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진정하자.’
셀린느는 가슴에 손을 얹어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곳은 스테이지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클리어한.
‘차라리 잘됐어.’
그렇게 찾으려 애썼던 다른 스테이지에 저절로 들어오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찜찜한 의문이 솟아났다.
‘왜 여기지?’
고문실은 세 번째 스테이지였다.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으니, 레온하르트의 임무가 끝나면 두 번째 스테이지인 마물의 숲을 찾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세 번째 스테이지가 나타날 줄이야.
‘마치 누군가가 수라도 쓴 것처럼…….’
셀린느는 잠깐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레온하르트가 연금된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녀가 토비엔으로의 잠입을 시도할 것이며, 시도한다 해도 하필 이 창문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걸 누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일단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 해.’
셀린느는 푸른 빛을 받아 서슬 퍼런 날들을 내보이는 고문 도구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고문실은 [셀린느의 악몽]의 스테이지 중 쫓아오는 악역이나 마물이 없는 유일한 스테이지였다.
그 대신…….
-따닥!
‘역시.’
아이언 메이든이 그녀를 향해 피투성이 속을 활짝 내보인 채 다가왔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고문실엔 주인공을 살해하기 위해 쫓아오는 악역이나 마물은 없다.
그 대신, 맹수처럼 움직이는 고문 기구들이 있었다.
-쿵!
얼음 방벽이 그녀와 아이언 메이든 사이에 우뚝 솟아났다. 셀린느는 천천히 걸어 방벽을 돌아갔다.
아이언 메이든은 앞만 보고 돌질하는 소처럼 계속해서 얼음 방벽의 중심부에 부딪쳤다.
이 스테이지는 빨리 달린다고 클리어할 수 있는 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천천히 이동하며 고문 기구들을 차분히 하나하나 처리해야 했다.
마법이 있으니 좀 더 간편하긴 하겠지만, 만에 하나 실패한다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섬뜩해 몸이 부르르 떨렸다.
마침내 셀린느가 아이언 메이든에게서 벗어났을 때, 거대한 바퀴가 그녀를 향해 일직선으로 굴러왔다.
‘……!’
재빨리 바퀴의 궤적을 피했지만 바퀴는 비틀거리며 그녀를 쫓았다.
셀린느는 주위를 재빠르게 둘러보았다. 바닥에 시커먼 쇠봉이 너부러져 있었다.
-끼익!
셀린느는 바퀴가 자신을 깔아뭉개려는 찰나, 쇠봉을 바큇살에 정확히 끼워 넣었다.
-끼이이익!
바퀴는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휴.’
셀린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시도 때도 없이 덮쳐오는 고문 기구를 대여섯 개쯤 지났을 때, 아무런 고문 기구도 보이지 않은 텅 빈 공간이 드러났다.
셀린느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었다.
‘……올 게 왔네.’
고문실의 가장 끔찍한 데드 플래그가 코앞이었다.
청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너무 높아 제대로 보이지 않은 천장엔 ‘죽음의 틀’이 빼곡히 매달려 있을 것이다.
만약 셀린느가 무턱대고 발을 들인다면, 그녀의 몸 크기보다 아주 약간 작은 틀이 떨어지리라.
‘그리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죽겠지.’
셀린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구간을 지나가는 방법은 안다. 하지만…….
‘할 수 있을까.’
셀린느는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 꼭 쥐었다. 분명 레온하르트에 대한 ‘예언’을 들으며 맹세했다.
자신은 계속해서 죽고, 레온하르트는 흑화하는 미래를 바꿔 보이겠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건 쉽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셀린느는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반쯤 말라붙어 찐득찐득한 피가 느껴졌다.
‘천천히, 천천히.’
그녀는 달팽이를 상상하며 천천히 기어갔다.
이 구간에선 성질 급한 유저들이 신경질을 내며 게임을 꺼 버릴 정도로 천천히 움직여야 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전신의 맥박이 펄떡이며 뛰었다.
‘죽음의 틀’은 주인공의 시체가 백골이 될 때까지 열리지 않는다는 설정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말자.’
셀린느는 눈을 꾹 감았다. 시커멓고 찐득대는 바닥은 보지 않는 게 마음이 편했다.
‘차가워!’
갑자기, 손가락 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벽면에 닿았다. 셀린느는 부들거리는 팔을 들어 벽면을 쓱 훑었다.
‘글자…….’
드디어, 끝이었다.
셀린느는 얼마 남지 않은 정신력을 쥐어짜 일어섰다. 대니의 옷에 잔뜩 붙은 반쯤 마른 핏덩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한 감정도 잠시,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눈앞의 벽면에 각인된 고풍스러운 글씨는 그녀의 기억과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늘을 찢는 자, 별이 되리라.]
‘이게 아니었어!’
세 번째 스테이지의 끄트머리에 도달하면 읽을 수 있는 글귀의 내용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내용과 전혀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지…….’
게임의 클리어와는 별 상관이 없는, 오직 게임의 공포스러움을 조장하기 위한 글귀였다.
셀린느는 새로운 글귀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했지만 별다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적어도 게임과 또 달라졌으니, 좋게 생각해야지.’
지금으로선 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게 최우선 목표이다.
셀린느는 벽면을 있는 힘껏 밀었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뭐야!”
당황한 셀린느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가 고문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뭐야! 뭐야! 뭐야!”
“……!”
셀린느는 두 손으로 입을 꾹 막았다.
메아리보다도 놀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칠 뻔했다는 사실이 더욱 두려웠다.
셀린느는 휘청이는 몸을 추스른 다음 찬찬히 벽면을 살폈다.
글귀가 기억과 달라진 건 스테이지의 마지막 해법도 달라졌다는 힌트일지도 모른다.
‘이건가?’
자신의 머리보다 조금 높은 곳에, 웬 구멍이 보였다. 셀린느는 손을 뻗어 구멍을 만져 보았다.
‘열쇠 구멍?’
만져지는 느낌은 분명 열쇠 구멍이었지만, 세 번째 스테이지에 열쇠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셀린느의 악몽] 그 어떤 스테이지에서도 열쇠나 열쇠 구멍을 본 기억이 없었다.
열쇠 역할은 펜던트나, 주화, 인형의 머리 등이 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셀린느는 다시금 품속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났던 열쇠는 셀린느가 만들어 낸 빛을 받아 더욱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셀린느는 잠시 망설이다, 열쇠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겠지만 해 보기 전까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달깍.
열쇠가 정확하게 돌아가는 동시에 셀린느의 얼굴이 희망으로 환하게 밝아졌다.
벽면은 열쇠가 완전히 돌아가자 게임에서처럼 양옆으로 저절로 밀렸다.
셀린느는 자신 앞에 펼쳐진 회랑에 발을 디뎠다.
이제는 빛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었다. 회랑 양옆의 드넓은 유리창에서 새하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음악……?’
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친숙한 음악이 들려왔다.
잔잔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하프시코드 연주곡이었다.
‘설마!’
셀린느는 제자리에 가만히 멈춰 선 채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들어도 분명 ‘그’ 음악이었다.
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들을 수 있는, [셀린느의 악몽]의 주제곡.
경외감, 공포, 위압감, 희망……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에 셀린느는 전율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에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졌다. 셀린느는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몇 걸음 걸어갔다.
-툭.
작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셀린느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장식 하나 없는 작은 나무 상자였다.
‘이, 이거였어.’
매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얻을 수 있는 보상은, 대부분 이 나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셀린느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긴장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명백한 사실 때문이었다.
‘저택에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게 아니었어…….’
이곳에서도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면 게임과 마찬가지로 주제곡이 들리고, 클리어 보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저택에선 두 가지 모두 없었다.
‘난, 지금 첫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거야.’
스포일러는 잘 피해 다녔던 셀린느지만, 제작진이 인터뷰로 얘기한 진엔딩의 길이만큼은 알고 있었다.
진엔딩은 첫 번째 스테이지부터 분기가 나뉜다.
하지만 같은 스테이지들을 되풀이하면 지겹기 때문에, 일부러 여러 스테이지를 통합해 플레이타임을 대폭 줄였다고 했다.
모든 정보는 단 한 가지 사실을 가리켰다.
셀린느가 걷는 길은, 진엔딩으로 향하고 있다.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이 게임이 이끄는 대로만 따라가면, 그녀는 게임 속 레온하르트가 왜 흑화했는지, 왜 주인공을 미친 듯이 죽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바꾸겠어. 오 년이 지나기 전에.’
셀린느는 단호한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붉은 액체가 가득 들어 있는 작은 유리병 다섯 개와,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수정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붉은 액체가 든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힐링 포션이었다.
‘레온하르트에게도 큰 도움이 되겠지.’
레온하르트가 마물에 다칠 때마다 안쓰러워, 왜 힐링 포션을 가지고 다니지 않냐고 물었지만 그게 뭐냐는 대답만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건…….’
셀린느는 수정구를 살짝 쓰다듬었다.
게임 속 아이템으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충분히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퀘스트 창을 열면, 수정구 그림을 배경으로 글씨가 나타났으니까.
셀린느는 수정구를 집어 들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
그녀의 모습만이 비칠 뿐,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뭐지?’
셀린느는 상당한 시간 동안 수정구를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투명한 구는 아무런 정보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이 자리에서 정보를 알아내는 걸 포기한 셀린느는 구와 포션들을 모두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스테이지도 클리어했고, 클리어 보상도 얻었다. 이제 레온하르트를 찾아야 할 차례였다.
셀린느는 몸을 꼿꼿이 폈다. 이제 떨리지도, 불안하지도, 경외감에 압도되지도 않았다.
회랑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엔 확신이 넘쳤다.
***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공자는 토피엔에 무기한 연금하며, 그의 식솔들은 모두 황도 밖으로 추방될 것이다.”
참 우스운 사실이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았음을 깨닫자마자, 머릿속은 알게 된 지 겨우 몇 달 지난 여자에 대한 걱정으로 지배당했다니.
레온하르트는 자신에 대한 조소를 흘리면서도 셀린느에 대한 걱정을 잠시도 떨쳐 낼 수 없었다.
‘셀린느.’
레온하르트는 마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호위 시녀가 함께 있을 테니 괜찮으리라고 자신을 안심시켜 보아도 두근대는 가슴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진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유일한 출입구 앞으로 달려갔다.
토피엔의 시설은 그랜드 호텔 수준이었으나, 쇠창살로 이루어진 출입구만큼은 여타 감옥과 다를 게 없었다.
‘라쉬르를 숨길 시간만 있었더라면……!’
레온하르트는 명이 떨어지자마자 라쉬르를 비수로 변환시켰으나, 품에 감추기 전에 제국에서 그다음 가는 검사가 라쉬르를 빼앗았다.
라쉬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비틀거리는 꼴이 퍽 우스웠지만, 레온하르트는 웃지 못했다.
라쉬르, 아니 검 없는 자신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마검사는 항시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와는 다르다. 항상 검을 매개로 하여야만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위력 자체는 일반 마법사보다 훨씬 강력하지만, 지금 당장 아무 힘을 쓸 수 없으면 그게 다 무슨 상관인가.
‘하기야, 마법사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순 없겠지.’
그가 감금당한 토피엔의 감옥은 백여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오직 마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자세한 비법은 시공한 장인들의 대를 이어 전해져 내려왔으며, 그들은 목이 잘려 나가는 한이 있어도 후계자 외엔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부디 안전하길.’
마법에 대한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히 생각이 셀린느로 옮겨졌다.
문득 마법을 쓸 때 발그레 상기되는 셀린느의 뺨이 떠올라 레온하르트는 미소 지었다.
‘내 걱정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정작 레온하르트는 자신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황족을 해하려 든 죄는 크나 마물이 나타나면 풀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건 결국 제국의 지배자인 황제의 명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황태자가 자신을 가둔 건 분풀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셀린느는 하루아침에 북부로 쫓겨나게 된 그녀 자신이나 걱정하는 게…….
“레온하르트!”
레온하르트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한 여인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였지만 열정으로 가득 찬 청회색 눈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달아오른 뺨은…… 분명, 셀린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