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2화 (32/120)

32화.

셀린느는 낭떠러지 건너 자리한 황폐한 채석장을 노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휴.”

아가티르수스를 궤멸시키기까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

자꾸만 그녀의 손에 머리를 파묻는 블랙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너도 심심하니?”

셀린느는 치밀어 오르는 무료함에 불쑥 말했다가, 곧바로 죄책감에 휩싸였다.

레온하르트가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이곳에서 지루함이나 토로하고 있다.

‘……아니야, 이런 생각 하고 있지 말자.’

셀린느는 수많은 죽음을 겪으며 부정적인 감정에 오래 매몰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했다.

블랙이 코를 그녀의 왼쪽 옆구리에 박았다. 아마 각설탕을 달라는 듯했다.

“없어. 아까 그게 전부였거든.”

어느덧 태양은 셀린느의 정수리 바로 위를 지나 서쪽으로 기울었다. 겨울이니 해는 금방 떨어질 것이다.

셀린느는 불안한 눈길로 채석장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아니라, 레온하르트가 늦게 돌아온다는 사실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내 말, 들어 줬을까.’

실패해도 괜찮으니 몸만 조심하라는 말에 뻣뻣이 굳던 레온하르트의 등이 떠올랐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놀라워서일까, 아니면…… 지킬 생각이 없어서일까.’

셀린느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바로 그때.

어슴푸레하던 저녁 하늘이 섬광으로 번뜩였다.

셀린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온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그동안 아무리 많은 마물을 베어도 저렇게 휘황찬란한 빛을 발한 적이 없었다.

셀린느는 금세 빛의 정체를 깨달았다.

‘불이야.’

레온하르트는 반드시 검으로 마물의 목숨을 빼앗아야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죽음이 확실히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했지.’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는 마물들을 불로 태워 죽일 정도로 급해진 모양이었다.

번뜩이는 불빛을 보고 있자니 현대의 조난자들이 쏘아 올릴 법한 구조 신호가 떠올라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야.’

셀린느는 바로 부정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를 부르느니 다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셀린느가 레온하르트를 모르지는 않았다.

번개가 연속적으로 내리치는 것처럼 채석장 부근의 하늘이 계속해서 번쩍였다.

가슴이 점점 더 조여들었다.

-히이잉!

블랙이 불안한 울음을 내지르며 발을 굴렀다.

손을 뻗어 진정시키려는 순간, 블랙은 낭떠러지에서 멀리 떨어진 방향으로 달려가 버렸다.

“블랙!”

레온하르트의 애마는 순식간에 갈기를 휘날리며 셀린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설마…….’

셀린느는 블랙이 주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멀리 달아나는 모습을 딱 한 번 보았다.

당시, 블랙이 달아나자마자 거대한 바위틈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그들을 급습했다.

레온하르트는 블랙이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마물에게 당했을 거라고 말했다.

셀린느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곳은 황무지니, 마물이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은 없다.

하지만 사각지대는 존재했다.

그것도 거대한.

셀린느는 천천히 낭떠러지로 다가갔다. 발을 땅에 단단히 붙이고, 밑을 내려다보니…….

‘역시.’

예상이 맞았다. 새까만 마물들이 삼삼오오 엉켜 절벽을 오르고 있었다.

소름이 쭈뼛 돋았다.

여태까지 그녀가 보아 온 마물 무리들은 우두머리를 지키기 위해 결집했다.

이것들이 낭떠러지를 넘어올 여유를 보인다는 건, 레온하르트가 고전하는 중이라는 뜻이었다.

셀린느의 추측을 증명하듯 이제는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에 시퍼런 빛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번쩍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이 낭떠러지를 건넌다면, 레온하르트와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상관없어.’

셀린느는 결연한 표정으로 푸른빛에 물든 채석장을 바라보았다.

-화르르!

절벽을 기어오르던 마물들이 순식간에 푸른 불길에 휩싸였다.

다행히 수가 많지 않아 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손을 휘젓자 절벽의 두 끄트머리 사이에 투명한 얼음 다리가 놓였다.

셀린느는 곧바로 땅을 박차며 뛰쳐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사방에 죽어 너부러진 마물이 이정표가 되었고, 계속해서 번쩍이는 푸른빛이 나침반이 되었다.

간혹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마물들은 곧바로 불살라졌다.

수십 분 후.

“허억, 허억…….”

셀린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꽤나 달렸는데도 레온하르트가 발하는 불빛은 멀게만 느껴졌다.

‘빠른 속도로 달리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보 같은 판단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보다 한나절을 앞서 있다. 따라잡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셀린느는 돌가루가 휘날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대로 가다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오늘 밤, 레온하르트가 얼마나 황당해하겠는가. 멍청이도 아니고, 그를 따라잡으려다 죽다니.

‘어떻게 하지…….’

셀린느는 너무 지친 나머지 불도 밝히지 않은 채 어둠 속을 노려보았다.

지금 와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레온하르트에겐 그녀가 필요했다.

잠시 후,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한 셀린느는 무거운 몸뚱어리를 간신히 일으켰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다. 이제 시퍼런 불빛은 간헐적으로 번쩍였다.

저 불빛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면, 이 어둠 속에서 레온하르트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이 채석장 전체에 불을 환히 밝힐 수야 있다.

하지만 그렇게 큰 힘을 쓴다면 마물에 무방비한 상태가 되어 버릴 것이다.

셀린느는 다시금 달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고장 난 전구처럼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빛의 근원이 눈에 들어왔다.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소리쳐 부르고 싶은 욕심을 집어삼켰다.

시커먼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쉴 새 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검의 궤적엔 빈틈 하나 없었으며 칼날에서 치솟는 불길의 위력은 강력했다.

거대한 개미 떼처럼 달려드는 마물들은 라쉬르가 만들어 내는 포물선 하나에 수십 마리가 죽어 나갔다.

그녀는 기척을 죽이며 조심스레 다가갔다.

‘……!’

셀린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선 보이지 않았던 상처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물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어깨와 등에 수북이 박힌 건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오른쪽 정강이 전체를 가로지르는, 시뻘건 속을 내보이는 붉은 상처에 정신이 아찔했다.

자세히 보니, 레온하르트는 오른쪽 다리를 아예 움직이지 않으며 싸웠다.

‘……설마, 아예 이동을 못 했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셀린느가 레온하르트를 따라잡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전혀 이동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물 수십 마리가 다시금 해일처럼 레온하르트를 덮쳐 왔다.

-쾅!

폭발음과 함께 마물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고개만 힐끗 돌려 셀린느를 찾아냈다.

“오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셀린느는 노기마저 엿보이는 외침을 가볍게 무시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나, 나는 괜찮…… 아니, 돌아가라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새롭게 덮쳐 오는 마물들의 해일을 해치웠다.

지친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레온하르트를 조금은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좀 쉬어요. 고집부리지 말고.”

“……돌아간다고 약속하면.”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요? 심장 터져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혼자 돌아가면 진짜로 가다가 죽을걸요.”

“…….”

레온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단어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엔, 화를 내려고 했다. 분명 셀린느는 자신을 따라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분명 자신을 덮쳐야 했을 마물들이 익숙한 마법의 위력에 의해 사라졌을 때, 반가움도 안도감도 아닌 공포가 레온하르트를 지배했다.

셀린느가 이곳에 있다.

결코 위험에 빠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

하지만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 분노는 사르르 녹아내렸으며 경직된 얼굴은 조금씩 풀려 갔다.

“좀 앉아요.”

셀린느의 작은 손이 그의 팔에 닿았다. 레온하르트는 목각 인형처럼 경직된 자세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윽!”

꽉 다문 입매 사이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준 우두머리급 마물에 물어뜯긴 오른쪽 다리는 퍽 오랜 시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다리, 안 괜찮죠?”

레온하르트는 여전히 침묵하며 라쉬르로 그들을 지켜 줄 방벽을 만들었다.

바로 셀린느의 항의가 돌아왔다.

“제가 태워 버리면 되는데요!”

“……너도 꼴이 말이 아니라는 걸 자각해라.”

셀린느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알았어요. 저도 잠시만 쉬죠.”

레온하르트는 다친 다리를 조심스레 폈다.

준 우두머리급 마물의 발톱들이 허벅지부터 종아리까지 한 번에 낸 상처를 제대로 본 셀린느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레온하르트. 이 상태로 끝까지 갈 생각이었어요?”

“거의 끝이다.”

레온하르트는 방벽으로 변한 라쉬르에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향을 향해 고갯짓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한 번, 진입한 적이 있다.”

“……!”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 그대로 진입이었지. 조사만을 위한.”

“그때도 혼자였어요?”

“아니.”

셀린느는 누구와 임무를 수행했는지 알고 싶었지만, 제법 부드럽게 풀어졌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레온하르트의 다리를 자세히 살폈다.

‘못 걷겠는데.’

바로 코앞이고 자시고, 레온하르트는 한 발짝도 이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구나무를 서서 이동한다면 모를까.

‘치료할 만한 게……아!’

셀린느는 여태껏 힐링 포션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사기 아이템을 잊어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녀는 주머니 속에서 붉은 액체가 찰랑거리는 유리병을 꺼냈다.

“레온하르트, 이거 마셔요.”

“……그게 뭐지?”

“그냥 마셔 봐요.”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분명 브란체가 만든 약이겠지.’

사실 힐링 포션은 브란체의 그 어느 약과도 달랐으나, 의사의 처방을 피해 다니기 바빴던 레온하르트에겐 비슷비슷한 약처럼 보였다.

“자, 어서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고 셀린느의 손에서 약병을 받아 들었다. 안 마시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

달았다.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음료수인가?”

“약인데요. 맛있어요?”

“전혀 약 같지가…….”

레온하르트의 말이 끊겼다. 도저히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른쪽 다리를 반쯤 찢어 놓았던 흉측한 상처가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역시……!’

셀린느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레온하르트는 살짝 멍한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했는데, 이런 깊은 상처도 바로 낫네요.”

“……대체, 이게 뭐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