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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6화 (26/120)

26화

“알고 있다.”

레온하르트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어느새 연회장 안에서 사라져 버린 측근은, 바로 황태자 직속 기사단의 단장, 파블 데하카였으니까.

“파블 경은 어디 있습니까?”

레온하르트는 간신히 고통에서 벗어난 측근들에게 정중히 물었다.

그들은 모두 결백이 입증되었고, 주군을 위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을 겪었다.

존경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아, 아까 분명 내 근처에 있었는데…….”

비에라 백작 부인이 불안한 얼굴로 대답했다.

모두의 시선이 절로 유일한 출구로 모였다. 거대한 빙벽이 문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셀린느가 입을 열었다.

“들어왔을 때부터 만들어 뒀어요. 아무도 저기로는 못 나갔을 거예요.”

“그럼, 아직 이 안에 있겠군.”

-쿵!

모두가 움찔했다.

레온하르트가 라쉬르를 대리석 바닥에 냅다 박았기 때문이었다.

“대공자!”

“레온하르트, 이러는 게 어디 있느냐!”

레온하르트는 잡음은 무시하고 눈을 감은 채 라쉬르에만 집중했다.

“……찾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한 지점을 향해 걸었다.

레온하르트의 경로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길을 비켜 주었다.

“파블 경.”

사방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분명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 기사단장 파블 데하카가 나타나 핏발 선 눈으로 레온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이었다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레온하르트 공자.”

기사단장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머리가 아파 와 기둥 뒤에 잠깐 기대어 있었을 뿐입니다.”

“……파블 경, 왼손을 내밀어 주십시오.”

기사단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라쉬르는 레온하르트의 허리춤에서 뽑혀 나가 포물선을 그렸다.

***

“당신이었다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기사단장을 제외한 다른 측근들을 문으로 대피시켰다.

-쾅!

청회색 눈이 크게 열렸다.

굉음과 동시에 빙벽은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고, 빙벽이 있던 자리엔 몸통이 대문만 한 거대한 나무가 솟아 있었다.

말라죽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가.

전신에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마물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사악한 힘.

이것이 흑마법이다.

셀린느의 손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태워 버려야겠어.’

불꽃이 나무 전체를 집어삼켰다.

‘……뭐지?’

나무의 사악한 기운이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셀린느는 황급히 마법을 거두었다. 나무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니, 더욱 거대해졌다.

어느새 뿌리는 셀린느와 측근들의 다리를 휘어잡을 기세로 뻗어 와 있었다.

“이, 이게 뭔가!”

“꺄아아악!”

뿌리는 순식간에 셀린느와 측근들을 휘감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몸 전체를 조여 오는 압박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셀린느는 눈을 감고 차분히 생각하려 노력했다. 자신은 여태까지 마법을 두 번 시도했다.

‘불은 안 통해. 얼음도 마찬가지고. 그러면…….’

다음 순간, 바람이 연회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셀린느는 뿌리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요동치는 걸 느꼈다.

-파직!

셀린느를 감싼 뿌리에 수십 개의 얼음 칼날이 박혔다. 뿌리를 끊지는 못했지만, 순간적으로 느슨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힘이었다.

-쿵!

셀린느는 딱딱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 우리도!”

측근 한 명이 몸부림치며 고함쳤다. 셀린느는 잠시 고민했다. 얼음 칼날은 사람 목도 순식간에 베어 낼 정도로 예리했다.

자칫하다간 뿌리 대신 멀쩡한 측근의 목숨을 끊어 버릴 수도 있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셀린느는 굳이 그들에게 기약 없이 뿌리에 감겨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패닉시킬 필요는 없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기사단장과 대치하고 있을 레온하르트를 찾았다. 그를 도와서 최대한 빨리 기사단장을 끝장낼 생각이었다.

“……!”

레온하르트가, 기사단장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와 측근들을 향해 막힘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흉측한 뿌리들이 레온하르트를 막기 위해 바닥에서 끝도 없이 올라왔다. 하지만 올라오는 족족 라쉬르 앞에 말라비틀어진 단면을 내보이며 속절없이 베였다.

뿌리를 도륙하는 레온하르트는 감정 하나 보이지 않는 차가운 얼굴이었다.

마침내 측근들에 도달한 레온하르트의 손에서 라쉬르가 번쩍였다.

“으아악!”

몽고메리 후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무사한 모양이었다.

-쿵!

라쉬르가 섬광처럼 번뜩일 때마다 뿌리에 붙잡힌 측근들이 한 명씩 풀려났다.

그들에게 라쉬르는 구원의 섬광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측근들은 모두 바닥에 안착했다. 하지만 뿌리는 다시금 그들을 향해 슬금슬금 뻗어 오고 있었다.

셀린느는 대문을 막아선 거대한 기둥을 가리켰다.

“저거, 파괴할 수 있나요?”

다음 순간.

라쉬르는 셀린느만 한 대검으로 변했다. 레온하르트는 깃털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대한 대검을 휘둘렀다.

-우지끈!

대문을 가로막은 나무는 높이가 한 뼘도 안 되는 그루터기만을 남기고 쓰러졌다.

레온하르트는 발로 대문을 차 활짝 열었다.

“전부 탈출하십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측근들은 연회장 밖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셀린느, 너도!”

“같이 있겠어요.”

레온하르트는 뒤돌아서며 대답했다.

“저자에게 네 마법은 안 통했잖나. 같이 탈출하도록.”

“왜 마법이 안 통할까요? 마법사도 흑마법사와 맞서 싸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말을 가뿐히 무시하고 그의 곁에 따라붙으면서 물었다. 레온하르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 모르겠군. 흑마법사도 특성이 다 다르니, 상성의 문제일지도…… 아니, 나가라니까!”

바로 그때, 거대한 나무가 불쑥 자라나 그들을 갈라놓았다.

“셀린느!”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이름을 부르짖지도,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았다.

‘뿌리 자체에 대한 공격을 할 순 없어.’

하지만 바람은 뿌리를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셀린느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는 칼 루테의 가르침을 기억했다.

‘셀린느 루테, 강렬한 빛은 어둠이나 다름없습니다.’

순간, 연회장 전체가 푸르게 번쩍였다. 셀린느는 숨을 들이켰다. 눈이 아릴 정도의 빛이 사방에 산란했다.

만들어 낸 그녀 본인도 버티기 버거울 정도니, 레온하르트와 기사단장은 눈을 뜨고 있는 게 고통일 것이다.

“비겁한 수를!”

기사단장의 격앙된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렸다. 셀린느는 의아함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으로 어둠을 만들어 내면 될 텐데, 왜 저러지?’

그녀는 예상되는 흑마법사의 어둠에 대항해 빛의 강도를 더욱더 높였지만, 아무런 어둠도 느껴지지 않았다.

셀린느는 산란하는 빛 속에서 기사단장을 찾아냈다.

그는 빛이 자신의 피부에 닿는 것조차 참을 수 없다는 듯 전신을 뿌리로 칭칭 감은 상태였다.

“레온하르트.”

“안다.”

놀랍게도, 레온하르트는 전혀 눈이 부시지 않은 듯 두 눈을 또렷하게 뜨고 있었다.

그는 기사단장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뿌리들은 더는 자라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발걸음에 상처를 입는 듯 움찔거렸다.

레온하르트는 뿌리로 몸을 꽁꽁 감싼 기사단장을 역겹다는 듯 쳐다보았다.

“파블 데하카, 무고한 자들을 인질로 잡을 정도로 타락할 줄이야.”

“제 사람들을 악귀 앞에 내던진 황태자만 할까?”

기사단장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연회장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퍼졌다.

셀린느의 눈이 크게 떠졌다. 레온하르트는 악귀라는 소리를 듣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도 않나. 널 그 위치에 올려 보낸 게 리카르도 전하거늘.”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애송이.”

“조심해요!”

레온하르트는 아주 잠시 움찔했다가, 펄쩍 뛰어 갑작스레 생긴 땅의 균열을 피했다. 쩍 갈라진 균열은 레온하르트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컸다.

기사단장은 마지막 남은 힘을 썼는지 바닥에 반쯤 엎드려 헐떡이고 있었다.

셀린느는 더욱 강렬한 빛으로 연회장을 채웠다. 기사단장이 또 무슨 수를 쓰지 않을지 두려웠다.

“한때의 친분이 있으니 유언은 유족들에게 전해 주지.”

기사단장이 길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레온하르트는 마지막 호의를 걷어차 버린 기사단장을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라쉬르를 들어 올렸다.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붉은 피가 레온하르트의 전신에 튀었다.

검은 피가 아닌, 붉은 피가.

“……!”

레온하르트의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기사단장 파블 데하카의 두 동강 난 몸에선 선명한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그간 수도 없이 흑마법사를 베어 왔다.

그들은 검은 피를 쏟아 냈으며 목숨이 꺼지자마자 백골만이 남았다.

황태자의 명실상부한 오른팔로서 그 위상이 드높았고, 레온하르트에게 몇 번 도움을 주기도 했던 이 남자는…….

“레온하르트, 왜 그래요?”

셀린느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팔을 조심스레 잡아 오는 셀린느를 본능적으로 밀쳐 냈다.

“레온하르트……?”

“파블 데하카… 파블 경은 흑마법사가 아니다.”

“……!”

셀린느의 눈이 경악에 질렸다.

그제야 흑마법사라면 이렇게 피가 붉을 리가 없다는 깨달음이 그녀를 강타했다. 마법으로 눈속임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상대는 레온하르트다.

‘어둠을 만들어 내지 못했던 것도…….’

일반적인 흑마법사라면 그녀의 빛에 맞서 능히 어둠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파블 경은 더 많은 뿌리를 만들어 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럼, 포섭된 자인가요……?”

“조종당했겠지. 포섭된 자라면, 다른 측근들처럼 라쉬르의 시험을 순순히 받아 붉은 피를 내보였을 테니.”

셀린느는 비틀거렸다. 레온하르트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블 경은 희생자였어.”

“…….”

“부인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자였다. 유언조차 남기지 않았을 땐 이유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셀린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사람이 이용당한 걸 몰랐으니, 레온하르트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셀린느의 목숨과 달리, 다른 사람들의 목숨은 몰랐으니 괜찮다고 가벼이 넘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대체 누가 왜…… 왜 이런 짓을.”

레온하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도 없을 정도로 위험천만한 추측이 머릿속에 떠올랐기에.

‘파블 경, 당신의 주군은…….’

라쉬르가 검집에서 부르르 진동했다.

***

제국의 황태자, 리카르도 운소렘은 감히 자신의 면전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눈을 형형히 빛내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레온하르트, 그대가 이렇게 뻔뻔스러운 자인 줄은 몰랐군. 근신하고 있을 줄 알았더니.”

쉰 목소리가 레온하르트의 까칠한 목에서 흘러나왔다.

“임무를 마치고 마땅한 처분을 받겠습니다.”

“임무라니?”

황태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대 임무는 내 사람 중 흑마법사가 있는지 찾는 거였네. 검증은 끝나지 않았나? 아주 완벽하게.”

누가 들어도 명백히 비꼬는 어조였지만, 레온하르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직 한 명 남았습니다.”

“……?”

“실례하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라쉬르의 칼날이 푸르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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