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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30화 (30/120)

30화.

“고맙군.”

레온하르트의 차분한 대답과,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셀린느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여전히 망연자실한 상태일 허페즈의 기척이 느껴졌다.

‘언제 나가지?’

셀린느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허페즈는 레온하르트에게 말을 준비해 두었다고 했다.

레온하르트가 지나치게 늦게 토피엔을 떠나면 의심받을 것이다.

“아이고, 아이고.”

하지만 허페즈는 감옥을 떠나기는커녕 소파로 추정되는 곳에 털썩 앉아서 탄식하기 시작했다.

‘어서 나가! 좀!’

셀린느는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으나 허페즈에게 들릴 리가 없었다.

들려도 큰일이지만.

“아이고, 이놈의 마물들은 쉬지도 않아!”

허페즈는 황실의 시종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깍듯했던 태도는 어디 가고, 큰 소리로 한탄했다.

“이 오리고기도…… 미첼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셀린느는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좋지 않은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설마…….’

그리고 그 설마가 일어났다. 허페즈가 오리고기를 우걱우걱 먹기 시작한 것이다.

‘먹으려면 밖에 나가서 먹지!’

셀린느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 간수만 아니면 지금쯤 자신은 이미 레온하르트와 함께 말을 타고 리브론성을 빠져나가고도 남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간수와 대치하는 짓이야말로 바보짓이었다.

레온하르트가 한바탕 연극한 이유도 바로 그녀 때문 아니었던가.

셀린느의 손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지고, 저주를 허페즈에게 퍼붓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를 때쯤, 드디어 허페즈가 밖으로 나갔다.

귀를 기울여 보니 적어도 감옥 인근엔 없는 듯했다.

“……휴.”

셀린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장롱 밖으로 나왔다.

먼지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나는 퀴퀴한 장롱 안에 있다가, 밖의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좀 살 것 같았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셀린느는 서둘러 복도로 나섰다. 이곳으로 오며 탈출할 만한 창문을 여러 개 봐 두었다.

레온하르트는 정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지만, 지금 셀린느는 더운물 찬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셀린느는 위치가 적당한 창문 중, 가장 가까운 곳에 도달했다.

그녀는 손을 한 번 휘저어 유리창을 깨고 얼음 사다리를 만들었다.

셀린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사다리를 올라갔다.

-휘잉!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는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도저히 일반적인 계단으로는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분명 중간에 주저앉아 버려 오도 가도 못 할 것 같았다.

‘이걸로 하자.’

셀린느는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사람 하나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얼음 터널이 셀린느가 있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저 밑바닥까지 생겼다.

처해 있는 상황만 아니라면 워터 파크의 워터슬라이드가 연상되는 광경이었다.

셀린느는 서둘러 터널에 걸터앉았다.

수 초 후.

“으…… 으아아……!”

셀린느는 입을 꾹 다물어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딱딱거리는 이는 그녀를 배신했다.

‘더 두껍게 만들걸!’

아니, 애초에 무서워도 계단으로 걸어 내려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셀린느는 바닥에 도달한 뒤에도 잠시간 몸을 웅크리고,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 도저히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셀린느? 다쳤나?”

“아니에요.”

셀린느는 고개를 저어 일어나려 했지만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도로 바닥에 앉혔다.

“이걸로 내려왔다고?”

믿기지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후회했어요.”

“사람은 다 실수하는 법이지. 그래도 당장 없애는 게 좋을 거야. 엄청 눈에 띄더라고.”

그제야 셀린느는 어떻게 레온하르트가 자신을 정확히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자, 얼음 터널은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말, 탈 수 있겠어?”

“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도움을 받아 조심스레 말에 올라탔다.

레온하르트는 말을 무척 조심스레 몰았지만, 셀린느는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나머지 두 눈을 꼭 감고 말에 반쯤 엎드렸다.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좀, 좀 더 쉴 걸 그랬나.’

하지만 레온하르트는 조금이라도 빨리 리브론성을 빠져나가야 하니, 쉴 시간 따윈 없을 것이다.

마침내, 괴로운 흔들림이 멈추었다.

“다 왔다.”

“벌써요……?”

셀린느는 눈을 깜박거렸다. 성을 빠져나가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터였다.

“레온하르트, 여, 여기는…….”

셀린느는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렸다.

눈앞에 우뚝 선 화려한 건물은, 태자 궁의 본관이었다.

“왜, 왜 여기로 온 거죠?”

“왜라니?”

레온하르트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당연히 리카르도 전하를 뵙기 위해서이지.”

“황, 황태자 전하를 왜……?”

셀린느는 상식을 뛰어넘는 레온하르트의 행동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연금령을 거둬 달라 청해야 하니까.”

“그렇군요.”

셀린느는 더는 이해를 포기한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쭙잖은 중세 상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행동이었지만, 레온하르트는 특수한 인물이니 예외가 적용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비슷한 경험을 이미 해 봤을 수도 있고.

‘레온하르트를 믿자. 감옥에서도 레온하르트가 말한 대로 되었잖아.’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살짝 움찔했지만, 팔을 빼지는 않았다.

“잘될 거예요.”

“잘될 거냐고 묻지 않는군.”

“전 레온하르트를 믿으니까요.”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렴풋한 미소가 그의 입에 걸렸다.

***

“리카르도,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황태자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제국의 황후인, 트리필라 운소렘에게 정중히 대답했다.

“어머니는 이곳에서 언제든 환영받으실 겁니다.”

“어머.”

황후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습격을 받았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멀쩡한 듯하니 다행이구나.”

“습격이라니…….”

황태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직속 부하들은 물론, 고용인들의 입단속까지 했더니 이상하게 왜곡된 소문이 퍼져 버린 모양이었다.

“작은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불행한 일은 다시는 없도록 해야지. 대체 대공자는 어쩌다…….”

황후는 작게 혀를 찼다.

그녀는 옛날, 어렸던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태자 궁에 기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에게 마음이 쓰였다.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짐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십니까? 이제 대공자는 다 큰 청년입니다.”

황태자는 다소 날카롭게 반응했다.

황후의 자비심과 이타심은 명성이 드높았지만, 간혹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바로 이렇게.

“대공자의 일행까지 내쫓는 건 너무한 처사이지 않았니?”

“어머니…….”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임무 때문이었다곤 하나, 감히 황족의 피를 보인 자다.

만약 범인이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아니었다면 이미 처형 일자가 나왔을 것이다.

“어디 투옥을 했습니까, 고문을 했습니까?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고 한 게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군요.”

“고용인들은 그렇다 쳐도, 그 아가씨 말이다.”

황태자는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어머니, 그 아가씨가 레온하르트의 연인이라는 건 뜬소문입니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하고 다녔는데, 그게 어떻게 뜬소문이니? 뜬소문이라는 자를 황족 모독죄로 가둬야겠구나.”

맞는 말이었기에 황태자는 반박하지 못했다. 황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말도 맞긴 하지. 연인이라 해도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낸 게 무슨 잘못이니?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가슴엔 상처로 남을 거다.”

“…….”

차마 황태자는 자신의 어머니 면전에 대고 바로 그걸 바랐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태자의 일과를 도맡는 관리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으니까.

“전하!”

황태자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려 애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대, 대공자님이…….”

황태자와 황후의 똑 닮은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황태자는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하는 관리를 재촉했다.

“대공자가 탈옥이라도 했느냐? 토피엔에서?”

“그게…… 전하를 만나 뵙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아, 별일 아니로군.”

황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바쁘니, 시간이 나면 토피엔에 들러 보겠다고 전하라.”

“그게 아닙니다! 공자님께선 집무실 바로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

황태자가 무어라 반응을 보이기 전에,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흑단나무로 만들어진 문은 천천히 열렸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를 빼 들어 감히 황태자의 손에서 피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 서 있는 여자는…….

“레이디……?”

황태자의 입에서 얼빠진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는 좀체 사람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처럼 새카만 머리칼에,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있는 여자는 바로 셀린느 헌트였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가 얼이 빠져 있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성큼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프레데릭의 아들 레온하르트가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게.”

황후가 온화하게 답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운 레온하르트를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오랜만이군. 삼 년 만인가?”

“맞습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예.”

레온하르트는 짤막하게 대답하고, 황태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전하, 황후 폐하와의 시간을 방해하여 송구합니다.”

“송구한 줄은 알면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비꼬는 말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았다.

“하지만, 반드시 드려야 하는 청이 있어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대체 그게 뭔가? 내 명을 어기고 토피엔에서 탈출하면서까지 해야 하는 청이.”

“제 연금령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

황태자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가 지나치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황후조차 황태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듯했다.

그녀는 안쓰러움과 질책이 뒤섞인 눈길로 레온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냥 드리는 청이 아닙니다. 연금령을 풀어주신다면, 아가티르수스를 파괴시키겠습니다.”

“……!”

이번엔, 순수한 놀라움만이 황태자의 얼굴에 떠올랐다.

아가티르수스.

수십여 년 황도를 괴롭혀 온 마물의 둥지.

세월이 지날수록 그 덩치가 비대해져 레온하르트마저 궤멸은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곳이었다.

“내가 아는 그 아가티르수스가 맞겠지? 어디 비슷한 이름의 조무래기를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시는 그곳이 맞습니다.”

레온하르트의 어조는 단호했다.

“만약, 제가 완전히 파괴하지 못한 채 돌아온다면 다시 연금시키십시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황태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그는 흡족한 표정으로 레온하르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돌아온다면 연금령은 물론, 식솔 추방령도 거두겠네.”

“제 일행은 모두 북부로 떠났는데, 지금 와서 거두셔도…….”

황태자는 레온하르트 옆의 여자를 향해 손짓했다.

“자네의 레이디.”

“셀린느 헌트입니다, 전하.”

더러운 옷과 어울리지 않는 맑은 목소리가 황태자의 집무실에 울렸다.

“그래, 레이디 셀린느의 추방령도 거둬 주지. 지금껏 북부로 떠나지도 않고 무얼 했는지도 묻지 않겠어.”

“전하, 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뭔가?”

황태자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아가티르수스의 파괴는 그 레온하르트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재화나 작위, 영지 정도는 충분히 내줄 수 있다.

“제가 토피엔에서 빠져나온 건 제게 속은 여러 관리들 덕분입니다. 그들을 처벌하지 말아 주십시오.”

“……!”

집무실 안에서 놀라지 않은 건 오직 셀린느 헌트뿐이었다.

황태자는 잠시 침묵했다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대답했다.

“알았네. 아가티르수스를 파괴한다면 상을 내리지. 또 할 청이 있나?”

“없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셀린느와 함께 집무실을 떠났다.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에선 승리감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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