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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9화 (29/120)

29화.

“……꿈은 아니겠지.”

레온하르트의 벌어진 입에서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말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셀린느는 눈을 흘겼다.

“세상에, 레온하르트. 아직 밤도 아니잖아요.”

“그렇군.”

레온하르트는 창살에 바싹 몸을 붙인 셀린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검은 머리에, 잔뜩 더러워진 호위 시녀의 옷차림까지.

그녀의 호위 시녀로 변장한 것까진 이해가 되었지만, 옷이 저렇게 더러워질 이유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왔길래…….”

셀린느는 단칼에 레온하르트의 말을 끊고 질문을 쏟아 냈다.

“다 실력이죠. 아니, 어쩌다 이렇게 된 거예요! 황, 황태자 전하를 해쳤다는 게 진짜예요? 진, 진짜면 중죄잖아요! 너무 걱정이…… 걱정이 되어서…….”

차마 말문을 잇지 못하는 셀린느의 목소리엔 물기가 서려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길어 봤자 일주일이야. 그 안엔 기사단만으로는 처리가 안 되는 마물 무리나 흑마법사가 나타날 테니까. 그럼 그 공으로 풀려날 수 있을 거고.”

순간, 셀린느의 말문이 턱 막혔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노역을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다.

지난 한 달.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와 함께 임무를 수행했다.

당연히 레온하르트는 강했고, 대부분의 임무는 거침없이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온하르트가 짊어진 의무의 무게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방금처럼, 레온하르트가 그런 비상식적인 의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할 때마다 셀린느는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다.

레온하르트가 할 말을 잃고 창백해진 셀린느의 안색을 걱정스레 살폈다.

“어디 안 좋나? 역시 너무 무리해서 온 게 아닌가? 좀 쉬어. 식사 때 빼곤 아무도 오지 않으니.”

셀린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마디라도 내뱉으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레온하르트는 창살 밖으로 손가락을 내밀어 셀린느의 손등을 살짝 건드렸다.

“걱정시켜서 미안하군. 보다시피, 난 아주 쌩쌩해. 오히려 네가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전, 괜찮아요.”

셀린느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그보다 레온하르트가…….”

“말했지 않나. 길어 봤자 일주일이라고.”

“완전히 풀려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뭐, 안 되면 아버지께서 수를 쓰시겠지.”

레온하르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게다가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따르다 일어난 일이니, 리카르도 전하께서도 굽힐 수밖에 없을 테고.”

“……레온하르트는 긍정적이군요.”

“처음이 아니니까. 마지막도 아니겠지.”

셀린느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황, 황족을 해치는 일이요?”

“아, 그건 처음이야.”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셀린느는 별것 아닌 말로도 자신을 즐겁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적어도 마지막이긴 하도록 노력해야겠군.”

“레온하르트 때문에 떨려서 죽을 것 같아요…….”

셀린느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자신은 이렇게 떨리는데, 이 상황을 두고 농담하는 레온하르트가 아주 조금 원망스러웠다.

레온하르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거듭 얘기하지만, 걱정 마라. 사실 나로선 네가 더 걱정된다.”

“아…….”

셀린느는 별다른 부연 설명 없이도 레온하르트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마법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아주 평범한 평민이 죄수를 만나기 위해 토피엔에 침입했다.

어쩌면 마법을 쓴 것 자체로도 불경죄가 성립할지도 모른다.

“안 들키면 되겠죠. 숨을 장소를 찾아봐야겠네요.”

셀린느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나가는 방법도 있다.”

“……?”

“네가 이리저리 숨으면서 마음 졸이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군.”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도저히 자신의 귓가에 들리는 태연한 목소리를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오면 더 곤란해지잖아요!”

“어차피 나갈 몸이야. 일찍 나가도 문제 될 건 없지.”

“그럼 애초에, 왜 이곳으로 순순히 잡혀 왔는데요?”

“리카르도 전하의 화가 풀릴 시간을 드려야 하니까.”

레온하르트는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냈다.

“반나절 정도 지났군. 이제 충분해.”

“레온하르트…….”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가는 건 뭐, 쉬워요? 대니한테서 들었어요. 토피엔의 중심부에선 마법을 못 쓴다면서요.”

“사람을 통해 나가야지.”

“……?”

레온하르트는 멍해졌다가, 반짝였다가, 어이없다는 듯 열기를 띠는 등 시시각각 변하는 커다란 눈을 즐겁게 바라보았다.

사실 자신이 지금 하려는 짓은 미친 짓일지도 몰랐다.

여태까지 레온하르트는 반항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실, 십여 년 동안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아무리 작은 반기라도 황실에 든 적이 없었다.

하지만 셀린느와 함께라면 그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금으로선 해야만 했다.

“어…… 어떻게 나가려고요? 설마, 라쉬르로?”

“라쉬르는 빼앗겼어. 애초에 토피엔 안에 없을 거야.”

“……!”

셀린느의 뺨이 분노로 상기되었다.

레온하르트는 베르누이성, 본인의 침실 안에서 잘 때를 제외하곤 라쉬르를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큰 대검을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장소에는, 작은 비수로 변환시켜 품속에 넣고 다녔다.

“어떻게 라쉬르를!”

“그 점만큼은 좀 원망스럽더군. 뭐, 이해는 한다만.”

셀린느는 바로 냉정을 되찾았다. 분노만 하기에는 지금 상황은 너무나 심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나오려고요? 힘으로 부술 수도 없잖아요.”

“문을 열어 주게 해야지.”

“무슨 소리죠 그게……?”

“좋은 방법이 있어.”

레온하르트는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셀린느를 무시한 탓이 아니었다. 단지 말로 설명하자니 조금 우스꽝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사가 올 때까지, 숨을 곳이나 찾아봐.”

“알았어요.”

셀린느는 미심쩍은 눈길로 레온하르트를 응시하다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꾀병 연기라도 하려는 걸까?’

하지만 제국 유일 마검사이자 흑마법사를 혈혈단신으로 상대하는 사내의 꾀병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레온하르트는 아플 때는 정말로 아파 보이는 타입이었다.

셀린느는 도저히 불안을 다스릴 수 없었지만, 일단은 레온하르트가 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여기, 어때요? 숨기에.”

셀린느는 먼지가 가득 쌓인 장롱을 열며 물었다.

“안 돼. 너무 더러워서 갑자기 청소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수가 있으니까. 내 간수는 상당히 성실한 사람 같더군.”

“여기는요?”

셀린느는 커다란 소파 뒤를 가리켰다.

“간수가 저기 앉으면, 안 들킬 자신 있나?”

“등잔 밑이 어둡다잖아요.”

“안 돼.”

셀린느는 계속해서 숨기 좋아 보이는 장소를 가리켰지만, 레온하르트는 모두 퇴짜 놓았다.

“아니, 어디 숨어요 그럼? 복도에라도 있을까요?”

레온하르트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몇 마디 토해 냈다.

“돌아가. 그게 제일 안전해.”

셀린느의 반응은 레온하르트의 모든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놓고 콧방귀를 뀐 것이다.

“이 얼룩들, 다 뭐라고 생각해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가 자세히 들이미는 호위 시녀의 옷을 들여다보았다.

검고 찐득한 액체는 너무나도 친숙했다.

“설마…….”

레온하르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셀린느의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피는 아니니 걱정 마요.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다행이군.”

레온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죽을 뻔하긴 했다고요. 그런 곳으로 되돌려 보낼 생각이에요?”

“……알았다.”

셀린느의 즐거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숨기엔 어디가 제일 나아요?”

“……저 장롱.”

“제가 제일 처음 말한 곳이잖아요!”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집요한 시선을 피했다.

“다 형편없는데, 그나마 저게 나아.”

“아무렴, 그러시겠죠.”

셀린느는 실험을 해 봐야겠다며 장롱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에 잠시 콜록이긴 했지만, 딱히 불편한 점은 없는 모양이었다.

“별로 중요해 보이는 물건도 없네요. 기대했는데.”

“중요한 게 있다면 큰일이지. 그걸 찾으러 열 수도 있으니까.”

“그럼 다행이네요. 청소 도구밖에 없거든요.”

그들은 저녁 식사를 든 간수가 올 때까지 예행연습을 했다.

첫 번째, 간수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셀린느는 장롱 안으로 숨는다.

두 번째, 레온하르트가 감옥에서 빠져나온다.

세 번째, 레온하르트와 간수가 완전히 떠난 후, 셀린느가 장롱에서 빠져나온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별로 어려울 게 없었다. 셀린느가 생각하기엔 두 번째가 정말 큰 문제였다.

“이제 말해 줘요. 대체 무슨 말을 해서 빠져나오려는 거예요?”

레온하르트는 물러설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듯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다. 그냥, 내 유일한 쓸모가 쓰일 때가 왔다는 걸 납득시키면 나갈 수 있겠지.”

“…….”

레온하르트는 셀린느의 침묵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황도 인근에 마물이 나타났으니 당장 퇴치하러 가야 한다고 말하면 된다.”

“아니, 그게 통하겠냐고요!”

셀린느의 언성이 높아졌다.

이곳에 계속 갇혀 있었던 레온하르트가 뭔 수로 마물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인가?

“통해.”

셀린느는 움찔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믿어도 되나요?”

“그래.”

셀린느는 더는 묻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레온하르트의 계획이 실패하면, 자신은 원래 계획대로 레온하르트가 풀려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면 된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

레온하르트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셀린느는 서둘러 캐비닛 안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작은 빛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셀린느는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소리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공자님, 식사입니다. 리브론에 머무를 때 즐겨 드셨다는 백포도주로 조린 오리가 메인입니다.”

간수가 아닌, 시종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깍듯이 예의를 차린 목소리였다.

레온하르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이 허페즈라고 했나?”

“예? 예!”

“허페즈, 지금 오리 따위나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마물이 황도 외곽에 나타났어.”

“예……?”

셀린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분명 그녀는 의심스러워하거나 어안이 벙벙해하는 반응을 예상했다.

하지만 허페즈는 망연자실한 목소리였다.

“공, 공자님…… 정말입니까……?”

“그래.”

“빨, 빨리 보고하고 돌아오겠습니다!”

허페즈가 허겁지겁 방을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있어. 생각보다 금방 돌아올 테니.”

레온하르트가 나직이 경고했다.

그 말대로, 허페즈는 도저히 상관에게 보고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리 돌아왔다.

“공자님, 서두르십시오.”

허페즈가 레온하르트를 재촉하기까지 하며 감옥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라쉬르는?”

“여기 있습니다. 대문 바로 앞에 말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셀린느는 놀라움에 겨운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입을 꽉 악물었다.

이 모든 일이 레온하르트의 거짓말 한마디에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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