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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게임의 악역은 밤마다 여주인공의 꿈을 꾼다-25화 (25/120)

25화.

집무실에서 나오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그들을 숙소로 안내했다.

“트리앙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애써 평정을 유지하던 레온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하께서 화가 어지간히 많이 나신 모양이군.”

“무슨 문제 있나요?”

“가 보면 알아.”

“공자님,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안내하던 시종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트리앙은 출입이 자유로워 임무 수행에 편리하리라고 전하께서 직접 판단하셨습니다. 그래도 영 꺼려지신다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됐다.”

레온하르트는 차갑게 대답했다.

“겨우 일주일가량 머무를 텐데, 굳이 바꿀 필요는 없겠지.”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화려한 궁전에 어울리지 않는 아담하고 예쁜 벽돌집이 눈앞에 있었다.

옆에서 레온하르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많은 방 중 하필 트리앙을 내줄 줄이야. 여긴 황실 시종들도 머물지 않아.”

“전 좋은걸요.”

셀린느의 말은 진심이었다.

레온하르트의 투덜거림을 들었을 땐 설마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이라도 내주나 싶었다.

심하게는 마구간이라거나.

하지만 실제로 본 트리앙은 예쁜 이 층 벽돌집이었다. 상주하는 시종이 없는 것 정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레온하르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

그들이 황태자 궁에 도착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셀린느는 정말로 트리앙에서의 생활이 마음에 들었다. 거대한 성이나 저택이 아닌 평범한 집에서의 삶.

“셀린느 루테, 이제 오븐에 반죽을 넣기만 하면 돼요.”

그녀는 대니의 지시에 따라 반죽을 오븐에 넣고 문을 닫았다.

매 끼니마다 오는 전담 요리사가 있었기 때문에 딱히 빵을 구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셀린느는 이 기회에 꼭 빵을 구워 보고 싶었다.

잠시 후.

대니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빵을 맛보더니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루테는 요리에 소질이 전혀 없으시군요. 괜찮아요. 강력한 마법사이시니까요!”

셀린느는 웃으며 빵을 건네받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대니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설마 그 정도로 맛이 없으랴.

하지만 대니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정말이네요.”

“뭐, 루테께서 손만 까닥이면 요리사가 온갖 빵을 대령할 텐데요. 너무 의기소침해하지 마세요.”

-쾅!

누군가가 문을 크게 열어젖혔다. 셀린느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섰다. 레온하르트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성큼 걸어왔다.

“리카르도 전하께서 이번엔 또 뭐라고 하시던가요?”

“드디어 날을 잡으셨다더군.”

일주일.

황태자의 약속대로라면 이미 모든 측근들을 검사하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하지만 황태자의 측근들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레온하르트 베르누이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 몽고메리 후작인지 몽고마리 후작인지가 독감에 걸려 누워 있더라, 하는 결말은 아니겠죠?”

“몽고메리다. 그리고 이번엔 확실해.”

레온하르트는 조금 전, 황태자와 나눈 대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전.

레온하르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로 황태자 집무실에 도착했다.

어제, 종일 말을 달려 몽고메리 후작저로 가 보니 후작은 심한 독감에 걸렸다며 대화조차 거부했다.

크렐린 재정관은 남부로 출장을 떠났다.

레온하르트는 그 사실을 재정관의 사무실에 들이닥친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비에라 백작 부인은 아이가 성홍열에 걸렸다며 그 누구의 접근도 거부했다.

기사단장 파블 데하카는 신사의 명예를 건 결투가 예정되어 있다면서 정중히 레온하르트를 문전박대했다.

그 외 다른 황태자의 측근들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조사를 거부했다.

처음부터 거부하면 모를까, 레온하르트가 시간을 들여 사저나 집무실에 도착한 뒤에야 거부하는 건 무례한 행각이었다.

“조사는 잘되어 가고 있나?”

“상황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황태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흥분하지 말게. 그걸 해결하려고 그대를 불렀으니.”

“…….”

레온하르트는 무어라 대답했다간 황실 모독죄로 끌려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내 사람들이 그대를 피하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황태자는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해해 주게.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유쾌한 일은 아니지 않나.”

레온하르트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저도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알아, 알아.”

황태자는 미소 지었다.

“그대에게 유감이 있진 않으니 오해하지 말도록. 자, 이걸 보게.”

그는 레온하르트에게 긴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레온하르트는 빠른 속도로 양피지를 읽어내렸다.

“전하, 이건…….”

목소리가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동의는 다 구하신 겁니까?”

“하나같이 반색하던데.”

서류의 내용은 간단했다.

황태자의 모든 측근들이 한날한시, 황태자 궁의 연회장에 모여 라쉬르의 심판을 받는다.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찌푸렸다. 당연히 이 방법이 훨씬 간편하고 시간도 단축한다.

하지만 여태껏 그가 사저로 찾아가 일대일 대면을 요청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만약 흑마법사가 이 중 있다면…….”

“모든 나의 사람들이 위험에 빠지겠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는 먹잇감을 노리는 독수리와 흡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말해 보게. 만약 내 사람들 중 흑마법사가 있다는 걸 내가 안다면 이런 계획을 세우겠나?”

“당연히 전하께선 모르신다는 걸 압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낸 순간 실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황태자는 당연히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어떤가. 내 사람들 중 흑마법사가 정말로 있다면? 조금이라도 반대하지 않겠나?”

“……어떻게 반대하겠습니까. 반대하는 순간,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게 들통날 텐데.”

“몇 명을 꼬드겨 같이 반대한다면 티도 나지 않겠지.”

황태자는 레온하르트를 쏘아보았다.

“어쨌든, 직접 확인해 보게. 난 걱정하지 않아. 그중 그 누구도 흑마법사가 아닐 테니까.”

레온하르트는 정중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사를 하고 물러나는 내내, 황태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이 레온하르트를 압박했다.

“……이렇게 된 거야.”

레온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설명을 끝마쳤다.

셀린느는 딱 잘라 정리했다.

“그러니까, 리카르도 전하께선 일종의 도박을 하시는 거군요.”

“그래.”

“레온하르트는 어떻게 생각해요? 전하의 생각이 옳을까요?”

“나야 모르지.”

레온하르트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하지만 전하께선 확실히 흑마법과 관련이 없어. 황제 폐하께서 가장 염려하는 상황은 아닌 거지.”

“리카르도 전하는 상당히 무모하시군요.”

“원래 성정이 그러신 분이지.”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여태까지 위험에 휘말리는 건 나 정도였으니 상관이 없지만…… 본인 측근들까지 도박판에 올려놓으실 줄이야.”

셀린느의 눈이 커졌다.

“그게 왜 상관이 없어요?”

레온하르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셀린느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이지?”

“레온하르트가 위험에 휘말리는 게 왜 상관이 없죠?”

“그야…….”

레온하르트의 입은 몇 마디 달싹이다 닫혀 버렸다. 순간, 셀린느의 작은 몸이 분노로 확 달아올랐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아니면 너무 강하니까? 레온하르트도 다치잖아요! 아, 저처럼 죽어도 죽지 않는 몸이면 알려 주세요. 참고할 테니.”

“아, 아니.”

셀린느는 레온하르트가 반박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말해 봐요, 전 아예 죽지를 않잖아요. 그럼 전 위험에 빠져도 되는 거네요? 레온하르트보다 더?”

“……절대 아니지.”

“그럼 레온하르트도 위험에 휘말리면 안 되는 거죠. 여태까지 리카르도 전하께서 잘못하신 거고.”

레온하르트는 창백한 볼이 달아오를 정도로 화를 내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황실 모독죄로 끌려가고도 남았을 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대답을 하기 위해 뱃속 깊은 곳으로부터 힘을 쥐어짜 내야 했다.

“고맙다.”

“고맙다는 소리 들으려고 한 말 아닌데요. 레온하르트가 하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에게 식탁 위의 빵을 가리켰다.

“대니가 직접 구운 거예요. 먹으면서 좀 반성하세요.”

한 입 베어 물자마자 레온하르트는 빵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먹을 만하군.”

“정말요?”

셀린느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난 빈말은 안 해. 특히 먹는 것 관련해선. 단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담백하니 나쁘지 않은데.”

레온하르트는 사실 자신이 만들었다고 머뭇거리며 털어놓는 셀린느를 즐거이 바라보았다.

입 안에서 소금 덩어리가 씹혔지만 달게 느껴졌다.

***

마침내 황태자가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정말 꼭 가야겠나?”

“혼자 있으니 심심한걸요.”

셀린느는 가벼운 변덕인 양 대답했지만, 그녀와 레온하르트 모두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황태자의 측근은 모두 서른셋.

모두 결백하다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만약, 개중 흑마법사가 있어 정체를 드러낸다면…… 아무리 레온하르트라도 인질 서른둘을 지키며 싸울 수는 없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셀린느는 연회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공식적으론 황태자의 비공식 연회였기 때문에 그에 알맞은 옷을 입어야 했다.

대니가 즉각 코르셋을 가져왔다.

“셀린느 루테, 싫어하시는 건 알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착용하셔야 합니다.”

“입으면 죽어서요…….”

셀린느는 말꼬리를 흐렸다.

“…….”

대니는 군말 없이 코르셋을 치우고, 기다란 벨벳 드레스를 꺼냈다.

두 시간에 달한 몸치장을 마치고 거실로 나와 보니 예복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레온하르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셀린느는 자신의 입이 바보처럼 벌어지는 걸 느꼈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암녹색 예복은 레온하르트의 탄탄한 몸매를 은근히 드러냈고, 양어깨에 부착된 번쩍이는 금장은 조각 같은 얼굴을 더욱 부각시켰다.

셀린느는 레온하르트의 질문을 받고야 정신을 차렸다.

“어떤가?”

“움, 움직이기 힘들어요.”

셀린느는 수십 가지 보석이 목 전체를 덮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분명 보석과 화려한 드레스를 좋아했지만,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니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돌아가기 전까지 좀 더 편안한 옷을 주문해야겠군. 황도의 재단사들이 솜씨가 좋으니까.”

그때, 말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들을 연회장까지 데려다줄 마차가 도착한 것이다.

레온하르트가 셀린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레이디.”

잠시 후.

그들은 연회장 건물에 도착했다.

셀린느는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거대한 미술관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천장과 바닥, 벽면을 모두 벽화가 뒤덮고 있었고, 각양각색의 화려한 조각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에 비해, 실제로 연회장에 들어선 인원수는 정확히 서른다섯이었다. 악단이나 시종 등 으레 있어야 할 고용인들도 없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일어날 일들은 당사자들 이외 그 누구도 보지 말아야 할 일이었기에.

레온하르트는 황태자의 측근 서른셋이 모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온하르트 공자, 언제 일을 시작할 거요?”

어디선가 비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레온하르트는 화자가 몽고메리 후작임을 확인하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후작은 심한 독감을 얼마 전까지 앓던 사람치고 매우 정정해 보였다.

“몽고메리 후작, 쾌유하신 걸 보니 기쁘군요.”

“사실 아직 좋지 않아. 하지만 리카르도 전하의 명인데, 안 따를 수가 있나.”

후작은 한 손으론 자신의 희멀건 염소수염을 쓸어내리고, 다른 한 손은 레온하르트를 향해 내밀었다.

누구도 라쉬르가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오직 셀린느만이 후작의 왼손에 섬광이 번뜩이는 걸 느꼈을 뿐이었다.

“아아아악!”

후작은 체통도 잊은 채 왼손을 부여잡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흐아악!”

레온하르트는 몸부림치는 후작의 손등을 확인했다. 붉은 피 한 방울이 미세한 상처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선언했다.

“몽고메리 후작의 결백이 입증되었습니다.”

경악에 찬 침묵이 연회장 전체에 내려앉았다. 누구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후작의 비명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비에라 백작 부인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고통, 어느 정도 지속되죠?”

“개인차가 있지만 삼십 분 안엔 완전히 멈출 겁니다.”

“…….”

백작 부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레온하르트를 향해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다음 순간, 백작 부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확히 삼십 분.

레온하르트가 자신과 셀린느를 제외한 연회장 안 모든 사람들의 결백을 입증하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조용했던 연회장엔 비명만이 울려 펴졌다.

“……만족하는가, 공자!”

몽고메리 후작이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보았지? 우린 모두 결백하네!”

그때, 셀린느의 맑은 음성이 연회장에 울렸다.

“한 명이 모자라는데요, 레온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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