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쿵.
황태자 집무실의 육중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셀린느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워 이마를 짚었다. 조금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레온하르트,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본인을 연금시킨 황태자와 거래를 하다니! 그것도 황후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리에서!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안색이 나빠진 걸 눈치챘지만, 완전히 헛짚은 모양인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던졌다.
“리카르도 전하 때문에 불쾌했다면 사과하지. 본디 배려심 많은 성정이 아니셔. 이해해라.”
“네? 아니에요!”
어이가 없어진 셀린느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전하 때문이 아니라, 레온하르트가 맡겠다는 임무, 엄청 위험한 거 아니에요?”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너와 만나기 전까진 혼자 해 온 일이야. 이번에도 다를 건 없다.”
“다를 게 없다니요.”
셀린느는 훨씬 위험한 임무가 아니냐고 하려다가 섬뜩한 생각에 우뚝 멈춰 섰다.
다른 임무들과 다를 게 없다면, 굳이 자신을 만나기 전까지는 혼자 수행했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설마, 혼자 갈 생각이에요? 절 내버려 두고?”
“그래.”
셀린느는 반박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말해야 해. 황태자가 눈에 띄게 좋아하는 꼬라지 못 봤냐고, 그런 곳에 어찌 혼자 가냐고, 내가 구해 준 거 잊었냐고…….’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은 셀린느의 혀끝에서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왜 레온하르트가 혼자 가려 하는지, 셀린느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죽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자신이 죽으면, 레온하르트는 하룻밤 내내 괴로워하게 된다. 당연히 함께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짐을 지울 수 없어.’
셀린느는 결국, 레온하르트가 원하는 답을 내뱉고야 말았다.
“……조심해요.”
“고맙다.”
대놓고 안도하며 조심스레 읊는 감사의 한마디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대체 뭐가 고맙단 말인가. 사지에 혼자 가게 해 주어서? 짐 덩어리처럼 들러붙지 않아서?
하지만 셀린느는 가슴을 조이는 의문 중 무엇 하나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대신, 애써 태연한 척하며 일정을 물었다.
“언제 출발해요?”
“내일 아침.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들은 그랜드 호텔로 이동했다.
지배인은 깜짝 놀란 눈치였지만 내색하지 않고 레온하르트에게 굽신거렸다.
물론, 머리색을 바꾸고 호위 시녀의 더러워진 옷을 입은 셀린느는 투명 인간 취급을 받았다.
셀린느는 이제 제법 익숙해진 모란실에 들어섰다. 당장 목욕할 생각이었다. 또 잠이 들어 익사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바로 침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셀린느, 머리.”
“아!”
셀린느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새카맣던 머리칼은 순식간에 본디의 금색으로 돌아갔다.
레온하르트가 작게 감탄했다.
“요령만 알면 쉬워요.”
빛에는 총천연색이 들어 있다. 빛 속성을 다룰 줄 알면 색깔을 바꾸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결국 색이라는 건 인간의 망막에 비친 상이니까.
칼은 그것이 마치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은밀하게 말했지만, 셀린느에게는 반가운 과학 상식일 뿐이었다.
“빛 속성을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들은 정교한 환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본 적 있다.”
“어땠어요? 정말 칼 루테의 말처럼 진짜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인가요?”
“흑마법사라, 그 작자가 만들어 내는 모든 게 진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어.”
“아…….”
“그런 표정 할 것 없다. 애초에 흑마법사가 아닌, 평범한 마법사들은 거의 만나지 않으니까.”
“저는요?”
“몇 안 되는 예외지.”
“영광인데요.”
“안다니 다행이군.”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다음 날 아침, 메이드가 트레이에 가득 싣고 온 음식들은 정찬으로 먹어도 될 수준이었다.
“아가티르수스라는 게, 대체 뭐예요?”
레온하르트는 라즈베리 잼을 가득 바른 토스트를 떨어트릴 뻔했다.
“……정말 모르나?”
“몰라요.”
당당한 셀린느의 대답에, 레온하르트의 이마가 절로 찌푸려졌다.
셀린느 헌트는 일찍 부모를 잃었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여자였다.
당연히 상식과 예법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가티르수스를 모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황도에서, 아니 제국에서 아가티르수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므로.
‘설마…….’
어쩌면 셀린느는, 저주를 받기 훨씬 전부터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셀린느의 부모는 몰락 귀족이었다. 그 저택도 저주를 받기 전까진 나름 값비싼 모양새였을 것이다.
하지만 셀린느는 포크와 나이프조차 서투르게 다를 정도로 기본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마물 서식지다. 백 년 정도 방치된.”
레온하르트는 방금 떠오른 생각을 평생 내색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설령 자신의 추측이 맞다 한들 셀린느의 부모는 이미 죽었으며 셀린느는 이제 북부 사람이다.
여태까지 그녀가 누리지 못한 것을 자신이 채워 주면 된다.
셀린느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백 년이나……!”
“정확히는 모른다. 아마 처음에는 단순히 담당 기사단의 나태 정도였겠지. 그 뒤는 감히 도전할 사람이 없었을 거고.”
“그럼, 레온하르트는요?”
레온하르트는 잠시 망설였다.
만약 팔 하나쯤 떼어 주고 그 대가로 궤멸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면 진작 그렇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티르수스는 그조차 자신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위압감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실패할지도 몰라서.”
“……!”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가 이내 딱딱하게 굳었다. 레온하르트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있다.
더 이상 그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셀린느는 간신히 식사를 마쳤다. 음식이 종잇장 씹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음식을 남기는 건 꺼려졌다.
“부탁 한 가지만…….”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질문을 마치기도 전에 칼같이 거절했다.
“안 돼.”
“아가티르수스, 밖에서 한 번만 보게 해 주세요. 들어가지는 않을게요.”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바로 찌푸려졌다.
“그 말을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나?”
“……들어가지 않아요. 저도 죽기 싫으니까.”
“거리가 멀다. 말도 못 타는데, 여기까진 어떻게 돌아오려고.”
“레온하르트를 기다릴 거예요.”
셀린느는 순간 말문이 막힌 레온하르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셀린느의 요청은 기다리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레온하르트가 실패할 경우를 위한 대비였다.
“……알았다.”
셀린느는 승리감에 살포시 미소 지었다.
“바로 준비할게요.”
잠시 후, 채비를 마친 그들은 호텔의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레온하르트의 애마, 블랙은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 기쁜지 연신 히잉거리며 울었다.
“각설탕이라도 줘야겠군.”
레온하르트는 허리춤을 뒤적거렸지만, 셀린느가 더 빨랐다. 블랙은 그녀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진 각설탕을 순식간에 집어먹었다.
“맛있니?”
블랙은 셀린느의 질문에 화답하듯 히잉, 울었다.
“그 각설탕, 아까 차와 함께 나온 게 아닌가?”
“맞아요.”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셀린느는 자신이 그녀의 부탁을 결국은 받아들이리라고 확신했던 모양이었다. 올바른 판단이었으니 할 말은 없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마구간을 빠져나와 황도의 거리를 달렸다. 잘 닦인 길과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은 금세 사라졌고, 작은 집들이 모인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곳곳에선 마물이 습격한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값비싼 뿔과 이빨만 빼어 가고 나머지는 썩어 문드러지게 방치된 마물의 시체들, 벽면에 선명히 자국이 남은 발톱 자국들…….
아직 죽은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는 마물의 사체가 뒹구는 길거리에도 사람이 사는 집이 제법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셀린느의 몸이 뻣뻣해지는 걸 느낀 레온하르트가 쓰게 뱉었다.
“이곳 직할 기사단이 있긴 하지만, 좌천지나 마찬가지라 제대로 된 자는 없다.”
“여, 여기에 사람을 살게 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군락지가 형성되기 전부터 있던 마을이다. 남은 자들은 떠날 수가 없는 자들이지.”
“…….”
어느덧 풀 한 포기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야.”
레온하르트는 회색 돌산을 가리켰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회색 돌산은 셀린느의 눈에도 친숙했다.
‘채석장……?’
레온하르트는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때 채굴량이 제법 되는 채석장이었다고 하더군.”
“그래 보여요.”
돌산은 반쯤 깎여 나가 있었다. 만약 마물의 근거지가 되지 않았다면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엔 완전히 깎여 나가 맨바닥만 남았을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절벽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반대편 절벽까지는 몇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간격이 있었다.
셀린느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다, 수십 미터는 될 듯한 깊이에 아찔해져 눈을 감았다.
“원래는 다리가 있었다고 하더군. 백 년 전 이야기라 진위는 모르겠지만.”
“어, 어떻게 가려고요?”
“라쉬르로.”
레온하르트가 라쉬르를 뽑기 위해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다음 순간, 두 절벽 사이에 얼음으로 만든 거대한 다리가 생겨났으니까.
“고맙다. 하지만 이 다리는 바로 없애도록. 마물이 타고 넘어올 수도 있으니.”
“레온하르트, 제가 길 잃은 마물 몇 마리도 혼자서 처치 못 할 것 같아요?”
“……그건 그렇지.”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셀린느가 불안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할 때마다 살짝 원망스러웠다.
“그럼, 가 보겠다. 심심하겠지만, 블랙과 함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군.”
레온하르트가 얼음 다리 위에 발을 올리려는 찰나, 셀린느의 손끝이 그의 등을 조심스레 붙들었다.
“레온하르트.”
심장이 순간 멈추는 듯했다. 레온하르트는 목이 메는 듯한 기분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같이 가겠다는 소리면, 못 들어준다.”
셀린느는 고개를 저었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레온하르트.”
“……!”
순간,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셀린느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딱딱하게 굳은 레온하르트의 등뿐이었다.
“부디, 몸만 조심하세요. 레온하르트가 몸 성히 돌아오는 것. 그게 최우선 목표예요.”
“…….”
“알다시피 저, 말 못 타잖아요. 레온하르트가 멀쩡히 돌아오지 않으면 여기서 굶어 죽을 거예요.”
“……괜한 걱정을 하는군. 그리고 블랙은 영리한 녀석이니 대충 타도 알아서 달릴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레온하르트는 앞으로 걸어갔다. 셀린느의 손끝이 주는 미약한 압력이 등에서 사라졌다.
그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순간,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질 것만 같은 위기감이 들었기에.
‘위험해…….’
레온하르트는 거칠게 뛰는 가슴을 움켜잡았다.
있어서는 안 될 감정이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