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대공자!”
레온하르트의 목적을 직감한 황태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레온하르트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황족에 손을 대는 건 평소처럼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마음은 알겠지만, 혈기가 지나치네.”
“……파블 경은.”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라쉬르를 굳건히 붙잡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했습니다.”
“그래, 나도 보고를 받았네.”
“왜, 누가 그를 조종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파블 경은 가만히 라쉬르의 시험을 받았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되레 폭주해 제게…… 살해당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잠시 숨을 골랐다. 긴장을 많이 해서인지,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마치 그가…… 죽어야만 했던 것처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대공자.”
“제가 오기 전까지, 흑마법의 징표를 파헤치던 사람은 파블 경 아니었습니까? 전하의 사람 중 해당 조사를 맡을 만한 다른 인재는 없잖습니까.”
“…….”
레온하르트는 그의 침묵이 곧 긍정임을 알 정도로 황태자와 한때 가까이 지냈다.
“파블 경께선 조사하다 알아선 안 될 것을 눈치채신 겁니다.”
“하지만 입막음치곤 지나치게 요란하지 않습니까? 그냥 죽여 버리면 되는데.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파블 경이 제 손에 죽어야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을…….”
“그래서, 내가 범인이라는 건가?”
레온하르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제가 만약 전하께서 흑마법사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미 황족 살해범으로 자수하고 있을 겁니다.”
“거 참 위안이 되는군.”
황태자는 코웃음 쳤다.
해야 할 설명은 끝났다고 판단한 레온하르트는 묵묵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불경이네, 레온하르트.”
“압니다.”
레온하르트는 라쉬르에 못지않게 서슬 퍼런 기세였다.
“하지만, 확인해야겠습니다.”
“확인이라니!”
황태자는 벨을 울려 시종을 들이려 했다.
-파직!
레온하르트는 벨을 책상 채로 베어 내 바닥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대공자, 북부는 그대의 안하무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황태자의 말과 동시에, 섬광이 번뜩였다.
‘……!’
레온하르트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황태자의 손등 위에 맺힌 핏방울은, 붉은색이었다.
***
레온하르트 베르누이가 연금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셀린느는 루에게 마력석을 먹이고 있었다.
“뭐라고요?”
셀린느는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파란 마력석을 먹어 라쉬르처럼 푸른빛을 띠는 루가 셀린느의 소매 안으로 기어갔다.
관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다시금 설명했다.
“레온하르트 베르누이 공자는 황태자 전하를 공격하여, 토피엔에 연금되었습니다.”
“공자께서 그러실 리가!”
즉각 분개하는 대니와 달리, 새하얗게 질린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관리는 담담히 통보했다.
“트리앙은 전하께서 하사하신 곳. 즉각 떠나셔야 합니다. 전하께선 너그럽게도 일행에게까지 죄를 묻지는 아니하겠다고 하셨습니다.”
“…….”
관리는 셀린느의 침묵이 곧 동의라고 생각한 듯, 큰 은혜라도 베푸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통보했다.
“걸어서는 무리일 테니 마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단, 태자 궁 입구까지만 모셔 드릴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셀린느의 입에서 무미건조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대니는 무어라 항의하려다,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둘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셀린느는 이곳에 머문 짧은 기간 사랑하게 된 작은 집을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부엌 한편엔 레온하르트 말곤 먹는 사람이 없어 전시품으로 전락한 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실의 화병엔 레온하르트가 황족이 직접 가꾼다는 온실에서 꺾어 온 꽃들이 한 아름 꽂혀 자태를 뽐냈다.
대니가 그녀를 재촉했다.
“루테, 얼른 나가죠. 성 외곽에 머무는 분들이랑 빨리 합류해야…….”
관리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곽에 머물던 고용인들은 이미 황도 밖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번만큼은 셀린느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 관련이 없을 텐데요.”
북부에서 데려온 고용인들은 태자 궁은커녕 리브론성에 발 한 번 들인 적이 없었다.
애초, 첫날 호텔에 도착한 이후로 셀린느는 그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리브론성 외곽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방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죄인을 주인으로 모셨으니, 당연한 처분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루테께 엄청난 호의를 베푸셨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
셀린느는 싸우지 않았다.
황태자의 대리인 노릇을 하는 관리를 자극해서 지금 그녀에게 도움이 될 건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순순히 마차에 올라탔다.
셀린느는 마차가 덜컹거리기 시작하자마자 대니에게 속삭였다.
“대니, 토피엔이 뭐죠? 태자 궁의 지하 감옥인가요?”
“고위 귀족들을 연금하는 곳이니 일반적인 감옥은 아니죠. 태자 궁이 아니라, 리브론성 중앙 구역에 있어요.”
대니는 당연한 상식을 모르는 셀린느에 놀라지 않고 성실하게 대답했다.
“정확히 어디 있는지 알아요?”
“루테, 설마…….”
셀린느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어디 있는지 알죠?”
대니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어 속삭임과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마차 안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태자 궁 안에서 마차를 몬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마부가 눈치채기엔 작은 소리였다.
마침내 마차는 태자 궁 입구에 도달했다.
“도착했습니다.”
마부는 북부에서 왔다는 여자 마법사를 내려주기 위해 문으로 다가갔다.
화려한 금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마법사는 마부의 별다른 도움 없이도 우아하게 바닥에 발을 디뎠다.
“고맙네.”
“……?”
마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마법사는 마차에 오를 땐 자신에게 존칭을 썼다.
‘시녀에게 잔소리라도 들었나.’
하지만 그가 오늘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기 때문에, 의문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대니는 마차가 완전히 떠나간 다음에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풀었다.
“성공한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대니.”
“혼자서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셀린느는 자신의 옷을 걸치고, 마법으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대니를 바라보았다.
“대니가 해야 할 일은 북부로 떠나는 거예요. 셀린느 헌트로서.”
“……알겠습니다.”
검게 머리를 물들이고 호위 시녀의 옷을 입은 셀린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 안에서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며 길길이 날뛰는 대니를 진정시키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다행히 대니는 결국엔 그녀의 고집에 따라 주었다. 레온하르트에겐 자신이 필요하다는 셀린느의 말을, 결코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둘은 마차가 달리는 동안 빠르게 옷을 바꾸어 입었고, 셀린느는 마법으로 대니와 자신의 머리색을 바꾸었다.
북부에서 데려온 고용인들은 모두 떠났으니, 황도에서 그들의 얼굴을 아는 자는 몇 없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약속할게요.”
셀린느는 진심으로 대답했다.
잠시 후.
대니의 모습이 셀린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셀린느는 빠른 속도로 리브론성의 중앙 구역을 향해 걸었다. 밤이 되기 전, 레온하르트를 찾아야만 했다.
“허어억…….”
셀린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중앙 구역에 도달했지만, 대니의 말처럼 귀족들 전용 감옥으로 쓰일 만한 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물어봐야겠어.’
때마침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종이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지나갔다.
셀린느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토피엔이 어디죠?”
“토피엔? 그건 왜 묻지?”
시종은 즉각 셀린느를 경계했다. 주인도 없이 홀로 있는 호위 시녀가 이상한 질문을 해 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셀린느는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모시는 아가씨께서 꼭 거기 있는 분을 뵈어야 한다고 저를 따돌리고 가 버리셔서…….”
시종은 더욱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느 가문의 아가씨이길래, 토피엔에 연금된 분을 뵙겠다고…….”
“셀린느 루테십니다.”
셀린느는 혹시나 시종이 자신을 모를까 싶어 조금 걱정했지만, 즉각 경악하는 얼굴을 보고 살짝 안도했다.
“북부의 그 마법사 말이오?”
셀린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의 얼굴은 순간 붉어졌다가, 파랗게 질려 갔다.
“태자 전하께서 아시면……!”
“그 전에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어서 토피엔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세요. 마법사지만, 몸이 약하니 많이 가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셀린느는 많이 이동하지 못했고, 몸 역시 툭 하면 죽을 정도로 약해 빠진 건 사실이었으니까.
시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 태산 같은데 그 멍청한 아가씨까지 찾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셀린느는 시종을 따라가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나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 길을 잘 익혀 두어야 했다.
다행히 저주받은 저택과 미로 같은 베르누이성 덕에 그녀의 방향 감각은 완벽히 숙달된 상태였다.
시종이 무심코 말을 흘렸다.
“대공자가 어찌 그런 일이…… 댁네 아가씨도 걱정을 많이 했겠소.”
“정확히 무슨 일인가요?”
“일개 시녀가 알 일은 아니지.”
시종은 내뱉듯이 대답했다. 황실의 시종인 만큼,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토피엔이 모습을 드러냈다.
셀린느는 시종이 설명하기도 전에 ‘그것’이 토피엔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에서, 유일하게 섬뜩한 곳이었으니까.
회색 벽돌로 쌓아 올린 벽면은 성의 다른 장소들과 연배가 몇백 년은 차이가 나 보였다.
‘정말 귀족들만 가둬 놓는 곳이 맞나?’
셀린느는 얼굴을 찌푸렸다.
토피엔의 규모는 황도의 모든 범죄자…… 까지는 아니라도 상당수의 범죄자를 수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댁네 아가씨는 대체 어디 있는 거요?”
시종이 짜증을 왈칵 쏟아 냈다.
“죄송합니다. 많이 바쁘실 텐데……. 아가씨는 제가 천천히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야지. 난 할 만큼 했으니, 이만 가 보겠소. 찾으면 바로 나가는 거, 잊지 말고.”
셀린느는 시종이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달려가자마자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녀는 토피엔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병사 한 명 보이지 않았지만 정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다.
‘굳이 문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셀린느는 토피엔의 벽면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저기다!’
거대한 나무가 벽면을 따라 자라 있었다. 셀린느는 살짝 심호흡했다.
그녀의 눈길에 따라 얼음 계단이 순식간에 땅바닥에서 성벽 꼭대기까지 자라났다.
셀린느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얼음에 미끄러져 죽는 데드 엔딩이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리창 하나 없이 뻥 뚫린 창문이 나타났다.
그녀는 창문 안으로 머리를 살짝 들이밀었다.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야 얼마든지 밝힐 수 있으니까.’
셀린느는 망설임 없이 창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아야야…….”
창문과 바닥의 거리는 별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바닥에 웬 자갈이 깔려 있어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아팠다.
‘불부터 밝히자.’
순식간에 사방이 밝아졌다.
“헉……!”
셀린느는 경악과 공포감에 질려 숨을 들이켰다.
앉는 사람을 바로 죽여 버릴 듯 못이 가득 박힌 의자 여럿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의자 바로 뒤편엔 아이언 메이든이 섬뜩한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셀린느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자갈이라고 생각했던 알갱이들은 뿌리째 뽑혀 나간 사람의 치아였다.
이곳은…… 거대한 고문실이었다.
그녀가 무척이나 잘 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