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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3화 (33/120)

33화.

“저도 잘 몰라요.”

당연히, 셀린느는 있는 그대로 말할 생각은 없었다.

“모른다니?”

“주웠어요.”

“……훔친 건가.”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즉각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 약은 단순히 상처를 낫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온몸에 힘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고, 몸 곳곳에 난 생채기마저 다리의 상처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이 비슷한 약은 소문조차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토피엔이라.’

토피엔에 있던 약이라면 토피엔에 구금되었던 고위 귀족의 보물일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만약 셀린느가 이걸 훔쳐 낸 것이라면…….

셀린느의 한숨이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를 찾다가, 웬 고문실을 발견했어요. 이거 몇 개가 먼지랑 같이 굴러다니고 있더라고요.”

“……!”

순간,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섬뜩한 추측이 떠올랐다.

‘죄수를 최대한 고문하기 위해 이 약을 쓴 건가.’

살짝 쓴 대답을 뱉었다.

“잘 가져왔군.”

셀린느는 생각보다 유한 레온하르트의 반응이 조금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기에 안도했다.

레온하르트는 바로 말을 이었다.

“고맙다. 덕분에 무사히 임무를 마칠 수 있을 것 같으니, 바로 돌아가도록.”

“레온하르트!”

“돌아가.”

“말했잖아요. 돌아가다가 죽을 것 같다고요.”

셀린느는 당당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저 없었으면 레온하르트는 아직도 고생 중이었을걸요.”

“…….”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이마를 짚었다.

‘대체 나는 왜……!’

상황은 명확했다.

셀린느는 그와 함께 가기를 원한다. 당연한 강력한 마법사의 동행은 임무 수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선택을 거부하고 싶었다.

‘쓸 만한 검만 한 자루 더 있다면…… 셀린느가 라쉬르 안에 머무를 수 있을 텐데.’

실소가 절로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라쉬르 없이 어떻게 아가티르수스의 우두머리 마물을 벤다는 말인가?

당사자인 셀린느가 라쉬르로 만든 은신처 안에 머무르려 들지 않을 것임은 물론이다.

위기감이 레온하르트의 전신을 긴장시켰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하나같이 비이성적이었고, 이 문제의 근간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어디 안 좋아요? 약을 먹었으니 괜찮을 텐데.”

“괜, 괜찮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바로 코앞에서 안색을 살피는 셀린느에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

“그럼 어서 출발하죠. 이러다 밤을 꼬박 새우겠어요.”

“……한 가지만 약속해다오.”

레온하르트는 의심으로 가늘어지는 청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일단 들어 보고요.”

“죽지 마라.”

“그거야…….”

“설령 내가 죽는다 한들, 죽지 말라고.”

“……!”

셀린느는 즉각 항의했다. 그녀는 여태까지 해 왔던 것처럼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에선 목숨을 던질 것이다.

당연히 죽음은 항상 끔찍했고, 셀린느의 몸과 정신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도 마음도 결국엔 회복되었다.

한 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는 레온하르트의 목숨과 그 무게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건, 지킬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엔 슬픈 기색이 감돌았다. 더는 셀린느를 설득할 수 없었다.

한마디만 더 했다간,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말을 하게 될 것만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입을 꾹 다물고 라쉬르를 본디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방벽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던 마물들이 떼거리로 덮쳐 왔지만, 힐링 포션을 마셔 모든 상처가 나은 레온하르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제 라쉬르에선 불꽃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평상시처럼 푸르게 달아오른 칼날로 마물들을 도륙할 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푸른 궤적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셀린느는 확연히 지쳐 보였고, 우두머리 마물과의 조우를 위해선 힘을 비축해 두는 게 현명했다.

다행히 셀린느도 이것만큼은 그의 의견에 따라 주었다.

수십 분 후, 그들은 거대한 동굴 앞에 도달했다.

셀린느는 가만히 멈춰서 동굴 내부를 살피는 레온하르트를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설마, 여긴가요?”

“그래.”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들아갈 필요는 없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다리를 성큼 움직여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물 냄새가 끼쳐 왔다. 분명 마법으로 자신과 레온하르트를 덥혔는데도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밀도 높은, 묵직한 한기가 동굴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셀린느는 그에 맞서 온기를 높였다.

갑자기, 레온하르트가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우두머리 마물이구나.’

셀린느는 바로 마력을 전신에 끌어모았다.

아직 우두머리 마물 특유의 악취와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오감보다 레온하르트의 판단을 믿었다.

“허.”

레온하르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마력, 날 덥히는 데 쓸 필요는 없다고 하려 했다. 힘들잖나.”

“……아.”

“만약 우두머리가 느껴지면 신호를 보내지.”

셀린느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레온하르트를 덥히는 데 사용한 마력을 거두지는 않았다.

“셀린느, 마력을 거둬.”

“춥잖아요.”

“난 북부 사람이다. 황도민과는 달라.”

허세를 부리다 감기에 된통 걸린 레온하르트가 곧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말다툼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마력을 거두었다.

레온하르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 마력을 좀 믿으세요.”

“못 믿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곳의 우두머리 마물을 상대하려면…….”

레온하르트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한기가 발밑에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피해!”

레온하르트는 셀린느를 감싸듯 밀쳐 냈다. 동굴 전체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진동했다.

셀린느는 고개를 들자마자 소스라쳤다.

조금 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엔 사람 크기만 한 균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균열에선 사악한 기운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벽에 붙어.”

셀린느는 동굴의 차가운 벽면에 등을 붙이고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레온하르트는 균열 가장자리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

굉음과 함께 균열이 더욱더 커지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균열이 커지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균열 밑바닥에서부터, 거대하고 어두운 무언가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셀린느의 전신이 경악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말라 죽은 듯한 색상의 거대한 나무뿌리가 빠른 속도로 자라나고 있었다.

흰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노인을 태우고.

“……하.”

레온하르트가 신음과 한숨 그 어드메쯤에 있는 소리를 토해 냈다.

여태까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가티르수스는 백 년 동안 방치된 마물 서식지 따위가 아니었다.

백 년간 흑마법사가 자신의 존재조차 들키지 않고 힘을 키워 낸 곳.

레온하르트는 이자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그는 노인이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 전, 셀린느를 지켜 줄 말 한마디를 다급히 중얼거렸다.

“마법, 절대 쓰지 마라.”

“……네.”

셀린느의 대답은 작았지만 명료했다.

레온하르트가 평정을 되찾기에 충분할 정도로.

뿌리는 균열 끄트머리에 노인을 올려놓은 다음, 꿈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리를 꼿꼿이 편 노인이 핏발이 붉게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내 잠을 방해한 자는 누구냐?”

벌어진 입 사이엔 마물의 이와 흡사한 뾰족한 이빨들이 가득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네놈들끼리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레온하르트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애송이 늑대로군.”

노인은 그를 대놓고 비웃었다.

“내가 널 모를 리가 없지. 언젠가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꽁무니 빠져라 도망치지 않았나?”

레온하르트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공격은 이자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한 다음에 해야 한다.

다행히 셀린느 역시 그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는 조용히 말했다.

“어떻게 여기가 흑마법사의 근거지라는 걸 숨겼지?”

노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을 조종하는 건 참 간단한 일이지.”

“……!”

셀린느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말라 죽은 나무뿌리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인간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흑마법사.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당시의 책임자를 조종했군.”

노인은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셀린느는 이것과 정확히 똑같은 웃음소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은 적이 있었다.

파블 데하카가, 레온하르트에 의해 죽기 직전 이렇게 웃었다.

거대한 공포의 해일이 몰아쳤다.

이자는 이성도, 감정도 없이 오직 파괴와 살육만을 행하는 마물들과 달랐다.

인간의 악의.

자신 외엔 아무것도 중요치 않다는 듯한 이기심과 뒤섞인 악의가 셀린느의 전신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파블 데하카도, 당신이 조종했나?”

“나이가 드니 이름으론 모르겠군. 그 고집 센 기사단장 말인가? 하! 꼴에 저항하길래 지옥을 보여 줬지.”

“…….”

순간, 여태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에 금이 갔다.

“왜 그러지? 그자의 목숨을 뺏은 건 자네야, 젊은 늑대.”

셀린느는 딱딱하게 굳은 혀를 간신히 움직였다.

“레온하르트. 저자의 말을 듣지 말아요.”

“……가만히 있어.”

노인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여기 꼬마 마법사가 하나 굴러들어 왔군. 애송이 늑대와 꼬마 마법사라……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레온하르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이자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면 안 된다.

하지만 그러한 태도가 되려 노인의 직감을 건드린 듯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뿌리가 셀린느를 칭칭 감아 버린 걸 보면.

“셀린느!”

“살리고 싶으면 좀 더 예의 바르게 구는 게 좋을 거다. 젊은 늑대야.”

“…….”

레온하르트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셀린느를 칭칭 감은 뿌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셀린느를 잘 알았다. 저 안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마법을 쓰지 말라는 그의 말을 지키며.

“……신경 쓰지 않는다.”

“뭐?”

“죽든, 죽지 않든 내 알 바 아니다. 집안에서 억지로 붙여 준 마법사에 불과해.”

노인은 다시금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과연 그런지는, 보면 알겠지.”

레온하르트의 입이 타들어 갔다. 이자는 정말로 셀린느를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아직도 검집 안 얌전히 잠든 라쉬르의 칼자루에 얹혀만 있을 뿐, 빼낼 기미는 없었다.

그때, 뿌리가 이동했다.

레온하르트는 위치를 계산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자신 쪽으로 이동한다면 노인이 셀린느를 건드리기 전에 뿌리를 끊어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뿌리는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균열 쪽으로.

레온하르트의 손에 진땀이 흘렀다.

셀린느를 균열 속으로 떨어트리겠다는 노인의 의도는 바로 파악했다.

하지만 그가 해야 하는 행동과 하고 싶은 행동이 서로 상충하고 있었다.

균열은 심연으로 보일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백여 년에 걸친 마물의 침식으로 생긴 지하 공간일 것이다.

온갖 사악한 것들로 가득한…….

답은 바로 나왔다.

셀린느는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녀는 죽지 않은 존재니 흑마법사부터 처치하고 그녀를 구해도 된다.

그게 가장 빠른 길이였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깨물었다. 피 맛이 마치 그가 여태까지 벤 무고한 사람들의 피처럼 느껴졌다.

‘셀린느도 그들처럼 희생하고, 이자를 죽이고, 오직 흑마법사를 베기 위한 삶으로 되돌아가는 건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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