 마법들을 안다. 저자는 백 년을 넘게 살았어. 평범한 마법사를 유혹하는 덴 도가 텄겠지.”

레온하르트는 쓰게 웃었다.

“게다가…… 저들만의 소통 방식이 있다. 갓 흑마법사가 된 마법사는 끼지 못하지만, 백여 년이나 되었으면 바다 건너 흑마법사와도 소통할 수 있을 거다.”

“……!”

셀린느는 그제야 이자가 얼마나 위협적인 적인지를 인식했다.

“어떻게 이기죠?”

“모르겠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셀린느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레온하르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뒤로 빼내려 했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전, 레온하르트와 이곳에 있을 수 있어서 기뻐요.”

“왜지……?”

레온하르트는 도통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셀린느 한 명 지킬 수 없는 무력한 자신과 있는 게 대체 뭐가 기쁘단 말인가?

“제가 이곳에 없었으면, 레온하르트는 저런 자를 혼자서 상대해야 하잖아요.”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눈앞에서 빛나는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저흰 저자를 없애고, 이 백 년 묵은 마물 구덩이까지 완전히 없앨 거예요. 전 알 수 있어요.”

침묵이 흘렀지만 둘 중 누구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말이 필요 없는 신뢰가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더욱더 강렬해진 진동이 침묵을 깨트렸다.

셀린느는 머리카락을 흔들어 흙먼지를 털어 냈지만, 알갱이 굵은 흙들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왜, 왜 이러죠?”

“네가 힘을 쓰게 하려는 거지. 패턴을 보아하니…… 곧 몸소 나타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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